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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스른 호치민과의 만남

호치민 묘소
▲ 베트남의 성지 호치민 묘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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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묘소의 입구는 생각보다 삼엄했다.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이 관광객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날리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정문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카메라 등 전자제품들을 모두 맡겨야만 했다. 심지어는 액체형 폭발물 때문에 플라스틱 물통마저도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강요하던 그들.

한마디로 오버액션이었다. 물론 호치민이 현 베트남의 국부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겠으나, 그의 시선을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지켜야 되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누가 그의 시신을 해코지할 것이며, 또 그렇다 한들 꼭 이렇게 해야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카메라에 물통까지 뺏기고 난 뒤 아까 보았던 그 긴 줄 뒤에 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호치민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느끼는 그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 이는 결코 나만의 감정이 아닌 듯 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참배객 대부분이 상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인은 물론이거니와 베트남인 역시. 하긴 먼 외국에서 호치민을 접한 나마저도 이러할진대 베트남 국내에서 자신들의 국부로서, 최고의 영웅으로서 호치민을 배운 저들은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자연스레 북한의 김일성이 떠올랐다. 호치민과 마찬가지로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 아마도 북경의 마오쩌둥이나 모스크바의 레닌을 보러가는 이들보다는 김일성을 보러 가는 북한 사람들의 마음이 호치민을 보려는 베트남 사람들과 비슷할 것이다. 어쨌든 호치민이나 김일성의 미소가 마오쩌둥이나 레닌보다 아직까지 국가에 의해 신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저 멀리 호치민의 묘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더 많은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기분 탓인지 그들의 표정은 더욱 삭막해 보였다. 괜스레 주눅이 들어 덩달아 뻣뻣해지는 나의 표정.

그토록 가고 싶었던
▲ 호치민 묘소 그토록 가고 싶었던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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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덤 입장. 약 5m에 한 명씩 군인들이 서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딱딱한 분위기가 약간은 서늘했던지 아내가 내 손을 잡으려 하자 옆에 있는 군인 한 명이 그마저 제지하고 나섰다. 내 참, 죽은 호치민 부부 손잡는 것까지 말릴까. 그것도 자상하기 그지없어 호 아저씨라 불리는 호치민 아니던가.

앞선 사람들을 따라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자 큰 방이 나왔고, 그곳 한가운데 투명한 유리관 속에 생각보다 작은 체구의 호치민이 누워 있었다. 조금은 어둡고 붉은 조명 아래,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내놓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반드시 누워있는 호치민.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 호치민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시간을 뛰어넘어 마음속으로 그리던 위인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그 신기함.

호치민 시신 뒤에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낫과 망치가 베트남을 뜻하는 큰 별과 함께 조각되어 있었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아마도 그것은 호치민이 평생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세상이었을 것이다.

영웅 호치민

호치민이 원치 않았던 개인우상화
▲ 우상화 호치민이 원치 않았던 개인우상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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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호치민과의 짧은 조우를 끝내고 무덤에서 나오자 드는 감정은 호치민 개인에 대한 연민이었다. 비록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호치민에 대한 숭배는 그가 생전에 그토록 혐오하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석가모니처럼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까지 남겼던 호치민.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하고, 그 재는 세 상자로 나누어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 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 되는 집을 하나 세워 방문객들이 쉬어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 방문객들이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는다면 세월이 지나 그 나무들이 숲을 이룰 것이다."

결국 그의 간절한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예들은 베트남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호치민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들의 부족한 정치적 정당성을 채우기 위해 국부 호치민의 권위를 빌린 것이다. 죽은 호치민이 현재 베트남의 권력을 살리는 꼴이었다.

못난 후예들 때문에 편히 눈도 감지 못하는 호치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는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호치민과 같이 전 민족이 아무 의심 없이 존경할 수 있는 큰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부러웠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상징
▲ 호치민 박물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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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대사를 돌아보자. 과연 남북을 통틀어 민족 구성원 모두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 있는가. 불행히도 서로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반 쪼가리 영웅만 존재하는 우리.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어쩌면 그러한 영웅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한 개인 때문에 국가가 통일되고 혹은 분단될 수는 없겠지만 분명 호치민으로 대표되는 영웅은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중요 요소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일성을 민족의 영도자라고 이야기하지만 한국전쟁 발발은 물론 자신을 우상화시켜 정권을 세습시킨 그를 호치민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또한 친일, 친미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반공을 부르짖으며 민족의 반을 빨갱이 칠한 남한의 권력자들을 어찌 호치민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이 이러하니 마냥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손들에 의한 맹목적인 호치민 신격화는 수정되어야겠지만 어쨌든 호치민은 지금의 베트남을 있게 해 준 존재 그 자체이며, 인류 역사에 있어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호치민 묘소 그 주변

한때 프랑스의 총독 관저였던 주석궁
▲ 주석궁 한때 프랑스의 총독 관저였던 주석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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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기 그지없는 그의 침소
▲ 호치민의 침소 소박하기 그지없는 그의 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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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주변에는 호치민이 생전에 살았던 공간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독립 이후 호치민이 그곳에서 베트남을 통치했다는 집무실과 호치민이 죽을 때까지 기거했다는 가옥, 호치민이 거닐었던 정원 등 그 모든 것들이 호치민의 이름으로서 기념되어지고 있었다.

과연 검소하기로 유명했던 호치민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면 자신의 시신도 모자라 족적까지 이렇게 거창하게 호명되고 있음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비록 베트남을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한 개인이 이렇게 우상화되고 있는 베트남의 현실을 그대로 목도할까?

호치민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에는 안내판이 서 있었는데 그곳에는 베트남어,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가 적혀 있었다. '베트남 사람이 가는 길'과 '외국 사람이 가는 길'로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번역이었지만 어쨌든 그만큼 하노이에, 특히 호치민 묘소에 한국인들이 많이 온다는 뜻이리라.

공산주의자 호치민의 방에 걸린 초상화
▲ 맑스와 레닌 공산주의자 호치민의 방에 걸린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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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을 접하고자 하는 행렬들
▲ 행렬 호치민을 접하고자 하는 행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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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내가 만난 베트남 택시기사들은 베트남에 한국인이 많으냐는 나의 질문에 하나같이 한국인들이 유독 호치민을 많이 찾는다고 대답했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한국인들이 호치민을 찾는 것은 베트남에 관해서 아는 것이 베트남전 밖에 없어서일까? 아님 영웅주의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제대로 된 영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혹은 North Korea와 South Korea를 헛갈렸는지도 모를 일이군.

베트남의 국보1호라는 일주사
▲ 일주사 베트남의 국보1호라는 일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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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거처 밖에는 호치민 박물관이 있었지만 개장 시간이 지난 터라 들어갈 수 없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후기를 보면 꽤 볼 것이 많은 박물관이라고 했지만 이미 호치민의 시신까지 본 터라 못 봐도 그만, 후회는 없었다. 나중에 또 다시 하노이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한 번 들려보리라 기약만 할 뿐이었다.

박물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이만 나가려는데 박물관 앞에 위치한 건물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연못 한가운데 하나의 돌기둥 위에 세워져 일주사라 불리는 사찰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가이드의 설명을 귀동냥 하니 1049년에 세워진 이후 몇 번이고 불에 탔지만 그때마다 복구한 베트남의 국보 1호라 했다. 마지막 전소가 베트남전 당시 미군폭격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가이드.

과거 하노이 궁궐 옆에 세워진 원찰이라니 우리로 치면 원각사 정도 되려나. 그리 다른 처지도 아니건만 탑골공원 한 구석 유리 보호막 뒤에 꽁꽁 숨겨져 그 진가도 인정받지 못하는 국보 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생각하니 약간 씁쓸할 뿐이었다.

원각사를 돌아 나와 다시 호치민 무덤이 서 있는 바딘 광장에 섰다. 참배 시간이 끝난지라 아침나절 그 길었던 줄은 사라져 있었고 관광객들이 군데군데 모여 묘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무덤 옆 붉은 글씨들. 옆의 가이드 설명을 들어보니 "위대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 뭐 이런 비스무리한 뜻의 구호라고 했다. TV를 통해 평양의 붉은 글씨들을 보면 그리도 촌스럽더니, 호치민 무덤 옆에 있는 것은 글씨도 왜 그리 멋있어 보이는지. 결국 그 모든 것이 나의 편견 때문이던가.

뜻을 알면 유치했을까?
▲ 알 수 없는 그들의 구호 뜻을 알면 유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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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묘소를 벗어나 다시 하노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토록 원하던 호치민을 봤기 때문인지 나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트남,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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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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