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암을 나와 봉천암으로 간다. 봉천암은 구층암과 길상암 중간쯤에 터 잡고 있다. 들머리에 이르니 '출입금지'라 쓰인 팻말이 길을 막는다. 이곳에 오기 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은 현재 스님들의 용맹정진 처인 선원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눈앞에 스님 한 분이 올라가는 걸 보고 용기를 내 뒤따른다. 몇 걸음 걷지 않아서 봉천암에 당도한다. 봉천암은 적요롭기 짝이 없는 절집이다. 풀벌레들조차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 건 이곳이 화두만을 참구하는 운수납자들의 집인 줄 알기 때문인지 모른다. 숨소리를 죽여가며 가만가만 사방을 둘러본다.
한때 전강 스님(1898~1975) 도 수행했던 봉천암
전각이라곤 팔작지붕을 한 기와집 한 채뿐이다. 띠살문으로 된 어간문 위, 서까래 아래에 봉천암이란 현판이 붙어 있지 않았다면 그냥 여염집인 줄 알았을 정도다. 봉천암이 언제 처음 창건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846(헌종 12년)에 환봉선사라는 스님이 본존요사와 산왕각을 중건했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다만 화엄사의 연혁과 사적은 물론 화엄사에 관계되는 문헌 및 수장하고 있던 물명(物名)까지 기록한 <화엄사사적(華嚴寺事蹟)>(1697년 화엄사 간)에 나오는 '봉천원'이 이 봉천암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400년은 되지 않을까 싶다.
건물이 초라하다고 해서 여기 머문 정신들마저 초라하라는 법은 없다. 한때 당대를 대표하는 선지식으로 추앙받던 전강 스님(1898~1975) 같은 분도 여기 머무른 적이 있다고 전한다. 그래서 전강 스님이 있을 당시의 화엄사 스님들은 이 봉천암을 조실 채라 부르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이곳이 선원으로선 이름이 꽤 알려진 곳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에 다녀간 사람들 중엔 특기할 만한 분이 있다.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1454~1492)이다. 그는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능을 복위시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임사홍·정창손 등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한 일이 계기가 되어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그가 유랑생활 틈틈이 쓴 일지가 남아 있어 유랑하면서 거쳐간 곳을 알 수 있는데 1487년에 쓴 <지리산일과>에는 봉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말하는 봉천사는 아마도 <화엄사사적>에서 말하는 '봉천원'과 동일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생육신 남효온이 잠시 여독을 풀던 곳
그가 이곳에 당도한 것은 1487년 10월 5일이었다.
10/5일
(전략)
이 날 30리 길을 가서 봉천사(奉天寺)에 이르렀다. 절은 대숲 속에 있었다. 누각 앞의 길게 뻗은 시내는 대숲 속으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이 절은 경관이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이 날 나는 인종 황제의 죽음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절의 주지 육공(六空)은 신축년(1481)에 내가 송학산(松鶴山)을 유람할 때 개성(開城) 감로사(甘露寺)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누각 위로 나를 영접하였고 선당(선당)에서 묵게 하였다.
10/6 봉천사
비가 내려 봉천사에 그대로 머물렀다. 누각 위에 앉아서 근체시 한 수를 지어 누각의 창에 걸어놓았다.
-최석기 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돌베개 간)에서
남효온은 10월 7일 황둔사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10월 8일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하룻밤을 더 자고 나서 영영 봉천사를 떠난다.
10월 6일, 남효온이 비 오는 날 봉천사 누상에 앉아 쓴 근체시(칠언율시)는 <봉천사 누창에서 쓰다書奉天寺樓囱(서봉천사루창)>라는 제목으로 그의 문집인 <추강집>에 실려 있다.
禿翁三十謝靑衿(독옹삼십사청금) 대머리진 늙은이 서른 살 유생에게 인사할 제
九月頭流錦樹林(0월두류금수림) 구월의 두류산은 수목에 비단을 둘렀어라
雨打斜風樓外響(우타사풍루외향) 빗방울 때리고 바람 비껴 부나 누 밖의 소리요
溪穿竹底檻前吟(계천죽저함전음) 시냇물은 대숲 아래를 뚫지만 난간 앞에서 읊조릴 뿐이라
霜能脫落千林葉(상능만락천림엽) 서리는 능히 온 숲의 나뭇잎을 다 떨어뜨리는데
秋不彫零一木心(추불조령일목심) 가을은 한 그루 나무의 마음도 떨구지 못함이여
枯淡襟懷還潑潑 (고담금회환발발) 고담한 마음속 회포는 도리어 크게 활발하여
曉囱茶罷四山沈(효창다파사산침) 새벽 창가 차를 마시니 사방의 산은 잠겨 있더라
"서리는 능히 온 숲의 나뭇잎을 다 떨어뜨리는데 / 가을은 한 그루 나무의 마음도 떨구지 못함이여"라는 시구 속에 남효온의 심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아마도 한 그루 나무란 자신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화엄사사적>은 봉천원 경내에 산호루·배운루란 누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남효온이 시를 썼던 공간은 그 둘 중 하나의 누각일 것이다. 지금 그 누각이 있던 자리를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봉천암에는 꽤 너른 공터가 있으니 그 공터 중 계곡과 대숲이 가까운 지점에 있지 않았겠는가.
비록 실의에 빠져 시작한 방랑이었지만 남효온은 자신이 처한 불우한 처지를 자신이 국토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삼는다. <지리산일과> 같은 기행문이 그것이다. 그처럼 그는 국토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뚜렷한 역사 의식도 있었던 사람이었던 같다. 말년에 사육신의 전기인 <육신전>이 그걸 말해준다. 그러나 그의 불우한 운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능을 복위시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려 했던 일 때문에 사후에 부관참시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겪게 되는 것이다.
계곡 가까운 쪽 대숲 앞 공터를 지나 계곡으로 가 바위에 걸터앉아 더운 머릿속을 식혔다.
부관참시란 원시적 형벌에 대하여, 확인사살하지 않고는 결코 안심하지 못하는 권력의 반문명적 행태에 대하여.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의 얼굴을 한 권력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선원으로 돌아왔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날이 무척 덥다. 약수터로 가서 손으로 물을 떠 한 모금 쭈욱 들이킨다. 시원함이 폐부를 찌른다. 가만히 보니, 이 약수터엔 산 위 어딘가로부터 쉴 새 없이 약수를 날라오는 대나무로 만든 대롱과 수도꼭지가 병존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요소가. 이것은 대립인가, 공존인가.
장차 이 두 가지 장치에 들이닥칠 운명에 대해 묵상한다. 조만간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이 사라질까. 문명의 추세라면 당연히 대롱이 치워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롱이 남기를 원한다. 현대는 편리하긴 하지만 마음이 없고, 원시는 불편하지만 마음이 살아있다. 선원이란 곳이 마음을 닦는 곳이니 아마도 헌신짝처럼 시원(始原)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봉천암을 떠난다. 부디 불편한 원시가 살아남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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