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은 원래 태고사·안심사·영은사 등 고찰이 많은 산이었다. 그러나 이 세 절은 모두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버려 지금은 옛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특히 1759년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부처의 치아 사리와 의습을 봉안한 안심사 계단이 있는 안심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부속암자만 13개나 될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둔산 자락 영주사를 찾아간다. 영주사는 옛 영은사가 불탄 자리에 세워진 절이다. 논산 벌곡면 소재지에서 대둔산 수락리를 향해 간다. 마을 앞에서 나이 지긋한 어른에게 영주사 가는 길을 물으니 "예서 60리가량 되는데 그 먼 거리를 어떻게 걸어가려고 하느냐?"라고 걱정부터 앞세우더니, 영주사를 가려면 덕곡리라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골짜기 샛길을 타고 가야 한다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두 시간가량이나 걸었을까. 그제서야 덕곡리 마을이 나온다. 이 지방엔 예부터 덕을 입으려면 덕밑을 찾아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대둔산 아래 자리잡은 이 아늑한 마을은 고래로부터 피난지로 알려진 마을이었던 것이다. 그 덕이란 게 뻔한 것 아니겠는가. 난리통에 목숨을 부지하려면 그곳으로 가라는 뜻 아니겠는가.
반쯤 허물어져 가는 담장이 정다운 마을을 지나 골짜기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마침내 금산에서 양촌으로 넘어가는 지방도와 만나는 곳에 도착한다. 길가에 '영주사 800m'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떠도는 백제와 신라 군사의 혼령을 위하여
이윽고 영주사에 도착했다. 영주사는 높이 363m의 영은산 아래 결가부좌를 튼 채 눈앞 바랑산을 응시하며 삼매에 빠져 있었다. 삼매에 든 영주사를 월성산·바랑산 봉우리와 영은산 봉우리가 연잎처럼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풍수지리적으로 봤을 때 영주사가 있는 자리가 연밥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하는가 보다.
영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본래 영은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다. 영은사는 언제 창건된 절인지 그 연혁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 영은사 이름이 들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18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은사는 한국전쟁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 아군이 공비 은신처를 없애려고 가차없이 불질러 버린 것이다.
이후 죽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현재 영주사 조실 스님인 풍운 스님과 주지인 법천 스님이 1985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구태여 영은사라는 절 이름을 다시 쓰지 않은 것은 영은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대부분 소멸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 전철을 밟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靈)이 숨어 있는 절이라는 뜻을 지닌 영은사보다는 영이 상주하는 절이라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영주사라 지었다는 것.
백제의 오천 결사대가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던 황산벌이 멀지 않은 이곳에 신라와 백제군의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던 게 두 스님이 다시 절을 일으켜 세운 이유라고 한다.
자유자재한 아라한의 경지를 꿈꾸다
가장 먼저 나그네를 맞는 것은 종루로 쓰이는 2층 누각이었다. 누하를 지나자 영주사가 본색을 드러낸다. 옛 영은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너른 터를 지녔다.
가람의 중심에는 극락전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맞은 편에는 범종루, 왼쪽에는 명부전과 오른쪽에 승방이 있는 거의 'ㅁ'자에 가까운 배치였다. 잠시 명부전을 들여다보고 나서 극락전으로 향했다.
암반 위에 중개 두 마리가 볕바라기라도 하듯 가만히 앉아 있다. 그 모습이 몹시 평화로워 보여 얼른 사진 한 장을 찍고 나서 그 곁을 지나쳤다. 그 일이 나중에 큰 화근이 될 줄이야.
잠시 극락전·삼성각을 둘러보고 나서 오른쪽 바랑산 아래로 흐르는 계류를 건너갔다. 절벽 바위 틈에 모셔놓은 오백 나한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바위틈에 걸터앉은 500명 나한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장관이었다. 협소한 나한전에 모셔놓았을 때와는 아주 달랐다. 마치 은산철벽을 앞에 두고 고행하는 성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한은 아라한arhan의 준말이다.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해서 응공(應供)이라고 번역한다. 즉 일체의 번뇌를 끊고 해야 할 일을 완성했으므로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는(無學) 경지에 이른 성자가 아라한이다.
나한들의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천지난만하게 파안대소하는 나한,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듯 눈을 내리깐 나한, 무언가에 토라졌는지 입을 쭈욱 내민 나한, 뒤를 돌아보며 해찰하는 나한, 무릎을 괴고 앉은 나한,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한 등등.
소승의 교법을 수행하는 수행자들 가운데 최고의 이상형다운 모습이란 저런 것인가. 순간, 내 정신의 내부에서 어떤 열망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 천진난만하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듯 자유자재한 저 경지에 닿고 싶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절이라서 그런지 절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던 찜찜한 기분이 여기 와서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오백 나한과 작별한 뒤, 이번에는 범종루 앞을 흐르는 계류를 건너 부도밭으로 갔다. 부도라야 달랑 2기뿐이다. 1기는 근래에 조성한 것이며 석종형 부도만이 오래 전 것이다.
종 모양을 한 부도는 기단과 몸돌만 남아 있는 채 상륜부는 어디론가 떨어져 나간 형태다. 기단은 윗부분에는 8장의 연화문을 복련으로 새겼으며 연꽃으로 된 몸돌 받침이 높게 조성되어 있다. 흔적으로 보아 상단부에 보주형의 상륜을 올렸던 것으로 보이나 파괴되어 사라져 버린 것으로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옛 영은사가 남긴 많지 않은 흔적 가운데 하나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범종루 누하를 지나 다시 영주사 경내로 들어왔다. 옛 영은사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고 이곳 저곳을 살펴보다가 범종루 옆에서 제법 큰 맷돌을 발견했다. 이만한 맷돌을 사용할 정도였다면 상당히 큰 절이었으리라.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이라는 공안을 떠올리다
영주사를 떠나려 하자,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명부전을 한 번 더 둘러보기로 했다. 그때였다. 암반 위에서 볕바라기 하던 개들 가운데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이 개의 목표가 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대비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개가 달려들어 내 종아리를 무는 게 아닌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많은 절집을 다녀봤지만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하물며 어디 고샅을 다니다가 미친 개에게 물린 적도 없던 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 전에 무릎을 다쳐 착용한 보호대 위를 문 것이었다.
그제야 가만히 생각하니 그 두 마리 개 중 한 마리가 수태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뭔가 자기네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물려고 했으면 그때 당시에 물었어야지 왜 지금에야 무는 걸까? 멀리 간 줄만 알았던 내가 다시 돌아오자 새삼스럽게 위협을 느껴 선제공격을 가한 것인지 모른다.
겁을 주려고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들었지만 개는 좀처럼 공격 자세를 풀지 않았다. 말 못하는 짐승과 계속 싸울 수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없이 내가 '작전상 후퇴'를 하기로 했다. 계류를 건너 부도밭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개는 계곡 저편에서 계속해서 짖어댔다. 부도밭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니 그날 개에게 당한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닌 모양이다.
영주사를 떠나오는 내내 난 조주선사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라는 공안을 떠올렸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이라, 석가모니는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끽다거(喫茶去)' 화두로 알려진 조주선사에게 한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조주선사는 대뜸 "없다(無)"라고 잘라 말했다.
남송 말기의 선승 무문혜개도 선가 공안 48칙을 뽑아 평과 설명을 붙인 <무문관(武門關)'>이란 책을 엮으면서 '구자무불성' 화두를 제1칙(則)으로 실었을 정도로 이 화두는 유명하다.
걸어가면서 나는 조주선사의 말에 동의했다. "흥, 석가모니는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것다. 아무래도 석가모니보다는 조주선사가 한 단계 위 아냐!"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개에겐 절대 불성(佛性)이 없다. 세상의 모든 개에겐 오로지 모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불성이 있는 내가 참아야지, 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