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에서 일제고사로 치러진 영어 진단평가문항을 얼핏 들여다보는 순간 뭔가 알맹이가 쏙 빠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초등학교 영어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듣기'와 '말하기'인데, 이번 영어 진단평가는 대부분 듣기 평가이고, '말하기' 평가는 한 문제도 없었습니다.
이는 영어 진단평가를 전국이 똑같은 문제로 사지선다형 지필검사로 평가를 하다보니 일어난 일로, 영어 진단평가 문항은 학년마다 30문항씩 출제되었는데 전체 90문항 가운데 86문항이 사지선다형입니다. 6학년 4문항만 답안지에 답을 직접 써 넣는 서답형 문항입니다. 사지선다형 지필평가로 '말하기'는 절대 평가할 수 없습니다.
제7차 영어과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의사소통능력'입니다. 교육과정에 따르면, 영어과의 내용은 언어재료를 활용해 언어기능을 익혀 '의사소통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네 가지 언어기능을 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점진적으로 함양시킬 수 있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제7차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Ⅴ-142쪽) 그래서 3학년 영어에서는 '듣기'와 '말하기'만을, 4학년에서는 '듣기', '말하기', '읽기'를, 5학년에서는 '듣기', '말하기', '읽기'에 '쓰기'를 포함시켜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평가는 교육과정에 나오는 내용영역에 나와 있는 성취기준을 도달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진단평가는 앞에 학년에서 배운 내용을 어느 정도 성취했는지 진단하는 평가로 교육과정에 나오는 내용을 모두 평가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번 영어 진단평가에서는 '말하기' 평가를 쏙 빼 놓은 것입니다. 도저히 영어 진단평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일반 교사가 이런 평가 문항을 출제해서 평가를 하겠다고 관리자의 결재를 받으려한다면, 초등교육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관리자라면 당장 평가 문항을 다시 출제하라고 돌려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말하기'를 쏙 빼고 평가한 결과로 '도달'과 '미도달'을 나누겠답니다. 말이 되지 않는 영어 진단평가입니다.
영어 진단평가에서 외국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는 '말하기'를 빼 놓은 것은 전국에서 일제히 똑같은 문항으로 진단평가를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제고사에서 가장 객관성이 보장되면서 채점하기에도 편리한 평가방법이 선다형 지필검사입니다. '말하기'는 선다형 지필검사로 치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육과정 내용조차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절름발이 평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번 평가가 대부분 CD타이틀 속에 녹음되어 있는 것을 듣고 답하는 방법으로 하는 평가가 대부분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번 평가가 진정한 영어 '듣기' 평가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 소통 능력'으로, '듣기'와 '말하기'를 서로 떼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이 쌍방활동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CD타이틀에서 일방적으로 나오는 말을 듣고 답을 하는 것은 '소통 활동'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식의 영어 평가에서는 말을 못해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토익과 토플 시험에서 증명하듯이 이런 평가에서는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아도 말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을 만들게 됩니다. 영어교육과정에서 강조하는 '의사 소통 능력'은 절대 기를 수 없습니다.
이런 평가는 테이프가 CD타이틀로 바뀐 것만 다를 뿐 바로 삼십여 년 전 우리 세대가 받아온 영어 교육 방법입니다. 제 경험을 보더라도 그동안 그 어떤 영어 평가에서도 점수는 잘 받아서 영어 점수가 부족해서 문제가 된 적이 없지만, 저는 지금도 미국인 형부를 만나면 쉬운 영어 인사 한마디가 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의 교육과정은 이런 저같은 사람을 만들지 말자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평가는 여전히 예전 방식입니다.
제7차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Ⅴ-127쪽에 다음과 같이 씌어있습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학생들에게 부담이 되는 초등학교에서 평가 방법을 잘못 활용하면 과열 과외 등 사교육비 증가의 요인이 될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초등학교의 경우 계량 평가는 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학습 활동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관찰을 통하여 학습 의욕과 용기를 북돋워 주는 서술식 방법을 권장하였다. 아직도 '일제고사가 시행과정과 방법, 평가 문항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무조건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을 하는 교사와 학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 평가 문항에 문제가 있으면 앞으로는 문제를 잘 출제하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전국 모든 학교 모든 아이들에게 한 날 한 시에 선다형 지필검사로 일제히 치룰 일제고사를 위한 평가 문항이라면, 이 쪽에 아무리 깊은 전문성을 가진 그 어떤 평가문항 출제 전문가라도, 곳곳의 아이들을 평가하기에 알맞은 문제를 출제할 수 없습니다.
또 어찌어찌 훌륭한 문제를 출제했다 치더라도 일제고사로 치룬 결과는 본래 취지와 목적을 벗어나 부작용이 더 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대안은 또 다른 방식의 일제고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제고사 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모르고 한다면 또 모르지만, 아닌 것을 알았다면 아닌 것은 빨리 없애는 것이 가장 좋은 대안입니다.
덧붙이는 글 | 얼핏보면 잘 모르겠는데, 평가 문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일제고사로 보는 평가는 평가의 본래 목적보다 부작용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교와 교사들에게는 교육과정을 준수하라고 하고, 교과부는 교육과정에 나와있는 평가지침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습니다. 교육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낡은 평가방식의 일제고사는 하루빨리 없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