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여중생의 손에서 타오른 지 어느덧 1년이 다 돼 간다. 때마침 촛불 주역들도 5개월 만에 보석 석방됐다. 광우병대책회의 박원석·한용진 공동상황실장과 백성균 미친소닷넷 대표, 김동규 한국진보연대 정책국장, 권혜진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등 5명은 지난해 11월 6일 강원도 동해시의 한 호텔에서 경찰에 붙잡혀 수감 상태로 있다가 4월 17일 보석 석방됐다.
5월을 앞두고 여러 가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우려의 가장 큰 핵심은 '촛불'이 다가오고 있다는 심리에 있다.
그동안 정부는 '명박산성'을 수도 없이 쌓았다. 촛불에 호의적이거나 관심을 보였던 방송사는 사장을 교체하거나 시사프로그램을 갈아치우거나 담당자를 체포하는 등 '군기잡기'에 나섰다. 종이 신문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압박을 해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한 시사주간지 간부는 "기업에서 갑자기 구독을 중단하거나 광고를 끊는 일이 있는데, 자연스러운 절차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슬슬 몸을 풀고 있다. 용산참사나 미디어악법 입법전쟁이나 MBC <PD수첩> 제작진의 체포 등 떨어지지 않는 소재 덕에 촛불은 단 하루도 꺼진 적이 없었다. 다시 촛불을 들자고 군불을 때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하지만 작년과 똑같은 방식으로 촛불을 들 수는 없을 것이다.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어쩌면 촛불을 드는 '행동'보다 촛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촛불 한가운데서 시를 썼던 이유는
촛불에 대한 낙관론도 점차 사라지고 진지한 분석의 결과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다. 촛불 현장에서 진지한 사유를 펼쳤던 각계의 지식인, 활동가로 구성된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이하 '촛불을 끄셨나요')를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이 책은 촛불에 대한 낙관론을 경계하며 촛불에 대한 한계를 '불편하게'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비판들은 촛불 현장에 머물렀던 눈치 빠르 사람이라면 알만한 상식적인 내용들이다. 촛불이 비정규직을 비춰주지 못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며 정치, 문화,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촛불'과 연결시키며 중심 키워드에서 주변부로 확대되는 흐름을 보인다. 때문에 단지 정치, 문화, 여성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촛불에서 나타난 다양한 문제로 이야기가 확산되는 것이다.
예컨대 여성은 소외계층을 상징하며 비정규직, 노숙자, 농부, 실업자, 학생들을 대표한다. 이런 구성은 촛불에 대해서 비교적 단순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촛불에서 파생된 문제들을 긴밀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촛불 한가운데에서 촛불에 대해 느꼈던 막여한 회의감이 이제야 언어를 찾은 것과 같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촛불 한가운데서 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취재를 하고 사진을 찍고 블로그질을 했다. 하지만 점점 촛불과 촛불시민, 촛불정신에 관한 추상론이 공허하게 들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취재를 접고 시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 내가 기사나 블로그 포스팅 대신 '시(詩)'를 선택한 것은 촛불이 겉테두리를 비추고 있지 않은지,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무조건반사처럼 타고 있지는 않은지, 세심하게 비추고 세심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등의 회의감이 작동한 결과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중략)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 기형도 시작메모
촛불의 한가운데서는 적어도 기형도 시인처럼 고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부가 그어 놓은 불법이라는 허울을 제외하고는 모든 과정이 민주적이었고 토론은 합리적이었고 행동과 말은 상식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상식은 상식의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
<촛불을 끄셨나요>은 "촛불은 단지 중간계급의 시민운동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촛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촛불시민들은 촛불의 현상을 이해하는 '상식'선에 멈춰 있었지만, 촛불이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일각'이 아니라 '빙산'을 찾아야 한다. 고구마줄기를 계속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만일 10대들의 외침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고통이 우리 사회 전체의 고통을 좀 더 연속적으로 읽어냈더라면, 그리고 그 목소리를 시민 혹은 국민의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성급하게 번역하기 전에 시민이 되지 못한 국민이 되지 못한 그 어떤 주체들의 목소리를 대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면"(125쪽), 향후 촛불의 의미와 성격은 전혀 달려졌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들의 생각이다.
이런 '무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세력의 가벼운 공격에 쉽게 흔들렸다. 이를 통해서 저 집권세력이 시민들을 '배후조종' 당한다고 말했을 때,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을 무능력한 아들이라고 폄하했을 때 시민들이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238쪽)
질척하지 못한 '사유의 언어'는 아쉬워
<촛불을 끄셨나요>는 이제까지 읽었던 어떤 촛불의 이야기보다 감회를 주고 있다. 한 출판사의 편집자는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촛불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도 그의 한 마디 논평 때문이다.
이 책의 모든 논점에 대해서 동의하면서도 책을 덮은 후에 마음속에 남는 아쉬움이 있었다. '상식'을 넘어 깊이 있는 사유를 시도했지만 '상식'을 통과하지 않았기에 '현장성'이 부족한 점은 이 책의 공감대를 반감시킨다. 정제된 언어만이 아니라 좀 서투르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했더라면 이 책의 비판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냄새'가 잘 안 난다.
이 책이 던지는 비판을 모두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촛불'이 마련해준 '만남의 공간'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친해지는 과정을 지나야만 비로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촛불을 끄셨나요>의 비판점은 성급한 면이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해 유명한 예화가 있다. 2008년 '촛불' 이전에는 화물노조가 공적인 가치를 내걸고 파업을 했지만 시민들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민영화 반대, 시민안전, 공공성 확보 등 시민들에게 직결된 사안인데 말이다.
2008년 운수노조는 동일한 명분으로 파업을 했지만, 이번에는 시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촛불이 가져다준 대화의 힘이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고 미약할 것이다. 촛불은 이제 '1살배기'밖에 되지 않았다. 촛불이 성년이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비판보다는, 촛불이 성년이 될 수 있는 방안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불편함의 미덕'은 매우 중요한 단서다. 촛불은 이제까지 필요 이상의 찬사를 받아 왔다. 촛불이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음에 비해서는 너무 긍정적 평가다. <촛불을 끄셨나요>의 편집주간은 "독자들이 동의하지 못하고 불편해할 점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 '불편함'이 촛불을 지피는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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