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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오후. 쉬고 있는데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문화재체험학습숙제를 내일까지 해가야 한단다. 집에서 가까운 경복궁으로 부랴부랴 나서는데 아이 표정이 개운치 않다. 즐거운 '체험'으로 끝나는 나들이면 마냥 헤헤거릴텐데, 뒤를 따르는 골치 아픈 '학습' 탓일까? 가는 내내 뚱한 얼굴이다.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통로...오늘 여행이 피곤할 것 같은 예감
▲ 경복궁 역에서 경복궁으로!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통로...오늘 여행이 피곤할 것 같은 예감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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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경복궁역에 내리자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아들이 한마디 한다.

"아빠, 오늘은 제가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안돼요?"

경복궁은 여러 차례 와 본 터(볼 것 거의 다 보았음), 숙제는 안내책자에 있는 것 베끼면(할 것 다 정했음)되니… 기분 좋게 인심 썼다.

"좋아! 앞장 서. 아빠는 사진만 찍을게"

관람시간을 확인하고 있다. 얼핏보면 계획성이 있어 보임.
▲ 몇 시까지 하지? 관람시간을 확인하고 있다. 얼핏보면 계획성이 있어 보임.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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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까지 하지?"

아들이 알림판에 적혀있는 관람시간을 먼저 확인한다. 그렇지. 계획성있는 자세… 좋아! 시간을 잡도리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기본이지… 흐뭇하다.

"아빠, 1박 2일 몇 시에 하지? 그 때까지만 보고 가자"

저, 저… 텔레비전 보려고? 그러면 그렇지. 

근정전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자 인상을 찡그린다.
▲ 근정전 앞에서 근정전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자 인상을 찡그린다.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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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아, 이게 바로 근정문이야. 저기 보이는 것이 근정전이고…."
"와아~아빠! 저기 사람들 엄청 많아. 저 쪽으로 가보자!"

조용히 뒤만 따르기로 했지만 아버지로서 뭔가 가르쳐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여는 순간 아들놈, 말꼬리를 댕강 잘라먹고는 근정전으로 냅다 달린다.

나, 카메라맨도 허겁지겁 뒤를 따를 수밖에!

근정전 월대에 있는 원숭이를 보자 반가워한다.
▲ 아이를 닮은 원숭이, 원숭이를 닮은 아이? 근정전 월대에 있는 원숭이를 보자 반가워한다.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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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띠라고 토끼 앞에서 한 방~ 찰칵!
▲ 친구야! 토끼띠라고 토끼 앞에서 한 방~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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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와~원숭이다! ...아빠, 사진 한 장 찍어줘요"
"아빠, 나 토끼띠죠? ...토끼랑도 사진 찍어야지."

궁궐 건물은 눈에 들오지 않는 듯, 저 닮은 원숭이며 토끼 따위 동물 친구들만 챙긴다. 근정전 월대를 둘러싼 열 두 동물을 따라 가며 몇 바퀴 돌더니 지쳤나 보다. 근정전 모서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본다.

추녀가 아름답다. 아파트와 빌라 지붕만 쳐다보던 아이가 꽤나 신기하게 여김
▲ 경복궁 추녀 추녀가 아름답다. 아파트와 빌라 지붕만 쳐다보던 아이가 꽤나 신기하게 여김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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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빠, 지붕 늘어진 것 좀 봐!  멋있다!"

날마다 보는 것이라곤 아파트니 빌라니 네모 반듯한 지붕과 처마뿐이니, 휘청 늘어진 궁궐 추녀가 신기했나 보다.

"자식, 이런데 관심이 있구나!  경복궁 오기만 하면 박물관만 보여줬는데…."

아들 호들갑에 내 마음도 함께 달뜬다.

아이가 가장 즐거워 한 순간
▲ 경복궁 자판기 앞 아이가 가장 즐거워 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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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곳에 서서 즐거워하고 있다.
▲ 나는 수문장! 사진 찍는 곳에 서서 즐거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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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목말라! 콜라 하나 사주라"

그러면 그렇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아들이다.

네가 '먹으러'왔지, '보러'왔겠니…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통을 빼주자 입이 벌쭉해지며 신이 났다. 얼굴만 내밀면 수문장이 되었다 장군도 되는 요술(사진촬영용)나무판 뒤를 이리저리 오가며 장난을 친다.

한참 놀더니 "물고기 보러 가요오~!" 소리치고는 경회루 연못 쪽으로 내달린다. 이제 카메라맨은 안중에도 없다.

무슨 생각을 할까?
▲ 경회루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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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할까.

웬일로 입을 닫고 얼마동안 물만 바라본다.

"아빠, 이제 어디갈까?"

이 넓은 궁을 앞장 서서 돌아다닐 깜냥이 못되리란 건 진작 알았지만 벌써 밑천이 떨어지다니. "저 쪽 소나무숲으로 가봐요" 어쭈, 잠깐 잃었던 방향감각을 되찾은거야?

경회루 옆 솔밭으로 뛰어간다. 아이들은 왜 이동할 때마다 달리는 지 새삼 궁금하다.
아들은 체험학습이지만, 나는 체력훈련인 셈이다.

경회루 옆 솔밭에서 배고프다고 칭얼대기 시작함
▲ 나 배고파! 경회루 옆 솔밭에서 배고프다고 칭얼대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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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옆에서 놀며 배고픔을 잊으려고 애쓰는 중임
▲ 배고픔 뒤에 찾아오는 것은 심심함? 돌담 옆에서 놀며 배고픔을 잊으려고 애쓰는 중임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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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잘못왔네.

누가 먹는 것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아이인데, 솔밭에 가니 맛있는 냄새가 사르르 봄볕처럼 밀려온다. 소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김밥이며 도시락을 까먹는 가족과 연인들이 즐비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 나도 도시락 사줘!" 
몇 번을 조르더니 별 반응이 없자 돌담을 끼고 혼자 논다. 체험학습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음을 직감한다.

"여기는 도시락 파는 곳 없으니까 어린이박물관이나 한 번 둘러보고 집에 가자!"
(아차, 간섭하지 않기로 했는데….)

어린이박물관 들어가는 대신 토끼를 껴앉고 놀고 있다.
▲ 토끼 안녕~ 다음에 보자! 어린이박물관 들어가는 대신 토끼를 껴앉고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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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오늘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말 끝나기 무섭게 직격탄을 날린다. 박물관 가는 대신 12지신상 가운데 동갑내기 토끼와 사진 한 방 찍었다. 체험기념으로. 

"아빠, 실컷 봤으니 이제 집에 가자!" 실컷 봤다고?
하하… 1박2일 할 때가 된 거겠지.

설명과 학습을 빼니 아이는 즐거워하는데… 나는 왜 허전한 거야?
'체험'보다 '학습'에 끌리는 아빠 마음, 어쩜 좋니.


태그:#아들과 답사여행, #경복궁 체험학습, #체험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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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숲 그리고 조경일을 배웁니다. 1인가구 외로움 청소업체 '편지'를 준비 중이고요. 한 사람 삶을 기록하는 일과 청소노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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