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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하게 되며, 이해하는 만큼 끌어안을 수 있다. 가끔은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정거장에 내려서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리는 곳들도 있지만 그 감정도 결국 알아가며 더욱 깊어지고 따뜻해진다. 하지만 그냥 잘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는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너무도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서서 바라볼 것인가

 

지구촌에서 이슬람 역사는 특히 그러하다. 유럽에서 동쪽을 향해 서서 보면 이슬람은 언제나 전쟁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은 셀주크투르크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700년 동안의 국토회복 전쟁, '레콘키스타'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으며, 동로마제국은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당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3000년 만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고향땅을 되찾았고, 미국은 석유와 종교를 가지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이라크를 타격했다. 이것이 서양의 관점에서 바라 본 이슬람의 모습이다.

 

이제 자리를 바꿔 이슬람 쪽에서 서서 세계를 바라보자. 분명 역사가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자세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이슬람은 거리상으로는 유럽보다 훨씬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유럽보다 멀게 느껴진다.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을 용기가 없어 그라나다를 떠나는 왕이여!

 

우리를 이슬람의 아름다운 도시들로 안내해 줄 사람은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이다. 여행기중독자가 저자를 처음 접한 것은 고 김선일씨 피랍 사건 때이다. 당시 국내 유일의 이슬람 전문가로 뉴스에 출연해 시시각각 현장 상황에 대해 해설을 하던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후 'EBS 세계 테마기행 터키편'에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방송통신대학 채널에서 강의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를 일컬어 구호전문가 한비야는 "이론과 실전을 모두 갖춘 훌륭한 길잡이'라고 하고, 소설가 이윤기는 "이슬람 시각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희귀한 학자"라고 한다. 이 책은 그와 함께 이슬람 문화권으로 떠나는 '도시 견문록'이다.

 

에스파냐의 그라나다, 모르코의 페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요르단의 페트라, 이란의 이스파한... 도시의 이름만 들어도 역사적인 전통과 이국적인 향취가 물씬 느껴진다. 저자는 그 한곳 한곳의 역사와 문화와 향취를 쉽고 담백하게 전해준다. 도시 이름의 유래, 각종 유적에 대한 역사적 해설을 재미있게 술술 읽다보면, 뚝뚝 끊겨 있던 이슬람 역사의 행간이 빼곡하게 채워진다.

 

이 책의 진면목은 책을 펴고 얼마지 지나지 않아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곳은 에스파냐의 그라나다. 8세기에서부터 15세기에 이르는 동안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하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왕조가 지배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함브라 궁전'을 지었다. 이슬람을 몰아 낸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은 이 궁전을 보고 어찌나 아름다운지  "내 생애보다 더 귀한 궁전"이라고 하며 그대로 보존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궁전을 놔두고 돌아서야 했던 이슬람 왕조의 왕은 누구였을까?

 

바로 나스르 왕조의 '보압딜 왕'이었다. 보압딜 왕은 시민의 안전을 조건으로 이사벨 여왕에게 항복하고 모로코 패스로 쫓겨났다. 하지만 시민들은 무참하게 살육 당했고, 훗날 그라나다의 어느 무명시인은 노래했다.

 

죽을 용기가 없어 그라나다를 떠나는 왕이여!

남아있는 인생이 무어 그리 대단할진대

그까짓 왕관하나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라나다를 떠나가느뇨!

 

보압딜 왕이 63세로 눈을 감은 모로코의 페스에는 알함브라를 닮은 초라한 페스 궁전이 남아 있다.

 

16개 도시를 이슬람의 눈으로 여행하다 보면, 모든 도시의 역사가 더욱 흥미롭고 신비하다. 거대한 궁전들과 모스크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듯 묘사되어 있을 뿐 더러, 형태와 문양과 장식들의 의미도 자상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가 언제나 빠짐없이 찾아간다는 100년 이상 된 전통 식당들과 거리 음식, 서점들, 시장 골목, 장인들의 공방에서는 그 도시 특유의 색깔과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이 책을 사서 퇴근길에 읽다가 지하철을 다섯 정거장이나 지나치고 말았을 정도로...

 

각 도시 여행을 끝내고 나서는 역사이야기, 문화이야기, 인물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예술 양식, 그리고 인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저 백과사전을 요약한 것이 아니고 저자가 직접 그 도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챙겨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인물 이야기는 그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거나, 왜곡된 채 알고 있었던 이슬람의 위인들에 대한 내용이 인상 깊다.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는 관용과 화합의 술탄이었던 '살라딘'에 대해, 터키 코냐에서는 셀주크투르크의 민중 철학자이자 유럽의 종교개혁가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잘랄루딘 루미'에 대해, 이란 이스파한에서는 엄격한 시아파 왕조이면서도 기독교를 용납한 '사파비 왕조'에 대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는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절름발이 티무르'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에서 조단역급 악역으로 나오던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 책은 세계사에 관심이 있거나 이슬람 지역으로 여행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알 카즈네 (Al Khasneh, 보물창고)'와 같은 책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이제 책을 덮고 다시 이슬람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은 고대시대에 이미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는 거대하고 불가사의한 문명을 꽃피웠다. 중세 이슬람 제국은 수학, 과학, 건축, 천문,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했고, 이러한 문명은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는 오랜 시간동안 지중해를 건너 전해져 유럽사회를 발전시켰다.

 

또한 동쪽으로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교역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동서양 문화를 융합시켰으며, 다시 그 길을 통해 첨단 과학과 새로운 문물을 중국에 전해주었다. 그것이 결국 고려와 조선에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이슬람 문명은 서남아시아는 물론 북아프리카와 과거 비잔티움의 후예들인 동유럽과 러시아의 문화적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좋지 않은 뉴스를 통해 이슬람세계를 접해왔다. 직접적으로는 이라크전 파병 문제, 한국인 납치 및 테러 사건이 있었다. 최신 뉴스로는 유엔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에서 아마디네자드 이란대통령이 "이스라엘이야말로 인종차별국"이라는 발언을 하여 회의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는 소식도 있다.

 

아마도 이것은 이슬람 문화가 미개하거나 이슬람교가 호전적이라서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일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서구사회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 생각한다.

 

이슬람( الإسلام Islam)의 뜻은 '복종'이되 그들이 복종하는 종교는 '용서'를 가르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슬람 수피즘(신비주의)의 위대한 스승 잘랄루딘 루미가 남긴 일곱 가지 교훈을 되새겨 보며 글을 마치려 한다.

 

첫째,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 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둘째,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셋째,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넷째,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다섯째,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여섯째,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일곱째, 있는 그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덧붙이는 글 | 이 책과 같이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도 출간되었습니다.


시간이 머무는 도시 그 깊은 이야기 - 역사도시, 이희수 교수의 세계 도시 견문록

이희수 지음, 바다출판사(2009)


태그:#시간이 머무는 도시, #이희수, #바다출판사, #이슬람, #역사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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