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통일을 못 보고 가는 것이 한이다. 갈라진 조국을 후세에 물려주게 되어 죄가 크다. … 남부끄럽지 않게 살다 죽었다는 것을 후세에게 전해다오. 칠십 평생 모든 것을 나라의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바쳤건만…."국가보훈처 지정 '4월의 독립운동가'인 규운 윤기섭(1887~1959) 선생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지난 22일 오후 2시. 서울 백범기념관에선 2009년 4월의 독립운동가인 윤기섭 선생의 공훈선양 학술강연회 및 전기 출판회가 열렸다.
광복회와 독립유공자 유족회를 포함한 4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선, 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혁명가 윤기섭>의 출판기념과, 그간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윤기섭 선생의 생애에 대한 집중조명이 이루어졌다.
모든 것을 바쳤지만, '납북'이라는 이유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생애
선생은 1887년 경기도 파주의 해평 윤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서울 보성학교를 제1회로 입학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교육에 종사하다, 신민회에 가입 후 그의 온 생애를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윤기섭 선생은 1911년 8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를 설립하고, 산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여 10년간 학감 및 교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한 1920 년 2월 말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외교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1년 태평양회의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1926년부터 임시정부 국무원으로 선임되어 군무장 등으로 활약한 선생은 1935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 창당의 결실을 맺고, 당보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후 해방 후 고국으로 온 선생은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족혁명당, 민족자주연맹 등에서 활동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납북 후에도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힘쓰던 선생은 북한정부에 항의하는 단식을 여러 차례 진행하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결국 1959년 향년 73세로 숨을 거두었다. 냉전시대 '납북'이라는 이유 때문에 평가받지 못하던 선생의 삶은 뒤늦게 1989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삼대가 망한다'던 독립운동, 문전걸식을 하던 어려운 시절..."세상물정 모르시던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모시고 실질적 가장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바가지를 들고 밥을 구걸해 나누어 먹기도 하며…."삼대가 망한다던 자조를 자아내던 독립운동. 남은 유족들의 삶 또한 피폐했다. 장녀인 윤경자(66,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여사는 어려웠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원망해 본 일이 없다며, '건국 60주년'이라는 단어에는 거침없는 비판을 드러냈다.
-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윤기섭 선생이 남긴 발자취에 비해 조명이 뒤늦은 감이 있다."이루 말할 수 없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치신 분이다.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자력으로 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모든 가산마저 정리해 중국에 망명하셨던 분이다.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은 남은 후손들이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힘쓰지 못한 탓이다."
- 선생이 납북되신 후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사셨는지?"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느라 50이 넘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 나를 비롯한 세 딸을 두셨다. 몸이 약한 어머니(박정심, 94년 작고)와 함께 전남 해남 외가 쪽으로 피신을 했다. 다행히 국학대학(우석대 전신)장으로 재직 중인 아버지의 제자를 만나 방 한 칸을 얻어 어머니와 동생을 모실 수 있었다. 당시 12살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집에서 아이를 돌봐주며 초등학교 졸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후 전화교환원 자격을 따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다 70년 29세의 늦은 나이에 남편(정상무, 69)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당시는 너무 어렸고 먹고 살기 급급한 나머지 아버지의 업적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뒤늦게나마 아들(정철승, 변호사)과 함께 독립운동사와 함께 한 아버지의 삶을 조사 정리하고 있다."
'건국 60주년?' 친일을 감추고 역사의 의미를 훼손하는 일
이어 윤 여사는 대일 인식, 유공자 포상, 과거사 청사기구 통폐합 등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임시정부를 폄하한다고 반발한다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일본의 앞잡이와 사상적으로 결탁해 산업화 공로를 내세우는 그들이야 말로 반민족 세력이다. '매화는 가난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조국독립에 목숨을 던진 이들의 업적을 폄하하다니…. 그들뿐 아니라 이름 없이 숨져간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순국선열들이 지하에서 통탄할 일이다."- '건국 60주년'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말도 안 된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무시하자는 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기준으로 '건국 90주년'이 올바른 표현이다. 친일을 감추고 역사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 보훈처에서 임시정부 90주년을 맞아 무(無)호적 상태로 숨진 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호적을 만들어 전달한다고 한다."아버지는 물론 신채호, 홍범도, 이상철, 김규식 등 많은 이들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했다. 독립운동가 후손 300여명이 호적이 없는 상태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경우도 국적회복을 못하고 있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호적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마지막으로 윤경자 여사는 어려운 역경을 딛고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던 것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정신이라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변변치 않는 살림살이로 아이들의 어린시절을 풍족히 해주지 못한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하다. 또한 호적도 없는 고아와 다름없는 나를 아내로 맞아준 남편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에 바친 아버지의 삶을 원망해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