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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거르고 하루, 슬레이트 지붕을 힘껏 두드리는 빗소리에 아침 창문을 연다. 굵은 빗줄기는 마당 앞에 푸릇한 야자수 이파리와 무성한 협죽도 꽃잎을 타고 풀 위로 내린다. 푸석푸석한 마당의 먼지가 빗소리에 놀라 자욱하게 협죽도 꽃향기를 타고 번져 방안으로 들어온다. 빗소리에 잠을 깨고, 꽃향기와 먼지가 야릇하게 섞인 내음에 취한 채 맞이하는 하루. 구름이 선사한 경쾌한 리듬으로 시작하는 4월이다. 이제 우기 초입에 젖어들었다.

길을 걷다 마주친 골목길 풍경
▲ 비 온 뒤 길을 걷다 마주친 골목길 풍경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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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수행을 위해 가나에 입국한 지 한 달여다. 지금은 이번 사업의 첫 관문이라 할 학교건축을 책임질 건축업체를 선정하는 중이다. 지난 3월 초 가나의 주요 신문인 가나 데일리 그래픽(Ghana Daily Graphics)과 가나 타임즈(Ghana Times)에 두 차례에 걸쳐서 입찰공고를 냈다.

스물 두개 학교 건축업체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 가나 매일신문(Daily Graphic)
▲ 입찰공고 스물 두개 학교 건축업체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 가나 매일신문(Daily Graph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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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사이에 무려 70여 개의 건축업체가 이번 사업에 관심을 표명했고, 그 중 서른여덟 개의 회사가 공식 신청서를 제출했다. 다음 주로 바짝 다가온 입찰 설명회를 위해, 이들 서른여덟 개의 회사 중에서 적게는 대여섯 개 많게는 예닐곱 개의 회사를 1차로 선정해야 한다.

회사를 선정하는 기준은 일반적인 입찰 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회사 재정 규모가 어떤지, 비슷한 사업을 수행한 적이 있는지, 불법을 저지르거나 분쟁에 휘말린 경험은 없는지, 세금은 꼬박꼬박 정직하게 잘 내고 있는지, 인력과 장비의 규모와 상태는 어떤지 등을 꼼꼼히 따져서 가장 우수한 업체를 1차로 추려내는 것이다.

70여 업체가 관심을 표명했고, 38개 업체가 공식 참여의향서를 제출했습니다.
▲ 입찰 참여의향서 70여 업체가 관심을 표명했고, 38개 업체가 공식 참여의향서를 제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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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원조사업 수행 과정 도중, 지원국에서 자국의 업체에 건축이나 납품 등을 의뢰하여 결국 사업액의 상당 부분이 지원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다분히 이기적인 형태의 이러한 원조를 차단하여, 원조사업 수행을 위한 업체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선정하고자 국제적인 공개입찰을 실시하는 것이 최근 개발협력사업의 원칙이다.

즉 한국에서 지원하는 사업이라 해서, 한국 건축업체에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겠다. 다행히도 이번에 지원한 서른여덟 개의 회사에는 한인 건축업체가 없어, 이런 논란에 휘말릴 소지가 애초에 없어  안심이다.

이번 사업에 관심을 표명한 회사에는 중국 혹은 영국 회사도 몇 군데나 있어, 최종 선정까지 치열한 경합이 예상된다. 한국과 한국 국민의 명예가 달려 있는 사업이니만큼, 부실한 회사에 사업을 맡겨서 곤욕스런 일이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애초부터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건축전문가가 반드시 필요한 사업인데, 바로 이 건축분야의 자문을 한국의 한 중견기업 건축 전문가 서강열 상무((주)토펙 근무)가 담당하고 있다. 아울러 주 가나 한국대사관의 오은선 선생이 가나 동부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본 사업을 돕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서 상무는 일주일 전부터 가나에 입국하여 1차 심사를 진행하며 며칠 후에 있을 입찰 설명회 준비를 위해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중동건설 붐이 한창이던 시절부터 이라크 등지에서 풍부한 현장경험을 쌓은 서 상무의 노련하고 세심한 심사를 통해 최적의 건축업체가 선정될 것이다.

(왼쪽)업체 선정을 위해 방문중인 건축전문가 서강열 님과 (오른쪽)주 가나 한국대사관 오은선 님
▲ 건축전문가 (왼쪽)업체 선정을 위해 방문중인 건축전문가 서강열 님과 (오른쪽)주 가나 한국대사관 오은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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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나는 대로 교육부를 방문하여 주요 관계자분들과 회의를 합니다.
▲ 가나 교육부 틈 나는 대로 교육부를 방문하여 주요 관계자분들과 회의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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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업체 심사를 진행하면서 한국에서 벗들과 작은 NGO 단체를 꾸리던 때가 자꾸 생각난다. 매년 가을 즈음이면 '사업제안서'를 작성하여 정부나 기업체의 선정 여부를 노심초사 기다리던 때를 떠올린다.

잔뜩 긴장하고 들어간 면접자리에서 가슴을 후벼 팠던 그 심사위원들의 질타인지 비난인지 구분할 수 없는 평가를 듣고는, 집으로 돌아와 며칠 밤을 자괴감과 노여움으로 지새우기도 했다. 아마도 하루 '품삯'을 받고 왔을 법한, 심사위원이라 하는 이들의 섣부른 말들이, 작은 NGO 단체의 활동가들에게 자칫 모멸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얼마나 자주 이야기했던가.

서른여덟 개의 업체. 그들은 물론 영리를 목적으로 한 건축회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이번 심사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전의 그 불편한 기억이 떠오르니, 무엇보다 겸손한 자세로 심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아울러 선정되지 않은 대다수의 업체에게도 정중한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 것이다. 승자에게는 축하를, 패자에게는 격려와 또 다른 기회를!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통했으면 하는 작고 단순한 원칙이다.

언덕 위에서 바라본, 조금 흐린 날의 아크라 시내
▲ 아크라 시내 풍경 언덕 위에서 바라본, 조금 흐린 날의 아크라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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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육원조 사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건축업체와 계약을 하고 '첫 삽 뜨기'를 하고 나서부터가 아니다. 관심을 표명한 70여 개의 회사와 입찰공고문을 읽은 많은 가나 시민들, 교육부 공무원들 그리고 그들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인사들이 벌써부터 이번 사업을 눈여겨보고 있을 터이다.

먼 극동의 나라 사람들이 보여준 작은 관심이, 새로 학교가 지어질 동네의 주민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비가 새는 지붕과 갈라진 흙 벽만큼이나 아득해진 아이들의 꿈들이 이제 조금씩 다시 움트고 있다.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쩌면 평생 살아도 인연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동녘의 끝과 서녘의 끝, 두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의 삶에 긍정적인 개입을 시작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동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경쾌하게 계속될 수 있을 거란 희망에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다. 서아프리카 그리고 가나! 난 아직 절망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태그:#가나, #입찰설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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