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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수도승 톨로토스는 저런 해안가 높은 산에 있는 수도원에서 살다 죽었을 것이다. (사진은 경남 남해 호구산)
아마도 수도승 톨로토스는 저런 해안가 높은 산에 있는 수도원에서 살다 죽었을 것이다. (사진은 경남 남해 호구산) ⓒ 안병기

나는 조금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갔다. 그 때문에 더러 손해도 봤지만, 덕을 본 것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운이 좋아서 아주 편하게 군대생활을 개길 수 있는 암호병이란 주특기를 부여받았다. 보초·훈련·불침번·작업 등 모든 것이 열외였다. 게다가 암호라는 게 매일 몇 통씩 날라오는 것도 아니었다. 보통 일주일에 두세 통 정도 날라오면 그만이었다. 한 통 처리하는데 넉넉잡고 십여 분이면 된다.

다 알다시피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다. 그걸 분(分)으로 환산하면 1,440분이다. 그럼 암호를 처리하고 나서 남는 1430분의 무료함은 어찌 견디느냐. 바로 그것이 문제렸다. 더구나 난 일반병들과는 격리된 채 홀로 지내야 했다. 내가 그 무료함을 견뎌내고 끝내 자살하지 않은 것은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행여라도 만원이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입옥(入獄)을 거절당할까봐서였다.

군대 생활이란 일종의 수도 생활이나 마찬가지다. 웬만한 수도 생활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욕이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제일 먼저 예방주사를 맞는다. 그 주사액 속에 성욕을 죽이는 호르몬 감퇴제가 섞여 있다는 말이 떠돈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뿐 아니다. '군발이'들이 매일 받아 피우는 화랑 담배 속에도 정력감퇴제가 들어 있다는 유언비어도 있었다. 

입대 전에 난 철저한 스토아 학파의 일원이었다. 나 스스로 자처한 게 아니라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다. 호르몬 감퇴제나 정력감퇴제 따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금욕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군대라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데 그다지 큰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렇게 난 군대생활도 열외였고 성욕에서도 열외였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군발이들은 나완 달랐다. 세상이라는 피안에 남겨두고 온 제 반쪽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수도생활에 커다란 지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애인을 군대 보내고 난 뒤 그 공허감 내지는 공복감을 이기지 못해 재빨리 신발을 바꿔 신는 처녀들의 불건전한 소비 행태가 참을 '인'자 하나로 겨우 견디면서 생활하는 군발이들의 수도생활의 근간을 흔들어 놓기 일쑤였다. 이것을 어여삐 여긴 나는 일종의 '벤처 마케팅'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내 몸속에 나도 모르는 세종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는 벤처 마케팅이란 편지 대필 사업이었다. 거기에 숨겨진 의도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익을 창출하려는 싸구려 계산 따위도 없었다. 난 어디까지나 군대라는 '수도원'의 안정된 운영을 바랄 뿐이었다.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주소만 가지고 오면 편지를 써 줬다. 금세 소문이 번졌던지 내 사업은 창업과 동시에 문제 성시를 이루었다.

내 단골손님은 주로 고참들이었다. 그들은 졸병을 닦달해서 얻은 아가씨의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맨주먹 붉은 피'로 무작정 날 찾아왔다. 그리고 편지를 써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사정이 딱할지라도 일단은 거절한다. 왜 통과의례라는 게 있지 않는가 말이다. 서너 번 거푸 부탁하면 그때야 못 이기는 척 편지를 써준다. 뭣이든지 첫술에 배부른 일은 없다는 걸 알려주는 동시에 삶에 각골난망 하는 버릇을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쉽게 성취한 것일수록 배은망덕의 속도도 그에 비례한다는 걸 난 사회에 있을 때 겪은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군발이들의 사정을 헤아려서 요금만은 철저히 후불제를 취했다.

대개 편지가 3-4번 정도 왕래하면 약발이 나타났다. 아가씨가 찾아오는 것이다. 면회 다음날이면 내게로 술이나 사제담배 한 보루가 정히 영수되었다. 절대 면회 당일에 술과 담배가 수납되는 경우는 없었다. 왜냐하면 고참은 펜팔을 주고받은 처녀와 외박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거북선이나 은하수 등 사제담배 맛이 얼마나 썼던가. 화랑 담배 맛보다 오히려 쓰게 느껴졌다. 참으로 개 같은 경우였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놈이 번다"라는 속담이 절묘하게 들어맞는 케이스였다. 

나의 신종 벤처는 제대하는 순간까지 번창에 번창을 거듭했다. 그 덕택에 삶의 무료함을 견뎌내고 그 지긋지긋한 '수도원'을 아무 탈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난 그 신종벤처로 말미암아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여자에 대한 끝 간 데 모를 환멸을 맛봤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당신이 편지 왕래 3-4번에 면회 오는 여자들을 일상적으로 봤다고 생각하면 내 기분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군대 가기 전 여자를 사귀지 못 한 것은 결코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정말이다!). 난 금욕을 추구하는 스토아 학파일 뿐이었고, 여자를 너무 고상한 존재로 그려왔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군대라는 '수도원'에서  여자에 대한 허상을 철저히 허물어뜨린 채 군문을 나섰다.

생각건대, 난 진작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했던 말을 뼛속 깊이 새겨야 했다. 그러나 입대하기 전에 그 책을 읽긴 했으되, 건성건성 읽었으니 니체의 말이 전혀 육화되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무엇인가. 스무 살 무렵, 니체는 내게 이렇게 설레발을 깠다.

"나에게도 여자에 대해서 말해 주시오. 너무 늙어서 무슨 말을 들어도 곧 잊어버리니까." 하고 노파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노파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이렇게 말했다. 여자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그리고 여자 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임신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란 하나의 수단이다. 목적은 언제나 아이에 있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란 무엇인가? 참된 남자는 위험과 놀이, 이 두 가지를 원한다. 그러므로 남자는 위험천만한 장난감으로서 여자를 원한다. 남자는 전투를 위해,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나치게 달콤한 과일을 전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전사는 여자를 좋아한다. 가장 달콤한 여자라도 그 맛이 쓰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장희창 역)

니체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위험천만한 장난감' 같은 여자를 가지고 노느니 차라리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게 낫느니라. 이쯤 되지 않을는지. 그러나 난 니체 같은 마초가 아니다. 언젠가 항해하다가 난파해서 여자가 없는 무인도에서 살게 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에서 깨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인간이 꿀 수 있는 악몽 가운데 가장 큰 악몽을 꾸었으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니체는 "가장 달콤한 여자라도 그 맛이 쓰"다고 했지만 난 그와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자는 가장 쓴 여자라도 그 맛이 달콤하다. 단언하건대, 여자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남자는 1분 1초라도 절대 단독으로 생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자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남자라면? 혹 그런 남자라면 자립이 가능할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천지에 여자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허다 못해 자신의 어머니라도 알 것 아닌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도 여자가 아닌가 말이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비
믿지 않겠지만, 세상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마저도 보지 못한 불운한 사람이 있다. 천양희 시인의 시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는 평생 여자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다가 죽은 한 수도승에 대한 이야기다. 

수도승 톨로토스는 일생 동안 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그 이튿날 에토스산 꼭대기 수도원으로 보내져 수도승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여자와 동물의 암컷조차 출입이 금지된 수도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1938년 82세로 죽을 때까지 여자에게 단 한번 눈길 줄 기회도 없이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일생 동안 단 한번도 여자를 못 본 채
이 지구상에 살았던 유일한 남자 수도승 톨로토스

스물아홉 번 결혼한 남자와
스물두 번 결혼한 여자가
또 결혼하는 기사를 읽다
만감이 교차하다
1996년 6월 9일 아침
         - 천양희 시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전문

천양희 시인이 말하는 에토스는 초기 기독교의 전통을 믿는 그리스 정교회의 성지인  아토스(athos) 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둘은 각기 다른 산이 아니라 발음상의  차이일 뿐 같은 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천양희 시인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난 천양희 시인은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동안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등의 시집을 상자 했다.

천양희 시인의 시는 어떤 시인보다 진솔하고 깊이가 있다. 그의 지난했던 세상살이와 맞물려서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자신이 겪었던 삶의 상처를 오롯이 극복한 누님이 손아래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이 커다란 울림을 준다. 


아토스산(해발 2,033m)은 그리스 동북부 칼키디케 반도의 동남쪽 끝에 있는 산이다. 이곳은 그리스 정부와는 별도의 행정·사법이 이루어지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수도원이 다스리는 자치령이라고 한다.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만 18세 이상의 그리스 정교회 남성 신도뿐이라고 한다.

성모 마리아가 여행 도중 폭풍우에 휘말려 이 해안에 조난당했을 때,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이 지역을 성스러운 산으로 삼고, 현지의 이교도들을 교화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엔 아직도 20개 남짓한 개별 수도원이 있다고 하는데 수도승 톨로토스는 아마도 그 수도원 중 한 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1938년에 82세였다고 하니 역산하면 1857년생인가? 아무튼 죽을 때까지 여자라는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인은 1996년 6월 9일 아침에 "스물아홉 번 결혼한 남자와/ 스물두 번 결혼한 여자가/ 또 결혼하는 기사를 읽"는다. 여자와 남자라는 서로 다른 성(性)이 있다는 걸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던 수도승 톨로토스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시인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시인은 그저 만감이 교차했다고만 했지 자신이 품은 구체적인 감정의 덩어리를 풀어놓지는 않는다.

'수도승 톨로토스의 삶은 행복한 것이었을까, 불행한 것이었을까'를 생각한다. 여자라는 존재에게 데일 대로 데인 사람이라면 수도승 톨로토스의 삶이 차라리 행복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많은 사람은 그의 삶에 동정을 보낼 게 틀림없다. 세상에 태어나 마음에 맞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애를 낳아 기르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죽어서 천당에 간 수도승 톨로토스는 그제서야 세상엔 여자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수도승 톨로토스가 그곳에서나마 자신에 걸맞은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톨로토스#천양희 #창비#수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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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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