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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초등학교까지만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은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양분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당시 집 대문의 문패 옆에는 관에서 나누어준 '방공방첩'의 양철팻말이 집집이 걸려있었고 선생님으로부터 간첩일 수 있는 거동수상자를 구분하는 법을 교육받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어린이들은 공산당원은 빨갱이고 빨갱이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극악무도한 분류로 세뇌되었습니다.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부(富)가 개인에게 분배되고 소유되는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경제원리가 있으며 신봉하는 정치체제에 따라서도 장단점이 뒤섞여 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읽은 대부분의 만화 스토리는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음지와 양지의 경계처럼 선명했습니다.

세상을 경험해갈수록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이야말로 제일 어려운 일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은 그 경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혼재되어 있으며 선 속에도 악이 달마시안의 검은 점처럼 점점이 박혀있으며 때로는 얼룩말의 줄무늬처럼 비슷한 면적으로 연이어져 있어서 한참을 들여다보면 얼룩말을 노린 포식자의 눈처럼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실의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시간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은 실체를 감쌌든 상황들을 변하게 하고 결국 그 얽히고 상반된 다른 이해관계를 벗겨줍니다.

오늘 헤이리는 아침 7시부터 2시간쯤 짙은 안개에 휩싸였습니다. 저는 '모티프원'의 트라이콜리 헤모와 함께 그 안개 속을 거닐었습니다. 제한된 시야는 제게 익숙했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북카페반디' 앞 정원의 큰 플라타너스는 새롭게 잎을 틔우고 있습니다.

잎이 무성하지 않은 부챗살 모양의 큰 풍채가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갓 모습을 보이는 섬섬한 잎은 이 플라타너스의 뒤쪽풍경까지도 훤히 볼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짙은 안개는 그 나무 뒤에 노을동산이 있음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반디의 플라타너스 뒤에 노을 동산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헤이리 마을을 감싸않은 노을동산이 북카페 반디 정원의 이 플라타너스 뒷쪽 먼 곳에서 배경이 되어줍니다. 오늘 아침 안개는 노을동산의 존재를 지워버렸습니다.
 평소, 헤이리 마을을 감싸않은 노을동산이 북카페 반디 정원의 이 플라타너스 뒷쪽 먼 곳에서 배경이 되어줍니다. 오늘 아침 안개는 노을동산의 존재를 지워버렸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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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민속악기박물관앞을 지날 때입니다. '꽝'하는 소리에 놀라 옆을 보니 멧비둘기 한 마리가 앞의 산을 비추어 담고 있는 박물관 벽의 반사철판을 들이받아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바닥에서 꼼짝 않고 있기를 10여 분, 그제야 몸을 추스르고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비행속도가 더 빨랐거나, 더 높은 곳에서 추락하였거나, 모서리에 부딪쳤다면 필시 죽음을 맞았을 것입니다. 혹은 그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 '눈을 밝게 하고 음양의 기를 보한다'는 본초서(本草書) 멧비둘기의 효능을 실천해 보고자하는 사람이라도 만났다면 약탕기속에서, 황조롱이의 먹이가 되어 펠릿으로 버려지는 것보다 더 서러운 비명횡사를 할 뻔했습니다. 이 멧비둘기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실상의 자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꽝'소리를 내며 거울같은 비침이 있는 건물외벽에 부딪쳐서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비친 푸른 산을 보고 이 산비둘기는 거울속으로의 비행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꽝'소리를 내며 거울같은 비침이 있는 건물외벽에 부딪쳐서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비친 푸른 산을 보고 이 산비둘기는 거울속으로의 비행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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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분간 이 멧비둘기는 이 자세로 미동도 하지않았습니다. 헝클어진 깃털이 충돌의 충격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0여분간 이 멧비둘기는 이 자세로 미동도 하지않았습니다. 헝클어진 깃털이 충돌의 충격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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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막 걷히고 아침햇살이 여과 없이 참나무골의 마지막 진달래 꽃잎을 역광으로 비출 때 막 새잎이 돋는 화살나무에 한쪽 끝을 지탱한 거미줄이 은빛으로 빛났습니다. 화살나무가 살살부는 바람에도 몸을 흔들 때 이 거미줄은 크게 부릅뜬 제 눈에도 보였다 보이지않았다, 합니다. 빛의 각도에 따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음 알지 못하는 나비는 거미의 한 끼를 보충할 식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화살나무가지에 한쪽 끝을 걸친 거미줄
 화살나무가지에 한쪽 끝을 걸친 거미줄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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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실상은 시야가 탁 트인 쾌청한 한낮보다 바로 앞의 존재가 불명확한 안개가 자욱한 아침을 더 닮은 듯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실로 믿었던 것이 거울 속 풍경처럼 허상일 수도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역광의 거미줄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를 쌓는 것이 중합니다.

참나무골 낮은 동산을 넘어오던 아침햇살도 짙은 안개에 영롱함을 잃었습니다.
 참나무골 낮은 동산을 넘어오던 아침햇살도 짙은 안개에 영롱함을 잃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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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저의 어린 시절처럼 현재에도 역사를 암기하게 하는 것, 사지선다(四枝選多)로 실력의 우열을 가늠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며, 선생이나 어른의 도리인가 의문입니다.

멧비둘기를 착각하게 했던 건물 외벽 반사철재에 비친 허상
 멧비둘기를 착각하게 했던 건물 외벽 반사철재에 비친 허상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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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하고 모호함 속에서 스스로의 주관을 세우고, 희미함과 흐릿함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며, 불분명한 것이 세상에는 한없이 많이 있다는 것을 제가 그것을 안 것 보다 좀 더 일찍 깨닫게 하는 것이 교육의 주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아들딸들에게, 세상의 본질이나 이치 따위를 스스로 궁리하여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오늘 아침, 반사철판에 몸을 부딪고 정신을 잃은 멧비둘기의 실수가 재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과 허상, 그것에 대한 분별능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합니다.
 실상과 허상, 그것에 대한 분별능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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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태그:#헤이리, #교육,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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