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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호수 '시화호'의 탄생

시화호는 자연적인 호수가 아니다. 서해안 간척사업의 결과로 생긴 호수를 접경지역인 시흥과 화성에서 첫 자를 따다가 붙인 이름이 시화호다. 시화방조제로 막히기 이전에 그곳의 이름은 군자만이었다.

형도로 들어오는 비포장도로가 보인다. 예전에는 보이는 저곳이 모두 어자원이 풍부한 바다였다고 한다.
 형도로 들어오는 비포장도로가 보인다. 예전에는 보이는 저곳이 모두 어자원이 풍부한 바다였다고 한다.
ⓒ 박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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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건설계획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3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중동에 있는 건설장비를 대대적으로 이용하여 서해안의 농업단지, 공업단지 등을 일구는 대규모 국토확장사업을 전개할 구체적인 방안을 관계부처와 업계가 마련해 추진하라'는 업무지시로 시작되었다.

그 후 농림부와 수자원공사, 농업진흥공사가 토지 사용용도 등의 갈등 조정과정을 거쳐 공단과 농지조성을 목적으로 1987년 4월부터 추진하여 1994년 1월 방조제 물막이공사가 완료되어 '시화호'가 생겨났다.

시화호가 군자만이던 시절 그곳에 '형도'라는 섬이 있었다. 어부들이 바닷물이 어느 정도 들어왔나를 알아보는 기준이 되는 섬이라 하여 '저울대(衡)'섬이라고 했다.

6,25전쟁 이전에 형도에는 어부의 살막만 있다가  전쟁 후 황해도 지역의 피난민이 대거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다.

시화방조제로 막히기 전까지 군자만은 농어·꽃게·새우·숭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바다의 생명들이 넘쳐났다. 형도주민들은 그 자연이 베푼 은혜를 터전으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

수산자원이 풍부하던 군자만은 시화방조제로 바닷물이 막히면서 수많은 생명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바닷물이 막히면서 바닷물에 사는 조개류와 물고기 등 수많은 생명들이 몰살했고, 인근에서 유입되는 생활하수와 공장폐수가 뒤엉키면서 악취가 진동하며 썩어갔다.

시화호를 방조제로 막음으로써 담수화하겠다는 사업은 사업 초기부터 환경단체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환경과 생태계 파괴 문제가 제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형도'주민의 삶

이제 형도는 이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비포장도로가 길게 형도까지 이어졌다.
 이제 형도는 이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비포장도로가 길게 형도까지 이어졌다.
ⓒ 박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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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도에 있는 높이 140미터의 계명산은 시화호 간척을 위해 많이 깎여 흉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형도에 있는 높이 140미터의 계명산은 시화호 간척을 위해 많이 깎여 흉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 박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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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만이 죽음의 호수 시화호가 되면서, 한순간에 생업을 잃어버린 형도주민들은 힘겨운 삶이 시작되었다.

생계의 수단이 사라지고, 시화호 조성사업 당시 상당한 액수의 보상을 받았지만 자녀의 교육비와 부동산 구입 그리고 장사의 밑천 등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결과가 좋지 않아 보상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그곳 주민들이 수십 년간 생업으로 삼아 온 어업에 관한 지식만 있을 뿐 부동산이나 장사 등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은 어업권 보상 등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새로운 생계수단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고 기존의 생계수단도 사라지는 상태가 되었다. 또 보상에 대한 잡음 때문에 이주자와 거주자 등 마을 주민 간에 갈등의 골도 치유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힘겹게 이어온 20여년의 시간도 이제 마감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송산그린시티 사업계획의 일환으로 형도 주변 습지에 골프장이 들어설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형도주민들은 공익사업을 위한 법률에 따라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 보상 등 이주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따뜻한 아침 햇살 아래 시금치를 캐고 있는 이동목 형도교회 목사님에게서 잠시 형도 이야기를 들었다.

"30년 전에 개척교회를 세우기 위해 섬에 들어왔는데 이제 정리할 때가 다 되어 간다. 시화호매립을 하기 이전에 이곳 바다는 천혜의 보고였다. 농어 꽃게, 조개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바다 속에 있었다. 그것이 모두 주님의 축복이다. 그런데 시화방조제를 막으면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던 이들에게서 삶을 터전을 빼앗아 가 버렸다. 그리고 정말 힘든 삶이었다. 그렇게 20여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수자원공사가 땅에 대한 보상으로 돈 몇 푼 쥐어주고 주민들을 내쫓으려 한다. 돈 몇 푼 받고 나면 이들에게는 어디 돌아갈 삶의 공간도 삶의 터전도 없다. 그런데 누가 쉽게 나가겠어?"

형도마을입구에는 수자원공사의 물건조사를 반대하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형도마을입구에는 수자원공사의 물건조사를 반대하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 박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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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애초에 시화호의 바닷물을 빼내고 담수화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1998년부터 매년 여름 간척지와 호수 접촉면의 해양생물이 떼죽음을 당하는 등 시화호는 심각한 수질오염으로 인해 각종 폐해가 발생하였다.

결국 정부는 1998년 11월 시화호의 담수화를 사실상 포기하였다. 이후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죽음의 호수였던 시화호에는 조금씩 생명들이 찾아들고 있다.

바닷물이 막히면서 시화호의 모든 바닷생물이 죽음을 맞이했다.
 바닷물이 막히면서 시화호의 모든 바닷생물이 죽음을 맞이했다.
ⓒ 박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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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를 파괴하는 국책사업은 계속되고

하지만 그동안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과 개발의 그늘 속에 삶의 터전을 잃고 마을주민 간 깊어진 갈등의 골, 그리고 막대한 국민세금의 탕진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개발과 일자리 창출 등의 미명하에 자행된 환경파괴는 시화호에 그치지 않고 새만금에서도 반복되었고 4대강 살리기라는 탈을 쓴 한반도대운하까지 이어지고 있다.

ⓒ 박종무


태그:#시화호, #형도, #간척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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