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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된 30일 오후 1시 15분경 서울역 3층 대합실. TV 모니터 앞에 모여든 시민들은 잔뜩 숨을 죽인 채 정면을 응시했다. 화면에는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버스 한 대가 도착해 있는 장면이 생방송 되고 있다. 한동안 버스 문이 열리지 않자, 한 시민이 참지 못하고 "왜 안 나와"라며 옆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들은 척도 안 한다.

 

잠시 후 버스 문이 열리고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전해철 전 민정수석, 김경수 공보비서관 등 수행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내리는 장면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자, 이번엔 뒤편에서 "나온다"라는 탄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노 전 대통령 검찰 출두에 숨 죽인 시민들... 대부분 무관심?

 

버스에서 내린 노 전 대통령이 번쩍번쩍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취재진 앞에 멈춰 서자, TV 모니터 앞에 모여 있던 시민들의 시선은 노 전 대통령의 입으로 쏠렸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기자들이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시선을 좌우로 돌리며 무엇인가 말을 할 듯 하던 노 전 대통령, 그러나 "면목 없는 일이지요, 다음에 얘기하죠"라는 말만 남긴 채 건물 안으로 사라졌고, 화면에는 청사의 굳게 닫힌 문만 비쳤다.

 

그제야 시민들은 짧은 침묵의 시간에서 깨어났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는가 하면 시계를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옆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14년 만에 세 번째 전직 대통령의 검찰 소환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표정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에 대한 특별한 감회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사실 모니터 앞에 몰려든 시민이라고 해봐야 기존에 있던 좌석을 가득 채우고, 그 옆에 서 있는 10여 명이 전부였다. 얼마 전 있었던 '월드베이스클레식' 야구 경기나, '피겨 요정'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보기 위해 수십 명이 몰려들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대부분 시민들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노 전 대통령 일행을 담은 TV 생중계 방송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누구보다도 믿었는데... 마음이 착잡하다"

 

그나마 TV모니터 앞에 남아있던 시민들은 노 전 대통령 검찰 소환을 지켜보며 착잡해 하거나 분노했다.

 

업무차 경주에 가려던 이주환(45·회사원)씨는 발길을 멈추고 한참동안 TV로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 장면을 지켜봤다. 그는 "착잡하다. 그 전에 믿었던 것이 있어서 실망감이 더 크다"고 말문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믿었던 사람인데, 저런 상황까지 됐으니,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 상황이 벌어진 그 자체가 착잡하다."

 

이씨는 이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면서도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를 막 정착시켜 가는 과정이었는데 노 전 대통령마저 저렇게 되고 나니, 우리나라는 아직 멀지 않았나 싶다"고 안타까워했다.

 

익명을 요구한 40대 여성은 방송을 지켜보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 (노 전 대통령을) 믿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거북스럽다"고 짧게 말했다.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려던 이상동(43·자영업)씨는 "존경하던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는 것을 보니까, 마음이 착잡하다"면서도 "이전 두 전직 대통령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원래 노 전 대통령의 스타일은 정면돌파형이다. 이번에 당당하게 얘기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니까, 더 마음이 아팠다"며 "차라리 당당하게 밝혔으면 좋겠다. 자신의 명예도 명예지만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이 제기하고 있는 혐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다."

 

장은환(28·회사원)씨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노 전 대통령을 '엄호(?)'했다. 연휴를 맞아, 월차를 내고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는 길이라던 장씨는 "오랫동안 노 전 대통령을 좋아했다"며 "어려서부터 부모님께서도 노 전 대통령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런 상황을 보게 돼 가슴이 아프다"며 "잘못이 있다면 충분히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죄가 없다면 이번에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새로 시작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씨는 곧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정치적 보복 같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4000~5000억 원의 비자금을 챙겼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받았다는 돈은 크지 않고 성격 자체도 두 전직 대통령과 다르지 않나. 그런데 검찰이 너무 집요하게 노 전 대통령을 수사하는 것 같다."

 

그는 "(노사모 회원들처럼) 대검찰청까지 갈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힘내라고 응원을 보낸다"며 "'떳떳하게 수사에 임하고, 힘내시라'고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부정부패하면 패가망신 시키겠다고 하더니..."

 

젊은층은 대체로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을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봤지만, 장년층은 달랐다. 최학남(62·자영업)씨는 지인을 만나기 위해 나왔다가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일부러 TV가 있는 서울역 대합실로 들어왔다고 한다. 최씨는 "국가적 망신"이라며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최씨는 "경제는 OECD 13위라고 하는데, 이번까지 해서 전직 대통령이 3명이나 검찰에 소환되는 것을 보면 정치는 아직 C급"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최씨는 "자기 입으로 '부정부패하면 패가망신을 시키겠다'고 하더니, 정작 자기 집안은 못 챙긴 것 아니냐"며 "(노 전 대통령은) 말로 출세하더니, 말로 망하는 것 같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도 최씨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수사를 반대했다. 그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구속은 안 된다. 그러면 정말 국가적 망신"이라며 "이번 사건은 불구속 수사를 해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응배(73)씨는 노 전 대통령이 대검찰청에 들어간 지 30여 분이 지난 뒤에야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봉하마을에서 대검찰청까지) 400여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에서 진행되는 언론의 취재 열기도 구경하고, 검찰청에 들어가는 (노 전 대통령의) 표정도 좀 보고 싶었다"며 "그런데 오전 6시부터 개인적인 일을 보느라 모두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김씨는 노 전 대통령을 매섭게 질타했다. 그는 "임기 때는 386세력을 등에 업고 청렴결백한 척, 깨끗한 정치를 한다고 해놓고, 말년에 이게 뭔가. 창피한 일"이라며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나. 답답하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검찰의 수사 초기 단계부터 보여준 노 전 대통령의 해명 내용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그는 "박연차 회장이 부인이나 아들을 보고 돈을 줬겠느냐"며 "솔직히 돈을 받았다고 인정하고 깨끗하고 사죄해야지,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구구하게 변명을 하면 되겠느냐"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 역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수사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노 전 대통령, KTX 대신 버스 타고 상경

 

한편 노무현 전 대통령은 1년여 전인 지난해 2월 25일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김해 봉하마을 사저로 향한 바 있다. 사실 이번 검찰 출두를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이 KTX를 타고 상경하지 않겠느냐'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경찰이 안전문제 등을 이유로 노 전 대통령측에 "고속도로 대신 열차 편으로 상경하는 게 좋겠다"고 요청했기 때문.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KTX 대신 청와대 의전 버스를 타고 상경했다. 노 전 대통령측은 버스 상경이 실행된 직후 "(KTX 이용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그:#노무현 소환, #박연차 게이트, #서울역, #검찰 소환, #검찰 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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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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