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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한창일 때 매일같이 출근하며 취재와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썼다. 마지막으로 기사를 쓴 것은 6월 27일이었다. 그날은 남녀노소 시민들이 '국민토성'을 쌓은 날이었다. 나는 기사에 '시'를 썼다([거리에서 시 쓰기] 1. 큰무덤). 거리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깊은 회의감이 나를 지배했다. '촛불기자'는 그렇게 촛불을 껐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부터 촛불을 켜고 지금까지 끄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강남촛불'이라 불리는 '아고라 강남직장인 촛불본부' 사람들이다. 2008년 7월 2일 결성된 최초의 '지역촛불'은 그 해 7월 10일부터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도 빠짐 없이 강남역 부근에서 촛불을 밝혀 왔다. 지난 4월 26일이 '300'일 되는 날이니까 횟수로는 260회 정도 된다. 때로는 주말에도 촛불을 밝혔다.

 

강남 촛불행사의 기본 도구는 판넬과 전단지, 시민게시판, 녹음기, 그리고 촛불이었다. 시민들이 지나는 길목에 판넬을 설치하고 포스트잍에 시민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촛불인형을 뒤집어쓴 회원들은 시민들에게 직접 전단지를 나눠 줬다. 한쪽에서는 회원들이 촛불을 밝히며 서 있었다.

 

지난 30일 목격한 이들의 모습들은 안정되고 편안해 보였다. 분업화가 잘 돼 보였고, 주변과의 관계도 좋아 보였다. 길을 지나던 시민은 포스트잍에 메시지를 쓰고 전단지를 받고 나서 갑자기 지갑을 꺼내들고 만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자신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지지한다고 말하면서 "화이팅!"하고 사라졌다.

 

시민이 준 귀중한 돈 만원을 들고 음료수를 사러 가는 회원과 동행했다. 주변의 가판에서 음료수를 샀다. 가판 아저씨는 고생이 많다며 커피캔 하나를 '서비스'로 주었다. 이 모든 게 꾸밈이 없어 보였다.

 

광고회사에서 PD로 일한다는 '카오루'라는 회원은 처음부터 주변과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처음에 촛불을 들었을 때 주변 상인들은 촛불 때문에 시선을 빼앗겨 매출이 줄어든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신고를 해서 경찰이 오는 일도 잦았다. 하루에 1~2명은 꼭 촛불행사장에 와서 시비를 걸곤 했다고 말했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주변이나 지역공동체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들을 설득했다고.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서 주변 상인들이 파는 상품을 많이 사는 등의 노력을 한 결과 이렇게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남촛불을 지켜준 것은 정부의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나 한나라당 등 정부 여권의 독주와 실정에 대해선 대부분의 시민들이 부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 거기에서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서 정부 비판 행사를 하더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다.

 

강남촛불은 어떻게 '지역촛불의 큰형'이 되었나

 

강남은 부자 동네, 한나라당 텃밭, 환락의 구역 등 값비싼 이미지가 점철된 곳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곳에서 지역촛불의 시조가 탄생했다. '촛불지식인'인 홍성태 교수(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가 아고라의 자료를 수정 보완해서 제시한 '촛불연표'에 따르면 2008년 7월 2일 강남촛불이 켜졌다.(<촛불과 민주주의>, <경제와 사회> 80호, 2008년 겨울)

 

그 때는 촛불이 길을 잃을 때다. 촛불의 성지인 서울시청광장은 생뚱맞게 놀이공원으로 조성되고 주요 거점은 경찰이 점령했다. 뿐만아니라 국민에 의해 선출된 이명박 대통령은 귀를 막고 '준법'만을 앵무새처럼 지저귀며 '무력(武力)'을 사용하는 통해 촛불시민들은 무기력에 빠졌다. 그 때 사람들은 강남에 다녀갔다. 강남촛불 회원들은 유모차부대나 먼 지역에서도 강남에 촛불이 켜졌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전했다.

 

하지만 지향점과 목표를 갖지 못한 조직이 그러하듯 촛불 관련 단체들은 심한 내부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은 초대 대표가 사퇴하는 상황을 맞았고, 진실을 알리는 시민은 단체가 쪼개지는 등 크고 작은 단체가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강남촛불 역시 내부갈등에 시달렸다. 예컨대 '강남'이라는 말을 붙이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정체성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촛불'이라는 추상적인 정체성보다 '강남'이라는 지역 정체성으로의 전환이 절실했기에 회원들은 '강남'이라는 이름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게 된 원동력은 '현장'이었다. 강남촛불 회원인 아이디 '꿈하늘'(단국대 교수)은 <진실을 알리는 시민>에 배포하는 신문을 받아 배포활동을 전개했고, 지금은 아침팀, 주말팀, 저녁팀으로 세분화될 정도로 발전했다. 신문배포와 같은 실천적인 활동은 한 결과 안정을 찾고 회원들의 유대가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이상하게 서로 싸우는 거 있잖아요. 별 거 아닌 일에 지나치게 말로 상처 입히고, 논쟁이 붙고…."

 

'꿈하늘'은 마침 방학이 돼 혼자 '빡세게' 해보겠다고 나섰고 "회원 전체가 하되 회원 한명이라도 나오면 격려해주고, 오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강남촛불은 실천 위주의 조직으로 변화해갔다. 그는 강남촛불을 고향의 '큰집'에 비유했다. "고향의 큰집은 항상 형제들을 기다린다. 마당을 펴 놓고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는다"는 비유가 아름답게 들렸다.

 

현재 강남촛불의 회원은 1500명 정도 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진성회원'은 3~40명쯤 된다고 한다. 강남촛불에는 재주꾼이 많다. 센스 있는 포토샵 실력으로 판넬 이미지를 곧잘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고, 각종 아이디어가 끊이지 않고, 그것도 안 되면 '몸'으로 돕는 사람들도 많다.

 

매우 다양한 재주를 가진 회원들이 자신이 잘 하는 일을 하고, '자봉'(자원봉사자)으로 신청한 사람들은 요일을 정해서 장소를 지켜주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퇴근한 회원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자신의 요일이 되지 않아도 지나는 길에 들러서 촛불을 하나라도 더 들고 가려는 마음이 보이는 듯했다.

 

1년 만에 '고봉순'에서 '조선일보' 처지가 된 KBS

 

촛불에는 사연이 많다. 특히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언니 회원들'에게는 촛불이 애틋한 짝사랑처럼 느껴진다. 강남촛불 회원인 '수우'와 한 아줌마 회원은 "애들도 다 키웠고 나이도 들고 나만을 위한 뭔가를 할 때인데 촛불을 만나 몸이 괴롭다"고 말했다. 특히 촛불을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때는 "이거 나가면 5년인데"하는 생각에 고심이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주말에 안 나가면 심심하고 촛불현장에 몸이 없으면 좀 어색해진다고 한다. 말 그대로 '촛불중증 상사병'에 걸린 것 같다. 촛불에 대해서 연애감정 비슷한 것을 느끼는 아줌마 회원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촛불 1주년이 다가와서 그런지 KBS에서 강남촛불을 취재하기 위해 행사장을 찾았다. 판넬을 찍고 인형도 찍고 오래 머물었다. 그런데 강남촛불 회원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회원은 KBS가 '고봉순'이라는 '국민애칭'까지 받으며 촛불시민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는데 1년이 지난 지금은 '관변언론'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강남촛불을 찍은 것도 어떻게 보도가 될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1년 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전경 버스에 올라가서 취재를 하던 기자단을 향해서 촛불시민들은 "조선일보 내려가"를 외치며 촛불현장에서 조중동 기자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조중동이 촛불집회를 왜곡하고 거짓말을 늘어놓고 민심과는 정반대의 여론을 만들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KBS는 그보다 더 미움을 받았다.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홀대를 당한 KBS 취재진은 애써 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난처하고 부끄러운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어쩌면 작은 해프닝으로 볼 수 있는 이 사건은 KBS를 포함해 많은 제도언론에게 시사점을 주고 있다. 재벌이나 권력 등 힘 있는 자를 상대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이 제도 언론의 처지이지만, 민심을 외면한 언론활동은 재벌이나 권력보다 더 무서운 힘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1년 동안 촛불을 끄고 있는 사이에 강남촛불 등 지역촛불이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강남촛불은 시민운동의 덕목인 '현장성'과 '일감', '지역공동체와의 관계성', '회원 간의 끈끈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보더라도 촛불이 일어난 이후 단 하루도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돼 기쁜 날이었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태그:#강남촛불, #촛불1년,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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