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유엔군은 9월 28일 중앙청에 태극기와 유엔기를 게양했지만, 서울과 중부 지역의 인민군은 이미 퇴각한 후였다. 조수현이 무사히 서울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부대는 퇴각 중 미군의 공습에 적지 않게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13일 간 이루어진 비교적 차분한 퇴각은 훗날 인민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열을 정비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13일이라는 기간에 남한 지역의 인민군이 모두 철수하기는 힘들었다. 잔류한 인민군들은 산으로 올라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들은 후방에서 제2전선을 형성했다. 김성식 마을에 나타난 인민군 유격대는 퇴각에 간발의 차로 실패한 병력이었다.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을 구빨치라고 하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퇴각하지 못하고 산으로 올라간 빨치산을 신빨치라고 불렀다. 구빨치와 신빨치의 차이점은 전자가 민간인 출신이고 후자가 정규군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산에서 합세하여 남부군이라고 하는 빨치산 특수부대로 재편성되었다.
아무튼 인천상륙작전이 한국전쟁의 상황을 일거에 바꾸어 놓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승리에 도취한 맥아더는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추진한다. 트루먼이 미군의 38선 돌파를 승인한 것은 서울을 탈환한 하루 뒤인 9월 29일이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의 일관된 주장은 북진통일이었다. 이승만은 이미 9월 20일의 연설에서 "만일 유엔군이 38선에서 정지하더라도 국군은 북진한다."고 말했다.
9월 29일 서울 환도식에 참석한 이승만은 급히 대구로 내려가 후방에 머물고 있는 군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국군 통수권자는 맥아더인가, 아니면 대통령인가?"라고 운을 뗀다.
"유엔은 국군의 38선 진격과 통일을 막을 권리가 없다. 나는 국군을 진격시킬 생각인데 여러분의 견해는 어떠한가?"
그러자 정일권 국군 총사령관이 대답했다.
"작전권은 유엔군 사령부에 있지만 대통령 각하께서 북진을 명령하면 복종하겠습니다."
이승만은 품속에서 친필로 작성된 북진명령서를 꺼내 정일권에게 주었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내가 이 나라의 국군통수권자다. 내 명령에 따라 북진하라."
국군의 날과 유엔데이의 유래하지만 그들이 쇼를 벌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승만의 북진 명령은 이미 백악관의 결재가 떨어진 지 12시간 이상 경과한 후에 내려진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미군의 38선 북진 사실을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통보 받은 후에 부리나케 대구로 내려간 셈이었다. 요컨대 이승만은 미국의 뒷북을 치며 그것을 정치적 효과로까지 연출해 낸 것이었다. 이로 인해 딱하게도 순진한 백성들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초강대국 미국에 분연히 맞선 일화 하나를 추가로 더 간직하게 되었다.
이승만에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이 서울 함락 과정에서 걸러진 국회에서도 9월 30일 미국의 뒷북을 치는 북진을 결의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1일 미군과 국군은 38선을 돌파했다. 한편 중국의 국무원 총리 주은래는, "미군의 38선 돌파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했다.
유엔군의 38선 돌파에는 유엔 공식기구의 결의가 필요했다. 뒤늦게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한 소련은 유엔군의 '38선돌파결의안'을 매번 거부했다. 이에 따라 영국을 비롯한 8개국은 결의안을 총회로 돌려 가결시켰다. 그것은 이미 미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일주일이 지난 10월 7일의 일이었다. 결국 유엔 역시 미국의 뒷북을 친 것이었다.
훗날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되고, 38선돌파결의안이 가결된 10월 24일은 '유엔데이'가 되어 기념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민족적 관점에서 엽기적이고도 코믹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김성식은 인민군이 퇴각한 서울 시가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사학자로서 역사의 현장을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시내로 나가 보았다. 1950년 10월 2일 서울의 거리는 그에게 격한 슬픔을 안겨 주었다.
중앙청은 왼쪽이 허물어진 채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비각은 무너져 내려 앉았고 육조(六曹)거리에는 타다 남은 벽돌과 기왓장이 너부러져 있었다. 남대문 벽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 아래 세브란스 건물도 타버렸으며, 멀리 보이는 서울역사는 타나 남은 성냥갑처럼 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기울어진 전신주들, 연기와 매캐한 냄새, 이파리째 무참히 타버린 플라타너스들이여, 언제 다시 네 몸에 움이 돋고 윤기가 돌는지?'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폐허의 도시를 하염없이 걸었다.
인민군과 미군의 차이다음 날 김성식은 이두오와 함께 집을 나섰다. 고향 집에 가는 이두오를 배웅도 할 겸 학교에도 나가 보기 위해서였다. 이두오는 등에 괴나리봇짐 하나를 달랑 메고 있었다. 교통 수단이 아직 정상화되지 않아서 그는 충청도 고향까지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위험하니 며칠 더 묵었다 가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더 이상 신세를 질 수는 없다며 한사코 학교에 가는 김성식을 따라 나섰다. 이두오는 학교 앞에 이르자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으며 인사하고 종로 5가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김성식의 예상대로 학교는 유엔군의 차지였다. 유엔군은 교사(校舍)를 송두리째 비우라고 명령했다고 했다. 일제 때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학교는 조선 땅에 있었지만 일본인의 숫자가 80%를 넘었었다. 사실상 일본인의 대학이었다. 많은 청년들이 이 학교를 원한에 사무친 눈으로 흘겨보며 현해탄을 건너거나 압록강을 넘어야 했다.
미군정이 실시된 이후에도 학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군정의 밀어붙이기식 행정안인 '국대안'과 좌우 이념 대립 때문이었다. 그 혼란한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학교는 다시 전쟁을 맞이했다. 인민군이 학교를 사용하며 자치위원회가 따로 결성되었지만, 그들은 모두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도망쳤다. 이제 학교는 다시 미군사령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문리대는 고작 사무실 하나를 그나마 임시로 사용해야 했다. 생각할수록 대한민국 학원의 운명은 기구하기만 했다.
교사를 쓰는 태도에 두 군대의 차이가 있었다. 인민군은 학교 책임자를 만나, 오늘부터 학교는 군이 사용할 테니 너희들은 물러가되 물건은 그대로 두고 가면 우리가 잘 보관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미군은 아무날 아무시까지 학교를 비워라. 너희들의 물건은 깨끗이 치워야 한다고 했다.
김성식은 학교 책은 도서관으로 반납하고 자신의 책들은 집으로 날라 왔다. 마을에는 미군 대신 국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천막을 치고 한둔했는데, 국군은 민가에 찾아와 방을 비우라고 성화를 부렸다.
김성식도 사랑과 문간방을 내주었다. 그는 며칠 전까지 머물렀던 인민군과 국군의 생김새에서 전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 똑같은 겨레의 젊은이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들이 우군과 적군으로 갈릴 이유라고는 하등 없었다.
전선에서 두 군대가 육박전을 치를 때 적을 찌르려 하다가, 갑자기 "형님!" 하고 총검을 내동댕이치는 동생을 보고 "아우야!" 하며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이야기는 그래도 들어줄 만한 것이었다.
"우리 국군의 용맹함은 유엔군이 탄복하는 바입니다. 육박전에 들어가면 상대의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짓찧는다든지 심지어는 상대방의 코를 물어뜯기도 하니까요."
이런 이야기는 그에게 수치감과 자괴감을 불러 일으켰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올 6월 25일까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