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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기록도 없이 아무런 거침도 없이 그저 푹 쉬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상을 기록했다. 기록도 모자라 매 순간을 특징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휴식을 만끽할 줄 알아야 진정 정직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 순간에도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14시간 20분 기차를 타고 우크라이나에 수도 키예프로 돌아갔다. 4월 29일 밤기차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니꼴라예프에 머물렀다. 정확히 2주다. 나는 떠나기 전 난생 처음 찾았던 니꼴라예프에 홈스테이 하던 집 식구들과 작별의 만찬을 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5월 3일에 점심을 한국음식으로 하자고 제안해놓고 떠났다. 내가 니꼴라예프에 있는 동안 밀착 수행(?), 혹은 경호(?)했던 학생 비까와 타샤는 29일에도 기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함께 해줬다. 그들은 내가 처음 찾았던 니꼴라예프에서 마중과 배웅을 해준 유일한 사람들이다. 고마운 이들이다.

 

밤기차를 타고 왔다가 다시 밤기차를 타고 떠난다. 14시간 20분의 기차여행이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꾸페라는 기차는 4인실 전용 침대열차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 타게 될 것인가 많이 긴장하게 된다. 말이 서툰 것도 문제지만 젊은 혈기와 보드카에 잘못 길들여진 술버릇이 안 좋은 사람이라도 타게 될까봐 걱정이다. 더구나 중국인에 대한 감정은 물론 동양인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이 우크라이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설명이기에 더욱 그렇다. 아직까지 내가 직접 만난 사람 중에서는 그런 불편을 느낄만한 사람을 만나지 않은 것은 그런 점에서 행운인 듯도 하다. 내가 탄 꾸페에는 두 명의 남성이 타고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 한 사람의 젊은 사람은 내렸다. 연세가 드신 분을 배웅하고 내린 것 같다. 둘만 남은 꾸페에서 나이든 남성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부담이 없었다. 그는 68세로 눈이 좋지 않아 키예프로 치료차 간다고 했다.

 

 

오후 7시 3분에 출발한 기차다. 그래도 아직 훤하기만 하다. 노인이 바깥을 바라보기에 커텐을 이용해서 창문을 닦아 주었다. 그런데도 밖이 잘 보이지 않는지 노인은 다시 손으로 창문을 닦는다. 서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에 어머니의 말씀이 머리를 치며 여러 가지 연상된 사색을 끄집어낸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내게 "밥맛 좋을 때, 입맛 좋을 때, 잘 먹어 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거기에 눈 좋을 때 잘 봐두어라! 많이 봐 두어라! 그리고 젊을 때 많이 사랑해라! 할 수 있을 때, 해라! 그것이 무엇이든... 한참을 끊이지 않는 사색의 강을 허우적거렸다. 그래 그렇다. 볼 수 있을 때, 또 할 수 있을 때, 힘 있을 때, 모두가 긍정을 내포하고 이르는 말이라서 그런지 부담이 적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해야겠다. 저 위정자들의 네 편 내 편의 소용돌이를 넘어서 말이다.

 

 

연수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하듯 부임지 답사 보고차 수도 키예프에 가는 것이다. 키예프에서 촛불 시위 1주년 집회를 보았다. 인터넷으로 본 뉴스들 탓에 그만 답사 보고와 여유로운 휴식은 망쳤다. 그러나 나도 한국 사람으로 동시대의 고통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해 촛불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전경의 군홧발에 차이는 여대생을 보았다. 그때는 네팔 카트만두에서 그리고 올해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보았다. 바뀐 것은 전경의 군홧발이 아닌 방패라는 것인데 그것이 유혈의 변명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이유있는 시위를 그렇게 막는다고 막아지는가? 나는 권력을 경험해 본적 없어서 모르지만 아마도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안다. 세상의 모든 변명과 이유들을 잠재우지 못하는 한 결코 권력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권력은 결코 자유롭게 행사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의 무덤은 아직 묘비를 쓸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정의의 무덤은 묘비를 쓰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자! 인간의 적은 종교다. 종교의 적은 인간이다. 신의 적은 인간이고, 인간의 적은 신이다. 세계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새삼 느낀다. 인간의 권력이 인간을 살육하더니, 그 살육에 질겁한 인간을 다시 인간이 신의 신하가 되어 신이라는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선량한 대부분의 나약한 사람들은 신의 명을 따를 수 없게 되었다. 그 신의 신하가 된 인간이 신과 선량한 인간을 격리 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량한 인간위에 신보다 더한 무쇠권력으로 집단화했기 때문이다. 태초에 신이 있었을까? 나는 모르기에 신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신을 도구화하여 인간과 신을 격리시킨 신격화한 집단권력인 신의 신하들은 비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켰고 그들은 전쟁이라는 살육에 의지할 곳 없어 잡초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던 선량한 인간들을 신의 감옥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신의 감옥에서 신보다 더한 권세를 쥐고 간수 노릇을 하고 있다. 난 그 신의 신하들 때문에 태초에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 신이시어! 정녕 존재하시는가? 그렇다면 응당 신께서는 그대의 신하들을 처단하시라! 지금 당장,

 

사랑하자! 사람들아! 세상 모든 것들, 잡초라도...

 

다시 14시간 20분 기차를 타야 된다. 키예프에서 어린 단원들과 한 끼의 식사를 한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기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중년 여성이 같은 꾸페에 탔다. 48세의 나타샤라고 했다. 단 둘 만의 공간이니 자연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서먹하기가 이만 저만 아니다. 그것도 14시간 20분 동안 밀폐된 공간이다. 서둘러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서먹해하더니 곧 익숙해져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한 달 동안 키예프의 동생 집에서 휴가를 즐기다 돌아간다고 했다. 원래 고향은 키예프인데 지금은 니꼴라예프에서 산다고 했다. 4월 30일 도착해서 5월 2일 기차니까? 꼭 이틀 만에 다시 타는 기차다. 힘겹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자다 깨다, 깨다 자다. 아침이다. 먼 대지와 하늘이 맞닿은 곳 지평선을 바라보며 아침을 달리는 기차 속에서는 드물게 한 그루 있는 나무도 인적처럼 반갑다. 드물게 허공을 가르는 새 한 마리도 인적처럼 반갑다. 그렇게 그렇게 반가운데 우리네 조국의 오늘은 삭막하기만 하다. 걱정이다.

 

5월 3일 아침 9시 25분 예정보다 3분 늦게 도착했다. 이미 타샤와 비까는 마중을 나왔다고 전화를 했다. 비가 내리고 있다. 타샤와 비까를 만나고 곧 가게에 들려 돼지 갈비와 닭고기를 샀다. 찜을 할 생각이다. 우중에 도착해서 옷이 조금 젖었다. 서둘러 묵었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곧 음식요리를 시작했다. 서툴지 않은 솜씨로 음식을 만들어냈다. 이미 한 번 선보인 음식이고 맛있게 먹는 것을 보았던 터라 마음 놓고 만들었다. 오늘도 맛있게 드시는 타샤의 가족들을 보면서 고맙다. 꼭 그들의 입맛에 안성맞춤일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아무튼 멋있는 작별 파티에 타샤의 아버지는 오래된 샴페인을 내놓으셨다. 특별한 일이란다. 타샤와 비까 그리고 그의 부모님까지 둘러앉아서 샴페인을 마시고 돼지갈비를 뜯고 하다보니 이사를 위해 떠나야 할 시간이다. 여행용 가방과 이민용 가방 그리고 커다란 등산배낭 등 짐이 제법 모양새 있는 이삿짐 꼴이다. 대절 택시에 어렵게 짐을 옮겨 싣고 아파트에 왔더니 나의 협력자 나탈리아 교수는 일찌감치 와서 기다리고 있다. 사실 연휴 중간이라서 부르기도 그렇고 해서 연락도 취하지 않았는데 고마운 일이다.  

 

 

이삿날이다. 모두 도움을 거두고 돌아갔다. 혼자만 남겨진 시간이다. 서둘러 옷가지들을 중심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끝이 없다. 그냥 풀어놓으면 금방 일듯 하던 짐들이 꽤 많다. 피곤한 몸이다. 하지만 바삐 우선 필요한 살림장만으로 시장을 보았다. 그리고 저녁은 라면으로 대신하고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어제에 이어 살림장만 시장을 본 후 근처 대형마켓에서 구입한 천년학을 보았다. 러시아어로 더빙된 한국영화인데, 판매원은 중국(우크라이나 말로는 끼따이) 영화라며 한국영화가 없다는 것을 내가 보고 학생들에게 보여줄 욕심으로 구입했다. 영화를 보다가 일시정지를 눌러 놓고 드디어 첫 식사를 준비했다. 간단한 식사지만, 우크라이나 니꼴라예프에 와서 혼자 맞는 첫 번째 한식이다. 오늘이 이사 온 후 첫 밥인 것이다. 종일토록 거친 세상도 좋은 세상도 살아야 할 일이다. 거기 밥이 있다.

 

밥을 억압하지 말라! 권력이 밥을 억압하는 한 권력은 영원히 편히 잠들지 못하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해피 수원뉴스에 동시 게재 됩니다.


태그:#시인 김형효, #우크라이나 니꼴라에프, #해외봉사단, #우크라이나 한국어 교육 시인 김형효, #니꼴라예프 수흐믈린스키 국립대학교 한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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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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