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현의 첫 번째 소설집 <굿바이! 명왕성>을 여는 순간, 당황하게 된다. 두 남자가 나와 어딘가를 찾고 있는데 그것이 '명왕성'이라고 불리는 자판기이기 때문이다. 자판기가 뭐 그리 대수롭겠는가 싶겠지만 표제작이 말하는 그 자판기는 펠라치오를 해주는 자판기다.
자판기 사용법은 간단하다. 1만원을 넣으면 입이 나온다. 그것이 '일'을 처리해준다. 누구를 위한 기계인가? 소설 속의 그들처럼 성적 소수자인 사람들에게 대단히 유용한 기계다. 외모를 생각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번거로운 일들도 없다. 그들은 그곳을 찾아가면서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을 가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이내 실망감에 빠진다. 기계가 없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어찌해야 하는 걸까? 그들은 달린다. 소설 속에서, 마침 행성에서 제외됐다고 판명된 명왕성을 향해 달리자고 말한다. 상징적인 의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기준의 문제로 태양계에서 사라지게 된 명왕성,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기준의 문제로 '퇴출'당하고 있는 그들의 운명을 껴안겠다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 이 대목은 가슴을 켜켜이 흔든다. 세상의 질타를 알면서도, 살아갈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준에 의한 '정상'이 되지 않기로 마음먹은 남자들의 어떤 다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집에는 이 남자들처럼 어떤 의미에서 소수자이거나 혹은 세상으로부터 질타 당할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왜 그런 것일까? 권정현은 그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주고 어떤 의미에서 치유할 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제대로 보고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A.M. 12:00 모텔 그린필드'이다. 한낮의 도로에서 어느 여자가 옷을 벗고 걸어간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여자는 왜 그랬던 것일까? 소설은 그 장면을 여러 명의 입장을 통해 이야기하는데 드러나는 결과가 허를 찌른다. 같은 장면을 본 사람들의 증언이 다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보고 있어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은 '360'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소설이다. 어느 예술가가 사고를 당해 죽었다. 소설은 그의 사망과 작품에 관해 언급하는 사람들을 쫓고 있다. 그들은 하나의 사건, 그리고 한명의 인생을 보면서도 다른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다들 "자신이 본 것, 들은 것, 자라며 배운 것,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만을 철썩같이 진실이라고 믿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소설은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를 묻는다. 'A.M. 12:00 모텔 그린필드'이 던지는 말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가볍게 던져지는 것 같지만 '뼈'가 있다. 그것들이 모인 <굿바이! 명왕성>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가벼워 보이지만, 읽고 나면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진지함이 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도 이야기꾼의 기질을 엿보게 할 만큼 다채롭다. 건네는 이야기나 방법이 녹록치 않은 것이다. 첫 소설집이건만, 뭔가 있다. 예사롭지 않은 무엇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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