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이란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어긋나서 이치상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 중국 초나라의 상인이 창과 방패를 동시에 팔면서 창을 가리켜 어떤 방패로도 막지 못하는 창이라고 해놓고 방패는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라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변증법에서는 모순이란 객관적인 사물에 내재하여 그 대립에 의하여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이든 단체든 간에 끊임없이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내부에 내재한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이야기 하나
개인적 모순은 대개 자신에게 불철저한 데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80년대의 일이다. 내게 이런저런 것을 상의하곤 하는 운동권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자신이 고등학생 하나를 과외지도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후배에게 과외를 그만두든지 운동을 그만두든지 양자택일해야만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충고했다.
후배에게서 과외를 받은 학생이 과외를 받지 않은 학생보다 좋은 대학 가는 데 유리할 게 틀림없을 것이고, 좋은 대학 간 부잣집 애는 나중에 가난한 집 아이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니 그게 바로 민중의 편을 지향한다는 네가 결국 반민중적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셈이 아니냐고 얘기했던 것이다. 물론 그 후배는 내 충고를 따르지 않은 채 과외를 계속했고 운동 또한 그만두지 않았다. 참고삼아 말하면 당시는 법적으로도 과외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던 시절이었다.
이야기 둘
최근 가수 신해철이 입시학원 광고를 찍은 것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는 평소 우리나라의 입시제도와 학원 문제를 강력히 비판하던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그가 입시학원 광고를 찍은 이유를 뭐라고 변명하든지 간에 그는 이미 자가당착에 빠진 셈이다.
조금 오래 된 일이다. 영화배우 최민식이 수입 오렌지 광고·사채광고 찍으면서 스크린 쿼터 사수를 부르짖으며 시위할 때는 진짜 한국영화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듯 이중적 태도를 보여서 대중에게 크게 욕을 얻어먹었던 적도 있다. 최민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척 안타깝게 생각했던 일이었다.
이야기 셋
아직까지 우리나라 진보 세력의 주축을 이루는 사람들은 계급적 이해당사자가 아닌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기층민중을 대변하고 있지만 이해 당사자는 아니다. 따라서 언제 그들에게서 등을 돌릴지 모르는 불가측성이 있다.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2개국 순방에 황석영 씨가 동행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경위야 어찌됐든지 간에 내겐 대단히 큰 실망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민족문학 진영에 속해 있으면서 진보적 인사를 자처했던 사람이 아닌가.
작은 모순이 정당성을 무너뜨린다
사회적 발언을 쏟아놓거나 진보적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는 외부의 모순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안의 모순을 바라보는 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남의 눈의 대들보보다 내 눈의 티끌을 먼저 바라보는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자신에게 내재한 아주 작은 모순이 자기 주장이나 행동의 정당성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중기 시인의 시 '그 말이 가슴을 쳤다'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 모순에 빠지기 쉬운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다.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사꾼들이 먼저
밥이나 먹고 보자며 자장면 집으로 몰려가자
그걸 지켜보던 밥집 주인 젊은 대머리가
저런, 저런, 쌀값 아직 한참은 더 떨어져야 돼
쌀 농사 지키자고 데모하는 작자들이
밥은 안 먹고 뭐! 수입 밀가루를 처먹어?
에라 이 화상들아
똥폼이나 잡지 말든지
나는 그 말 듣고 내 마음 일주문을 부숴 버렸다
- 이중기 시 '그 말이 가슴을 쳤다' 전문
195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이중기 시인은 시집 <식민지 농민>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 동안 상자한 시집으로는 <숨어서 피는 꽃>, <밥상 위의 안부>, <다시 격문을 쓴다> 등이 있다.
시 '그 말이 가슴을 쳤다'는 2001년에 나온 시집 <밥상 위의 안부>에 실린 시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집 속에서 시인은 ' 저 농부에게 바치다' 등 많은 시편을 통해 끊임없이 파멸로 치닫는 농촌사회의 현실을 경고하고 있다. 시인은 현재 경북 영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시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민들이 점심 먹으러 자장면 집으로 몰려갔다는 이야기다. 쌀값 보전해달라는 데모를 하러 갔으면 쌀밥을 고봉으로 파는 데로 갔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 곳은 쌀의 대체재인 밀가루로 만드는 자장면집이었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이처럼 우스꽝스런 일이 어디 있는가를.
다만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점이 있다면 이 작은 모순은 순진한 농민들이 부지불식 간에 저지른 일시적인 판단착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라서 어이없어 하면서 한 번 허허 웃고 말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일 조직의 도덕적 기반과 정당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커다란 모순이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진보의 적들은 호시탐탐 진보세력을 공략할 수 있는 허점을 찾으려고 혈안이 돼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린 절대 자신을 들여다 보기를 두려워해선 안된다. 비단 운동권이나 활동가가 아닐지라도 자기 개인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기완성을 향해 가는 인간의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개인 모순의 극복과 발전을 위하여
난 위에 열거한 부류의 사람들을 얼치기 진보주의자 혹은 관념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쉽게 입장을 바꾼다면 그는 결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가 아니다. 자신은 신념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한낱 고정관념이었을 뿐이다. 고정관념과 신념이 갈라지는 지점은 실천의 유무이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 가진 신념 체계 안에서 철저하게 검증하고 체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관념을 벗어던질 수 있다.
언젠가 극좌나 극우파 가운데서 유독 변절자가 많이 나오는 까닭을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밖의 모순에는 예민하지만 자기 개인의 모순에는 둔감한 것이 그들이 가진 특징이다. 사람들은 변절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절대 변절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것으로 육화된 신념을 지녔던 게 아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는데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 얼치기들은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척하다가 어떤 자리가 주어지면 서슴없이 그쪽으로 전향해 버린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권력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자야말로 권력에 가장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자라는 말이.
나는 80년대에 대학에 다니던 후배들에게 늘 분노보다는 통증을 가지라고 얘기했다. "봐라, 이승만 정권의 불의에 반대했던 4·19 세대를 봐라. 그들이 정치에 뛰어들어 어떻게 변했는가를. 젊어 한 때 불의에 대한 분노를 품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진다. 그러니 어떻게 그런 불의가 왜 가능했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고 사회에 나가거든 그것을 통증처럼 간직하고 현실을 살아야 이 사회는 개혁된다"라고. 나는 이론가가 아니다. 실천가는 더더욱 아니다. 변변치 않은 얘기지만, 그런 나로서는 후배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최상의 얘기를 했던 셈이다.
요새 유행하는 말 중에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얼치기란 아마추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말이다. 아마추어가 되지 않으려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결코 멈추어선 아니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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