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왜 돌아가셨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심정을 아십니까? 국가권력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됐다는 사실만 알 뿐, 그 이유를 물어볼 수도, 억울함을 호소해볼 수도 없는 자식의 답답함을 아십니까?"
평생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진주시 유족회'(회장 김태근)는 오는 15일 옛 진주시청(현 진주시청소년수련관)에서 '진주 민간인 피학살 제1회 합동위령제'를 연다. 학살이 일어난 지 59년 만에 처음 열리는 위령제다.
학살 59년 만의 위령제... 백발이 된 어린 유복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는 지난 3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 재소자 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진실화해위는 '진주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제 지원 등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진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최소 1200여 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진주지구 CIC(육군 특무부대)와 헌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집단 살해되었으며 이번 조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0명이다"고 밝혔다.
희생자들은 진주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콩밭골, 관지리 화령골과 닭족골, 용산리 용산치,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집단 총살당한 것이다.
기록이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의 국가범죄에 의해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진주에서 불법 학살된 희생자만 1200여 명에 이른다. 당시 아버지를 잃었던 유복자나 어린 자식들은 지금은 모두 60대, 70대 노인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이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내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소"라는 말조차 공개적으로 해보지 못했다. 1950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 강병현(59·진주)씨는 "나는 어릴 때 다른 집 아이들도 원래 아버지가 없는 줄 알았지"라고 말할 정도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영문도 모른 채 국군과 경찰에 끌려간 뒤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학살당한 것은 분명하지만, 돌아가신 날짜도 장소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끌려간 음력 6월 12일 바로 앞날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진주유족회 "우익단체 눈치보는 진주시장, 위령제 참석 거부"
진주유족회는 2008년 3월 창립되었으며, 그동안 명석면 일대 학살 매장지(추정) 확인 작업을 벌였다. 이들은 매장지에 안내문을 설치해 놓기도 했다. 지난해 진실화해위가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제 지원 등을 권고하자 그야말로 59년 만에 처음으로 떳떳이 공개적인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주유족회는 이날 오후 1시 진주시 본성동 옛 진주시청에 모여 1시간 정도 시민들에게 진주민간인학살사건을 알리는 시가행진을 벌인 뒤, 2시부터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을 거행한다.
진주유족회는 "국가기관의 위령사업 지원권고에도 진주시장은 이런저런 우익단체의 눈치를 보며 이번 위령제 참석도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면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위령제에서 술 한 잔 따라올리는 것조차 피하고 있는 진주시장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고 밝혔다.
합동위령제는 전통제례로 열리며, 원불교(천도독경)·불교(창혼독경)의 종교의례에 이어 노래패 '맥박'의 추모가 공연이 열린다. 이어 열리는 추모식은 묵념과 경과보고, 인사말, 추모사, 추모시, 친혼굿, 헌화 등의 순서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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