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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이어지는 '열풍'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쓸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증후군'이란 의학적 용어가 정확한 번역이겠으나 사회 현상을 가리키는 경우엔 그저 '열풍'이나 '유행' 쯤으로 순화해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이러한 신드롬을 만들어 소비하곤 한다.

 

까마득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불과 1~2년 전에는 온 국민의 쌈짓돈이 펀드상품으로 물밀듯 몰려간 펀드 투자 신드롬이 있었고, 뒷감당도 어려운 거액을 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빌려 일단 집부터 사고 보려는 부동산 투자 신드롬도 있었다.

 

그뿐인가. 평소 같으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말을 떠올리며 외면했을 흠결 많은 대통령 후보에게 관대하게 표를 몰아준 일이나, 몇 달 뒤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시 같은 당의 수도권 후보들에게 표를 몰아준 일도 이른바 '묻지마 투표' 신드롬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잦아들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무섭게 타올랐다 사라진 굵직한 신드롬들인 셈이다.

 

신드롬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특히 지난 다섯달간 우리 사회에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감동을 안겨준 신드롬도 있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워낭소리>와 용산 사건 

 

넉 달 전인 1월 15일 7개의 개봉관에서 어렵게 막을 올린 낯선 제목의 이 영화는 고요한 호수에 일기 시작한 파문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빠른 속도로 관객과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꼭 한 달 뒤 대통령 부부가 느닷없이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을 찾아 이 영화를 관람한 사건은 당시 이 영화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개봉관 수를 폭발적으로 늘려가며 개봉 두 달 만에 300만 관객 돌파를 조심스럽게 전망하기도 했던 이 영화는 아쉽게도 5월 15일 현재 공식집계된 관객수 292만 명 수준에서 사실상 종영되었다(전국 상영관 6개).

 

하지만 그동안 이른바 공동체 상영이 줄을 이었고 지금도 전국 각지의 지역축제들에서 꾸준히 무료 상영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공식집계는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 이상 감소한 한국 영화의 점유율을 감안하면 더욱 값진 기록이자 '<워낭소리> 신드롬'이란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결과다.

 

<워낭소리>가 넉 달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린 시점에서 그동안 이 작은 영화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지 돌아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립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식의 영화적 평가보다는 이 영화가 상영되던 지난 넉 달 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과 더불어 그 사회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우선, 기억하겠지만 이 영화가 처음으로 필름을 건 나흘 뒤인 1월 19일 용산 재개발지역에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죽음을 둘러싼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건설사와 지자체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는 도시재개발 과정에서 일터와 삶터를 빼앗겨야 했던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목숨을 잃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철거 깡패는 물론 전투경찰과 경찰특공대까지 동원돼 적극적인 진압에 나섰다는 점에서 국가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건이 있은 지 117일을 넘긴 지금까지도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넉 달 전의 불길 속에 갇혀 있다. 지난 15일에는 농성단의 변호인 측이 재판부에 대해 재판기피신청을 제출하기도 했다. 검찰이 수사기록을 불법으로 은폐하고 있음에도 재판부가 이를 묵인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워낭소리>가 우리 사회에 점점 깊은 울림으로 퍼져가는 사이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조금씩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용산 참사 현장을 외면하던 대통령은 한 달쯤 뒤에 <워낭소리>를 관람했고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자녀 9명을 농사지어 공부시키고 키운 게 우리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겠는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언급한 걸 보면 아마도 이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며 60~70년대 개발주의의 향수에 젖었던 모양이다. 역시 자기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영화의 감독이 영화의 흥행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리움과 향수 등 마음과 감정이라는 부분을 자극시켜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답했으니 이 대통령이 느낀 '향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 영화에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읽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많은 이들이 느꼈을 감동을 설명하기에 대통령의 소감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효율성 떨어진다고 함부로 짓밟아도 돼?

 

 <워낭소리>의 한 장면
<워낭소리>의 한 장면 ⓒ 스튜디오느림보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며 '오래된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떠올렸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소와 할아버지 그리고 비중있는 조연인 할머니까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배역들은 하나 같이 아주 늙고 남루하기 그지없다. 할아버지와 소가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안타깝게 여겨질 지경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시간이 흘러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영화에서는 이름 없는 촌로와 그가 키우는 가축의 운명을 다루고 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그러한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아주 오래돼 세상에서의 의미가 이미 다한 듯 보이는 그 무엇이라도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오히려 한생을 바쳐 자신의 존재에 충실했던 그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따뜻한 감사를 전해야 한다고, 그리고 무사히 한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남은 이들의 몫이라고 말이다.

 

효율성, 생산성, 부가가치 따위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 지도 꽤나 오래다. 그러한 잣대로 보면 낡은 동네 상가들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화려한 마천루들을 세우는 것이 몇 십 배, 몇 백배쯤 '남는 장사'일 수 있다.

 

문제는 그 낡은 동네 상가와 그 안에서 뒤엉켜 살아가는 삶들에 대한 태도다. 지금껏 자신의 존재에 충실했던 그 모든 존재들을 단지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함부로 짓밟아도 과연 괜찮은 것일까. 답이 뻔한 질문 같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기 시작했다. 이윤에 눈이 먼 건설기업들은 물론 심지어 마치 '개발'이 자신의 유일한 사명인양 떠들어대는 국가를 향해서도 우리는 환호해왔던 것이다.

 

한달 10만 원 때문에 사람 자르고, 자살하게 하고...

 

최근 또 하나의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3일 대전에서 어느 노조 간부가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고인은 화물연대 지회장으로 40여 일간 대한통운에서 해고당한 택배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을 지원해왔다. 이미 며칠 전 노조 게시판에 유서로 보이는 글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목을 맨 나무에는 고인이 직접 건 것으로 보이는 '대한통운 노조탄압 중단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고인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대한통운측이 노조원들을 해고한 이유는 간단하다. 노조의 주장에 따르면, 지난 1월 노조와 사측이 합의한 물류 배달 수수료 인상 합의를 얼마 뒤 사측이 무효화 했고, 노조는 이에 반발해 분류작업을 거부하는 등 준법투쟁을 벌였다. 그것이 이유였다. 당시 노사가 합의한 인상안은 건당 30원이었다. 사측은 해고조치와 함께 한 달간의 임금을 환수하기까지 했다. 현재 대한통운측은 당초 합의사실을 부인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건당 30원, 한 달이면 약 10만 원 정도가 된다고 하는 이 정도의 돈으로도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그것도 문자 한통으로) 또 죽음을 선택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느새 우리는 이런 일들에 익숙해져 버렸지만 이는 정상적인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거나 또 벌어져도 괜찮은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도 역시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일들은 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가 90년대를 지나오는 사이, 특히 IMF 외환위기를 겪은 뒤 한국 사회의 가장 거부하기 힘든 신드롬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일지 모른다.

 

인류의 삶에서 경제, 특히 금융의 비중과 영향력이 한없이 커져갔고 그나마 국민경제를 지탱하던 국경이라는 최소한의 경계도 무너져버렸다. 전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한 영국과 미국의 제도들이 각 나라의 다양한 발전 수준과 처지에 대한 고려 없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었고 그 결과 오랜 세월 국민의 삶을 지켜주던 공적 영역과 일자리라는 울타리도 심각한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용산 철거민들의 죽음도, 화물연대 노조간부의 죽음도 모두 한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신드롬의 결과다.

 

언젠가 이 악몽 같은 시기도 지나가리라

 

만약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신드롬으로 바라본다면 언젠가 이 악몽 같은 시기도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 지난해 터져 나온 미국 발 금융위기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직 그 끝을 단정하기는 이르다. 인류가 개발한 모든 경제 지표들이 암울한 미래를 예언하고 있음에도 전 세계 대부분의 정부들이 (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철 지난 유행으로 여길 생각들이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탓하지는 말기 바란다. 필자는 '<워낭소리> 신드롬'에서 희망을 읽었다.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만한 신드롬이 무엇인지 필자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금융화, 세계화, 자유화의 중심에 '효율성'이라는 절체절명의 가치가 자리 잡고 있음을 감안하면 신자유주의 이후를 준비하며 우리 사회가 공유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워낭소리>는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줌과 더불어, 그것이 새로운 신드롬으로 뿌리내릴 가능성 역시 보여주었다. 이 '남루한' 영화 한 편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3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바로 그 가능성이다.

 

비록 이 나라의 대통령은 개발주의의 향수에 젖어 대운하를 파는 소를 떠올리며 흐뭇해했을지 몰라도 많은 국민들은 결코 그 시대로 돌아가려 하거나, 또는 지금의 시대가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아직 우리 사회에 맴돌고 있는 <워낭소리>의 긴 여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필자는 그렇게 믿는다.


#워낭소리#용산참사#고 박종태 열사#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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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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