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5.18 29주년을 맞이하여 새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었다. 책의 제목은 <5.18과 기억, 그리고 소설>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인 <5․18민중항쟁 소설 연구>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문순태 선생의 소설에서는 「일어서는 땅」과 『그들의 새벽』 외에 단편 소설 「최루증」을 추가하여 한편의 논문으로 재구성하였다. 소설가 심상대의 경우 학위논문에서 다루었던 「망월」을 민속문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 보았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이미란 선생의 5․18소설 「말을 알다」역시 새로운 논문으로 발표한 것을 이 책에 수록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 수정·보완한 것이지 큰 틀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자괴심이 인다. 그간 게으름 피지 않고 공부하면서 논문을 쓴다고 했지만 필자의 학문적 성취가 아직 멀었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학위논문을 쓸 때 미처 찾아내지 못했던 5월 관련 소설들의 목록을 완성하겠다는 다짐도 크게는 진전이 없는 편이다. 황석영 선생의 『오래된 정원』과 박혜강 선생의 『운주』도 5월 관련 소설의 범주에 넣고 연구할 만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번 숙독하였으나 논문으로는 아직 어림을 못하고 있다. 정찬의 빼어난 소설 「슬픔의 노래」는 여러 번 읽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우선 이 책을 내게 되었다. 부족한대로 정리를 하고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생각이 컸던 때문이다. 그러자니 내용이 중복되는 부분도 얼마간 있게 되었다. 좀 더 깔끔하게 다듬지 못한 건 순전히 내 성의가 부족한 탓이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상처의 치유와 자기 응시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이란 끊임없이 견디어 내야 할 깊은 상처였다. 뒤늦은 공부 십 년 끝에 학위를 받던 날, 그런 나의 기쁨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누군들 기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남다른 기쁨'이란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삶의 무게는 버거워서 내딛는 걸음마다 나는 휘청거렸지 싶다. 가을 저녁 빈 들을 적시는 찬비와도 같은 비애는, 늘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까 내겐 아주 오랫동안 결핍과 부재와 고독이 친숙한 벗이었던 셈이다.
나는 지니지 않아도 될 많은 상념들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비애와 상념-을 대체로 혼자서 감당해 왔다고 믿던 터였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느껴본 기억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학위를 받던 날, 비로소 나는 나를 있게 한 그 모든 것들, 그리고 몇몇 사람에게, 옛 우물처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는 오래 묵어 굳었던 긴장이 풀린 듯 이내 며칠을 내처 잠을 잤다.
교정 곳곳에 꽃잎이 난분분하고 나비가 넘노니는 날, 처음으로 대학 강단에 서던 날들의 몇 가지 일을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동안 나는 제도의 바깥에 있었다. 대학 강단은 그러므로 내게, 카네기홀에서의 연주회를 허락받은 무명의 피아니스트가 느꼈을 법한 희열- 얼마간의 열병을 앓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권 밖에 위치한 나의 형편에 본질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나는 기뻤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이 기쁨과 고마움을 오래 간직할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글들은 5․18을 다루고 있는 소설들을 해석하고 그것을 재구성한 논문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5․18을 대상으로 소설을 쓰면서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작가들의 고통까지 오롯이 겪으며 이 글들을 썼다. 그러므로 필자의 서투름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빈다. 이제 아무도 5월을 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듯하다. 그렇게 우리들의 5월은 박제화 되고 있다. 이제 곧 5․18민중항쟁 30주년이 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박제화 되어가고 있는 5월의 기억을 어떻게 문화 그리고 문학적 기억으로 재현하여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들 가슴에 살아 뛰노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쓰게 된 글이다. 미흡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그래서 더욱 깊고 풍부하게 채워갈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외롭고 힘든 작업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숙명으로 달게 여긴다.
출판을 허락해준 <한국문화사>에 대한 고마움이 매우 크다. 좋은 대학교재를 전문적으로 펴내고 있는 <한국문화사>의 도서목록에 필자의 부족한 책이 함께 놓이게 된 기쁨 역시 크다. 논문의 지도를 맡아주신 전남대 국문과의 이미란 ․ 임환모 ․ 박양호 선생님, 그리고 장일구 선생님, 충남대 송기섭 선생님의 배려와 후의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존경하는 문순태 ․ 한승원 선생님께는 더욱 깊어지고 깊어져서 좋은 소설로 보답 드리겠다는 말씀을 드린다.
생각해보면 고마움을 전할 사람이 더 많이 있다. 전남대 교육발전연구원 김현정 선생의 후의를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정나래 선생의 항상 웃는 얼굴도 떠오른다. 내게는 분명 소중한 소설집이었으나 필경 팔려나가지도 않는 책이었고 재미있거나 유익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정나래 선생은 귀한 책을 주셔서 아주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아서 내 마음을 아늑하게 해 주었다. 염민호 선생님 또한 그러셨다. 한겨레신문의 안관옥 기자와 전라도 닷컴의 남신희 기자도 무척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나를 '기억'하고 '호명'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내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 사람이 몇 분 더 있다. 변변찮은 내 소설집과 허술한 학위논문을 받아보고 전화나 메일로 인사를 보내준 분들의 얼굴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명지대 문창과 나소정 선생, 제주 4․3연구소 이은주 소장님, 그리고 목포대학교의 이경희 ․ 안미현 선생님과 나주여성농업인센터 임연화 소장님이 그런 분들이시다.
광주기독교 방송국의 유정 작가가 내게 건네던 말도 아직 귓가에 머문다. 짧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방송국에 가면서 나는 그 작가에게 줄 내 소설책 한 권을 지니고 갔었다. 그이는 정말 고맙다고, PD 선생님이 (내 책을)가지고 계신 걸 보고 부러웠다고 했다. 관습화된 인사말이어도 상관없었다. 참 예쁘게 말을 하는구나 싶어 내 마음이 훈훈해졌으니 그것만으로도 그이는 내게 고마운 존재로 오래토록 기억에 남으리라. 이제 보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니……. 그분들의 이름을 다 기록하지 못해 송구스럽다. 책이 나오면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겠다. 아내 안성실, 잘 자라서 기쁜 내 딸 푸름과 아들 솔에게도, 항상 곁에 있어 주어서, 그리고 잘 자라서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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