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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다보면 외딴길에서 지그시 미소지으며 길가를 내려다보는 석불을 만나게 된다. 길가 넓적한 바위만 있으면 마애불을 새겨 놓으려는 고려인들의 열정을 감안해도 도무지 이런 곳까지 와서 왜 불상을 새겨 놓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백제시대의 서산마애삼존불이, 지릅재-하늘재 길가에 있는 고려시대의 미륵리절터의 석불이 그렇다. 국도변에 있어 좀 분위기는 다르긴 해도 안동 태화산 기슭에 있는 제비원석불과 파주 용미리석불 또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늘재 가는 길 지금은 외딴길이지만 문경새재가 나기 전에는 영남과 충청을 잇는 주요도로였다, 미륵리절터는 이 하늘재 길목에 위치하고 있고 석불은 이 하늘재 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 하늘재 가는 길 지금은 외딴길이지만 문경새재가 나기 전에는 영남과 충청을 잇는 주요도로였다, 미륵리절터는 이 하늘재 길목에 위치하고 있고 석불은 이 하늘재 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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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석불 모두 우리 옛길에 자리 잡고 있다. 옛길이기에 지금은 다른 길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지고 오가는 길손들도 적다. 모두 험한 고갯길길목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석불 근처에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가까이 있는 보원사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제비원석불은 제비원(院)이라는 여관을, 파주 용미리석불은 국립숙박시설의 혜음원(惠陰院)을 곁에 두고 있었다. 미륵리석불은 미륵리절터 옆에 병영터가 붙어 있었다.

서산 마애삼존불, 미소 속에 비친 안녕이라는 인사말

서산마애삼존불은 647번 지방도로와 12번 시군도로를 벗어나, 용현계곡을 따라가는 마을길가언덕에 있다. 그 길도 보원사터를 지나면서 끊겨, 지금은 아주 외딴길로 남아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왜 이런 외딴곳에 자리잡고 있을까? 지금은 이 곳이 외딴곳으로 남아있지만 예전엔 중국에서 백제의 수도, 부여로 가는 옛길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리 이상할 일이 아니다.

백제가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잃은 후, 백제는 새로운 해양 루트를 찾아야 했고 태안반도는 대 중국과의 외교 및 교역의 중심에 있었다. 태안에서 공주나 부여를 가려면 태안-서산-운정을 거쳐 덕산-대흥으로 나가야 되는데 이 석불은 운정에서 덕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 보호각이 철거돼 먼 곳에서도 볼 수있다. 사진 옆으로 보이는 산 너머, 상왕산 자락에는 개심사가 있고 상왕산 북쪽, 이 마애불 가까이 보원사터가 있다. 상왕산은 가야산과 한자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 서산마애삼존불 보호각이 철거돼 먼 곳에서도 볼 수있다. 사진 옆으로 보이는 산 너머, 상왕산 자락에는 개심사가 있고 상왕산 북쪽, 이 마애불 가까이 보원사터가 있다. 상왕산은 가야산과 한자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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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애불이 오가는 길손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고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해도 그냥 막 만들어진 게 아니다. 바위의 생김새와 놓인 방향이 그렇다 치지만 이 석불이 쳐다보고 있는 방향은 길이 나있는 용현계곡 방향은 아니다.

자료에 의하면, 이 석불이 향하고 있는 방위는 동동남 30도로 동짓날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하는데 석굴암의 석불이 향하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여 과학적 계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대충보면 방향은 백제의 수도 부여 쪽을 향하고 있어 그냥 해석하기에 백제의 수도를 향하게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건 일반 문학작품으로 치면 오역에 해당한다.  

서산마애삼존불 미소지으며 서있는 방향이 멀리 살짝 보이는 가게가 있는 길가 쪽은 아니다. 그 방위가 동동남 30도로 석굴암 석불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여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조각 솜씨도 여느 석불과 차원이 다르다
▲ 서산마애삼존불 미소지으며 서있는 방향이 멀리 살짝 보이는 가게가 있는 길가 쪽은 아니다. 그 방위가 동동남 30도로 석굴암 석불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여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조각 솜씨도 여느 석불과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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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서산마애삼존불 사진을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깔아 놓고 있다. 몇 개 잘된 사진을 번갈아 깔긴 하는데 기분이 언짢은 날이면 삼존불 세분의 미소를 번갈아 따라 지어보곤 한다. 세분 미소를 보고 있으면 맥놀이 현상으로 만들어지는 범종의 은은한 여운 같은 게 느껴지는데, 세분의 미소는 주파수가 서로 달라 맥놀이가 생기고 그 소리가 내 가슴을 울려 금세 마음이 편안해 진다. 앞으로 세분 미소를 '맥놀이'미소라 부르리라.

서산마애삼존불 미소 맥놀이 현상으로 생기는 범종의 은은한 여운처럼 세분 미소는 내 마음을 울려 금세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식어 많기로 유명한 백제의 미소에 '맥놀이 미소'라는 수식어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 서산마애삼존불 미소 맥놀이 현상으로 생기는 범종의 은은한 여운처럼 세분 미소는 내 마음을 울려 금세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식어 많기로 유명한 백제의 미소에 '맥놀이 미소'라는 수식어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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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에서 백제인들이 그랬듯이 시대를 초월하여 나도 색다른 평안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면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대략 1400년이 흐른 지금, 그 당시의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고스란히 내 컴퓨터 안에서 미소짓고 있으니 말이다.

충주 미륵리석불입상, 소백산맥 고갯길을 비춘 점잖은 미소

수안보에서 미륵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지릅재고 이 지릅재와 연결되는 고개가 하늘재다. 이 재를 넘어야 갈평, 문경으로 갈 수 있었다. 이 지릅재-하늘재 길은 문경새재가 나기 전에는 죽령과 함께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미륵리절터는 지릅재를 지나 하늘재가 시작하는 길목에 있다. 지금은 하늘재를 넘어가는 찻길은 없고 송계계곡으로 빠져나가거나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교통요지였고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어서 사람과 물자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미륵리 석불입상  지릅재-하늘재 길을 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을 등지고 북쪽을 보고 있다
▲ 미륵리 석불입상 지릅재-하늘재 길을 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을 등지고 북쪽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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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걸맞게 미륵리절터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오른편에 제법 넓은 방형 건물터가 있다. 군사요충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군대가 거처하는 병사(兵舍)였을 거라 추측되는데 병사가 아니라도 험한 고갯길을 앞두고 여관이나 주막이 성업했을 거라는 것은 미뤄 짐작이 간다.

 미륵리 석불입상  유난히 뽀얀 얼굴에 점잖은 미소를 짓고 있어 더욱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 미륵리 석불입상 유난히 뽀얀 얼굴에 점잖은 미소를 짓고 있어 더욱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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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 힘들게 고개를 넘어와 심신이 지친 길손을 달래고 하늘에 닿을 만큼 높다란 하늘재를 넘어야 하는 객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석불이 없을 리 없다. 미륵리 절터 맨 뒤쪽엔 살결이 유난히 뽀얗고 보기만해도 편안해지는 석불이 점잖게 미소지으며 길가를 바라다보고 있다.

안동 제비원석불, 보는 이에 따라 달라 보이는 개성있는 석불

안동 제비원석불은 위에서 얘기한 두 석불과는 좀 다른 곳에 자리한다. 두 석불이 예전엔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나 지금은 발길이 끊길 정도로 외진 곳에 있다면, 이 제비원석불은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변에 있다. 그러나 이 석불도 예전부터 안동에서 충청도·경기도로 넘어가려면 거쳐야 할 길머리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제비원은 이름이 좀 이상하지만 '제비여관'이라 할 수 있는데 장도(長途)를 떠나기 전, 하룻밤 쉬어 가는 곳이었다. 이 석불은 다른 석불처럼 온화한 미소라든가 잔잔한 미소, 볼이 터질듯한 미소를 짓지 않는다. 얼굴은 개성이 강하여, 남성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여성 같기도 하다. 그래서 '제비원주막'에서 일한 주모 같기도 하고 무녀 같기도 하다는 말이 나온다.

안동 제비원석불  개성이 강하여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 보인다.
▲ 안동 제비원석불 개성이 강하여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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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원은 성주신과 성주부인에게 성줏제를 지낼 때 굿을 하면서 부르는 무가(巫歌)인 성주풀이에 등장한다. 가사에는 "어라하 만수 어라하 대신, 셩쥬 본향(本鄕)이 어데메인고, 경상도 안동 땅에 제비원이 본향이라…." 라는 대목이 있다. 성주는 무엇인가? 민간신앙에서 집 전체를 수호하고 가장을 보호하는 신이다. 이 곳 제비원을 성주의 본향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석불이 무녀같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석불이 개성이 강하게 만들어진 것이 이런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지 이런 영향 때문에 일반 석불과 달리 보이는 것인지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다. 장도를 떠나는 사람은 성주에게 빌듯이 이 석불에게 집안이 두루 평안하도록 빌었을 게다.

파주 용미리석불입상, 합장한 두 손은 무엇을 빌고 있나?

한양에서 개경을 거쳐 가는 경의로 옛길은 지금 통일로 길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지금은 통일로와 자유로가 뚫려 한적한 곳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지름길이었으며 중국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였다.

용미리 석불입상 길에서도 잘 보이는 위치에 서있어 이정표 역할을 하였고 평안을 비는 대상이었다
▲ 용미리 석불입상 길에서도 잘 보이는 위치에 서있어 이정표 역할을 하였고 평안을 비는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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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고개인 혜음령을 사이에 두고 파주쪽 골짜기에는 고려시대의 국립숙박시설인 혜음원이 있었고 고양쪽에는 조선시대 역관이었던 벽제관이 있었다. 이처럼 이 도로는 한양을 넘나드는 아주 중요한 도로였다.

혜음령을 사이에 두고 장정에 오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녕과 안위, 평안을 빌고 장정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은 지친 심신을 위로 받을 만한 대상물이 필요했을 터인데 용미리 석불입상은 바로 이런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석불왼쪽불상은 사각형 갓을 쓰고 있고 오른쪽불상은 원형 갓을 쓰고 있는데 마을 앞의 장승처럼 각각 여상과 남상을 하고 있다. 오른쪽석불의 합장한 모습은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석불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기라도 하듯, 지극히 내려보면서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다.

석불입상 뒷모습 석불 뒤에서 보면 앞이 훤하게 내려다보여 길손들의 안녕과 평안을 빌었을 것 같다
▲ 석불입상 뒷모습 석불 뒤에서 보면 앞이 훤하게 내려다보여 길손들의 안녕과 평안을 빌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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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에서 만나는 석불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인다. 서산마애석불의 '맥놀이' 미소는 어지러운 세상의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하고 용미리석불은 용미리 묘지에 누워 있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 주고 합장한 두 손 끝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것 같다.

석불입상 앞모습 합장한 두 손으로 무엇을 빌고 있을까?
▲ 석불입상 앞모습 합장한 두 손으로 무엇을 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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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원 석불은 자손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 집안의 평온을 비는 사람들에게 듬직한 존재이고 미륵리 석불은 수많은 물류와 사람이 오간 끝에 퇴적된 문화가 있는 지릅재와 하늘재 옛길의 중심에 서 있어 이 옛길이 죽은 길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길로 만들어 준다.


#옛길#서산마애삼존불#미륵리석불입상#제비원석불#용미리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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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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