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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쯤 출근을 하기 위해 평소처럼 버스를 타고 갔다. 나는 소비에츠카라는 거리에서 내려 곧 푸쉬킨카를 걷게 되었다. 프린트 토너 리필잉크를 사기 위해 규모있는 컴퓨터 가게이며 부품을 파는 곳을 찾았다. 그러나 리필 잉크는 없고 잉크값은 너무 비싸서 다음에 오겠다고 말하고 레닌가와 만나는 소비에츠카 그리고 푸쉬킨카를 지나 니꼴라이브스카야 거리를 걸었다. 20여분 걷는 거리지만 마치 정글을 걷는 기분이다. 길가에 드문드문 아카시아 꽃이 보인다. 한국의 아카시아 꽃처럼 흐드러진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꽃은 무수히 피었지만 꽃 알이 작아 그렇게 흐드러진 느낌은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사진을 찍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지나쳤다.

 

학교에 도착했더니 학교 정문이 닫혔다. 하는 수없이 후문으로 갔다. 이번에는 경찰들이 진입을 막는다. 무슨 일이 난 것인가? 나는 상황을 알 수 없어 나탈리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도 안 가고 바로 끊겼다. 다음은 조교 알라에게 걸었다. 받지 않았다. 재차 걸었을 때 알라는 오늘은 출입이 안 된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왜인가? 매우 궁금하게 묻고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잠깐인데 매우 길게 느껴졌다. 오늘은 학교에 시험이 있어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다고 했다. 놀랍다.

 

 

평상시에는 학생들의 자유분방함에 놀라는 데, 오늘은 시험 보는 날, 대체 무슨 시험을 보기에, 이렇게 삼엄(?)하게 경찰까지 불러 경비를 보게 하는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학교에서 나왔다. 시간은 있고 갈 곳은 많지 않다. 사실 갈 곳이야 너무나 많지만, 아직 잘 알지를 못하고 그들도 뭔가를 가르쳐주거나 하려들지 않는다. 속으로 우리와 많이 다르다 생각한다. 몇 차례 전산실 직원인 니꼴라이에게 함께 구경이라도 좀 하자고 제안도 했으나, 그의 반응은 웃음뿐 적극적이지는 않다. 하는 수 없는 일 아닌가? 의사소통이라도 잘 되면 좀 더 적극적으로 이 것, 저 것 물어가면서 청을 해볼 텐데 아쉬움이 크다. 나는 오늘은 정말 자유롭게 좀 걸어보자 마음을 먹고 학교 옆에 멋지게 흐르는 남강(ЮЖНЫЙ ЬУГ, South river)이라는 강을 보러 갔다.

 

강을 바라보며 걷는 기분이 즐겁다. 참 마음이 편하고 좋다. 모처럼 즐거운 휴가를 얻은 기분이다. 마음이 편해지고 바람과 공기와 하늘의 구름과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하늘의 푸르름과 가로수의 푸르름을 따라 내 마음도 한없이 푸르러지는 느낌이다.

 

정말 아름다운 강이다. 멀리 강변에 백사장이 보인다. 정말 아름답다. 그 백사장 위에 강변에 푸르른 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그 너머에 아름다운 주택들이 멋들어지게 늘어서 있다.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그림이라도 그리고 싶어진다. 나는 하는 수없이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사색의 강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강변길을 막 벗어나서 시내 방향으로 들어서려다. 얼마 전 버스를 탄 적이 있는 곳에 작은 공원이 있었다.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 푸쉬킨이 보였다. 그때는 방향이 달라서 보지 못했던 푸쉬킨의 좌상이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마치 그곳에 어려보이는 눈 맑은 청년이 있었다. 그는 푸쉬킨의 좌상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마치 전형적인 문학청년의 순수가 담긴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푸쉬킨이 맞느냐고 물은 뒤 앞뒤 가리지 않고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알고 묻는 질문에 이어 그에게 촬영까지 부탁하고 폼을 잡았다. 기분이 좋다. 그에게도 한 장 찍어주겠다고 하고 자리를 잡아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전화번호도 받고 이메일도 받았다. 디마(ДИМА, Dima)라고 했다. 그를 새로운 친구로 맞아볼 생각이다. 물론 지나고 보면 알 일이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사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순수한 얼굴과 맑은 눈빛을 믿기로 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사진은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걸어 레닌가를 지나 푸쉬킨카로 접어들었다.

 

레닌과 푸쉬킨이 만나다.

 

레닌과 푸쉬킨이 살았을 때 만났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푸쉬킨은 레닌보다 한참 선배고 레닌이 추구했던 이상사회의 모델에 대해 문학작품을 통해 자꾸 노래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레닌은 푸쉬킨을 배웠을 것이다. 레닌이 막심고리끼가 쓴 <어머니>에 표지 글을 써 준 내용을 보아도 레닌의 사회주의 구현에 있어서 도구로서의 문학이 아닌 생활로서의 문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만의 자유로운 상상이다. 아무튼 그들이 만난 그 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지상낙원의 모습 그대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다분히 꿈꾸어 볼만한 그런 이상적인 곳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지금 내 눈에서 그곳은 안빈낙도 이상이다.

 

길에 접어들기 전 시청사 앞의 레닌을 보았다. 나는 이제 이곳을 다섯 차례 지난다. "레닌! 그대는 참 아름다운 나라, 좋은 나라를 만들었소. 사람들의 나라를 만들었으니, 그대의 이즘과 이념을 떠나 나는 그대를 찬양하고 싶소. 적어도 이 자리에서 만큼은......, 내가 가는 길, 그 어느 곳이 아닌, 적어도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만은......,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을 찬양하리오. 시대가 변해서 당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리고 한 가지 알 것 같소. 왜? 이곳에 시청사 앞에서 자본주의의 물결이 일렁이는 이 순간의 우크라이나에서 당신의 건재한 모습을 볼 수 있는지......, "나는 낯선 이방인이오. 저 멀리 동방에서 왔소이다. 지금 문명이 발달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좀 먹고 살게 된 덕분에 나는 당신의 동지들과 당신이 함께 만들어 놓았던 이 나라에 봉사단원으로 와 있소.  발전된 나라 사람이라고 온 나지만, 당신이 만들어 놓은 이 나라의 현재는 우리네 보다 훨씬 발전된 나라요." 나는 속말을 하였다.

 

나는 사색한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자랑삼아 살고 있고, 여전히 우리네 아름다운 금수강산과 인정이 넘치는 모습이 좋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가며 그리움처럼 마음에 품고 살아갈 인정이 있어 간직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현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가혹한 고통을 개선하고, 그 고통을 긍정의 세계로 그리고 현재의 즐거움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나라는 지금 온통 아파트가 산을 둘러쌓고 있고 그 아파트와 고층건물들이 산을 집어삼킬 기세다. 난 두렵다. 그런 개발의 광풍이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이 자리가 한없이 정말이지 눈물나게 부럽다.

 

거리에 음악이 흐르고 극장 밖은 커피숍은 아름다운 정원이오. 가로수는 우거져 숲길을 걷는 것과 같고, 그 거리에 새들이 사람들과 어우러져 있고, 거기 새가 날듯이 아이들이 사랑스런 모습으로 뛰어놀고, 차가 다니지 않는 사람의 거리......, 아! 나는 이런 곳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구나. 그리고 거리의 화상들이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곳......, 그 자리에 나는 몇 차례 가보았다. 그리고 친구로 사귀고 싶은 화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 다시 오지 않고 있다. 나는 벌써 세 차례나 그를 마나기 위해 갔다. 그러나 그 자리는 누구의 자리가 아닌 모든 사람의 자리였다. 그러니까 모두가 주인인 거리다. 권리금을 받고 사고파는 노점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이곳이 아름다운 사람의 자리인 것은 젊음의 활기가 넘치지만 늙은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약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자리라는 것이다. 내가 가능하다면 우리네 아리랑과 우리네 음악 그리고 우리네 춤을 가지고 이곳에서 이들 거리에 사람들과 한판 놀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마치 길가의 점포와 사람 그리고 건물까지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만 같은 조화로움......, 그 어디에선가 보았던 아마도 많은 책들 속에서 보았을 법하다. 지상낙원의 모습이다. 인구 50만의 아름다운 도시 니꼴라예프! 난 다른 지역에서 먼저 활동하고 있는 단원들이 잠시 잠깐 니꼴라예프에서 머물다 왔다며 "니꼴라예프가 좋다. 너무 좋은 곳이다."는 말을 했을 때, 미심쩍게 들었다. 왜냐하면 아직 아무도 활동한 적이 없고 내가 처음으로 부임하는 곳이기에 그 낯설음만을 생각하고 사실은 홀로 지내야한다는 걱정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 속으로 "정치는 폭력"이라고 자문자답을 했다. 참 엉뚱 맞은 사색이다. 이 순간에 왜 "정치는 폭력"이라고 자문자답을 하는가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확인한다. 그래 맞아! 정치는 폭력의 다른 말이다. 우리가 아는 정치인 레닌은 정치인인가? 사상가인가? 아니면 폭력적인 인간인가? 나는 아직 그를 잘 알지 못한다. 흔히 아는 보통사람들보다 더 모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의 폭력보다 더한 무시무시했던 짜르의 공포정치를......, 왜? 세계의 사람들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은 그 광포한 정치를 이겨내고 새로운 역사를 썼던 레닌은 기억하지 못하는가? 아니 외면하는 것인가? 정치는 폭력이라면 그도 폭력을 행한 사람이 맞다. 다만 광폭한 전제군주에 맞선 폭력으로 그의 희생도 그의 동지들에 희생도 당대의 가치로 보아서는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세월을 자본과 결탁한 전제군주의 공포정치의 통제 속에서 살아야했던 소비에트연방의 국민들은 그를 왜 영웅으로 맞이하였던가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버젓이(?) 이 나라 도시의 중심에 건재한 기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가? 

 

나는 많은 것을 모른다. 허나 보이는 것을 볼 시력 좋은 눈은 갖고 있다. 육신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마음속으로 확인해본다. "그는 문화와 예술을 심어 놓은 사람이구나. 저 사회주의 리더 레닌이 어찌 폭력주의자이겠는가?" 물론 난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다. 반대자들에게 정치적으로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지금 보는 것은 그가 이루어놓은 과거다. 그것이 아름답게 이 도시의 중심에 명맥이 되어 있다. 현재의 것은 지난 과거의 것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은 모두다. 이런 나라에서 이것을 누리는 사람들은 바로 서민과 모든 국민들이다. 그리고 수도 키예프의 혼란스러움은 없다. 정치는 없고 문화 예술의 가치가 인정되는 곳이다. 달리말해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문화 예술의 거리를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한국종합예술학교의 황지우 총장의 사퇴 기자회견문을 보았다. 광주에서 비무장 시위대에 전제군주 '짜르'처럼 광포한 무장을 휘둘렀던 군인들이 있었다. 그처럼 문화판에서 까지 정치가 갖는 폭력성은 다시 어김없이 되살아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씁쓸한 슬픔이 가슴 언저리에 스며들었다. 비무장한 문화에 잘 조직된 국가의 정치폭력이 밀어닥치는구나! 내가 보는 바로 그런 폭력은 후진권력의 세계에서나 보는 것이다. 힘을 가진 절대권력자의 비무장한 문화조직에 대한 실력행사 혹은 폭력을 행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한 짓인가? 다시 말해 비겁한 권력이 되는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60만 대군과 수만의 경찰과 검찰과 법원 등 이루 말로 다 못할 권력을 가진 정치집단이 적어도 문화 부문 만이라도 좀 너그럽고 여유있는 시선으로 볼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물론 그런 기대하는 것도 정신나간 일인지 모르겠다. 이제 알만큼 안 권력이기 때문이다. 포털의 뉴스에서는 국가경쟁력이 30위권에서 20위권으로 진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경쟁력은 선전하는 경쟁력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자긍심 안에 있으리라. 우리 국민 중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의 현재에 대해 자긍심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국가경쟁력이란 외부로 비춰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가 우리는 안 돼! 우리는 어려워! 그런 가운데 선전되는 경쟁력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은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정말로 경쟁력이 있는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국가의 조직폭력은 없다. 나는 믿는다. 국가의 권력이 약자인 국민을 상대로 "네가 치니까? 나도 친다. 그러니 입 다물고 날 따르라!" 전제 군주 짜르의 통치 방식 그리고 전두환과 박정희의 절대 권력이 행했던 것과 뭐가 다른가? 이곳에도 경제난이 있고 수도 키예프에서 간헐적 시위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의 기틀 속에 자본주의 세계로 빠른 속도로 진입하려는 정치인들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평화롭고 국가의 조직폭력에서 해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뿌쉬킨의 말을 믿고 따르자. 그의 노래를 다시 부르자. 지금 생각하면 앞 뒤로 큰 의미를 담은 이발소 시(詩)였던 느낌이 든다. 70년대였다. 그리고 80년대까지 우리네 생활에 함께했던 뿌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어쩌면 이도 그들이 국민을 훈육하겠다는 의도로 퍼뜨린 하나의 바이러스가 아니었나? 나는 지금 뿌쉬킨의 거리에서 뿌쉬킨에게 미안한 사색을 하고 있다. '삶이 죽겠는 사람들이 그 말에 의지하여 슬퍼해서도 노해서도 안 된다고 교육받고 있는 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해피수원뉴스에도 게재 됩니다.


태그:#우크라이나, #니꼴라예프 뿌쉬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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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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