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 중앙수사부(검사장 이인규)에서 수사중인 '박연차 게이트'는 '실패한 로비도 처벌받는 사례'로 기록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해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요청으로 세무조사 무마 로비에 나섰지만, 국세청은 박연차 회장을 거액의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명박 정권의 숨은 실세로 통한 천 회장이 벌인 로비가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천 회장은 세무조사 무마 로비와 관련된 알선수재 혐의로 곧 구속될 위기에 처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최측근까지 동원된 세무조사 무마 로비는 왜 실패한 것일까?
대통령 친구-전직 청와대 고위간부 등 '실세들' 동원해 로비 시도박연차 회장은 지난해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실시되자 대책회의를 직접 챙기면서 세무조사 무마 로비에 적극 나섰다. '마당발'이라는 그의 평가를 입증이라도 하듯 주로 정권 실세들을 통해 전방위 로비에 나선 점이 눈에 띈다.
세무조사 무마 로비에는 천신일 회장과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김정복 전 지방국세청장 등이 동원됐다. 천 회장과 김정복 전 청장은 대책회의에도 직접 참석했다.
여기에다 추 전 비서관이 박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은 뒤 접촉한 정권 실세 이상득·정두언 한나라당 의원까지 포함하면, 로비를 위해 동원한 인맥은 막강하다. 심지어 로비 의혹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님인 건평씨까지 등장한다.
검찰 조사 결과, 천 회장은 박 전 회장의 청탁을 받고 대책회의에 참석한 것은 물론이고, 한상률 전 국세청장 등에게 적극 로비한 정황이 포착됐다. 검찰은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천 회장과 한 전 청장이 수 차례 전화통화한 내역을 확보했다.
두 사람도 세무조사 기간 중 수차례 전화통화한 사실은 인정했다. 이들은 지난해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4TCEO)의 '기후변화 리더십 과정'을 함께 다니면서 인연을 맺었다.
세무조사 초기 '막강 실세들'을 통한 로비가 먹혀드는 듯했다. 지난해 8월말께 박 전 회장측에서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잘 방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고, 세무조사가 진행되자 베이징 올림픽을 이유로 출국했던 박 회장이 같은 해 9월에 귀국한 것도 '로비 효과'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국세청은 2008년 7월부터 11월까지 계획대로 세무조사를 진행했고, 같은 해 11월 25일 박 전 회장을 200억원대의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막강 실세들'을 동원한 로비가 무참하게 실패한 셈이다.
로비 실패하고 천 회장이 청와대로부터 '경고'받은 이유'로비 실패'의 이유를 풀어줄 실마리는 청와대의 움직임에서 발견된다. 천 회장이 박 전 회장의 청탁을 받고 세무조사 무마 로비에 나설 무렵 청와대가 천 회장에게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여권 인사들에 따르면, 청와대측은 박 회장과 '형님 동생' 할 정도로 가까운 천 회장이 국세청의 태광실업 세무조사에 개입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지난해 말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40년 지기인 천 회장에게 직접 '세무조사에 개입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결과적으로 청와대가 천 회장에게 날린 '경고장'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잡기 위해서는 세무조사와 검찰수사를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권력 핵심부의 의지가 강하게 묻어난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태광실업 세무조사→ 박연차 회장 검찰 고발→ 대검 중수부 수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한 '표적사정'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좌파정부 10년 척결'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도 크게 작용했다.
권력 핵심부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세무조사였기 때문에 대통령 친구, 전직 청와대 수석·비서관, 전직 국세청 고위간부, 정권 실세 의원 등을 동원한 로비가 통할 리 없었다. 어쩌면 '실패가 예고된 로비'였는지도 모른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세무조사를 실시하게 되면 거의 대부분이 로비를 시도하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특히 태광실업 세무조사는 (정권 차원에서) 결론이나 판단을 미리 내려놓고 시작한 것이어서 실세들의 로비가 있었다고 중간에 그만두거나 조사결과를 축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신일 먼저 구속은 노무현 사법처리 위한 '명분쌓기'?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를 미룬 것도 '표적사정 의혹'과 무관하지 않다. 검찰은 지난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을 소환조사한 뒤 20일이 넘도록 사법처리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는 부인 권양숙씨 재소환조사를 이유로 대고 있지만, 살아있는 권력인 천 회장을 먼저 구속한 뒤 노 전 대통령을 사법처리 하기 위한 '명분쌓기' 혹은 '시간벌기'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 '노무현 불구속 기소' 쪽으로 흐르던 검찰 내부기류가 '구속 기소'로 바뀌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천 회장을 구속한 마당에 물러난 권력을 구속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검찰이 법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큰 알선수재 혐의, 박연차 게이트와 직접 상관이 없는 조세 포탈 혐의를 천 회장에게 적용하면서까지 구속시키려는 것도 이런 기류와 맞닿아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