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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9일 밤. 여의도에 있는 '한국방송작가협회'의 한 강의실. 준비된 의자를 빠짐없이 채우고, 그도 모자라 책상 위에 올라가 다닥다닥 붙어 앉고, 그러고도 남은 이들은 서로 어깨를 붙이고 섰다. 참여 인원 170여 명. KBS 구성작가협의회가 마련한 긴급총회 자리였다.

 
지천명이 넘은 대선배들부터 대학을 갓 졸업한 막내까지. 바쁘기로, 한자리에 모으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작가들이 한 방에 모여 서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우리도 스스로 놀란 풍경.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절박하게 한 것일까.
 
그 뜨거웠던 밤, 긴급 총회의 풍경
 
그날 안건은 KBS의 '작가퇴출계획', 이른바 'PD집필제'였다. 4월 말, KBS는 지상파 최초로 PD집필제를 시행하겠다며, 그 이유로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할 시사정보 프로그램의 대본이 현장을 직접 취재하지 않은 작가에 의해 집필됨으로써 프로그램의 객관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작가들은 분노했다. 총회가 열리는 작은 방은 열기로 가득 찼다. 작가가 원고를 쓰면 객관성이 떨어진다니, 얼마나 오만하고 무지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지난 몇 개월 새 두 차례에 걸쳐 원고료를 삭감할 때도 'KBS가 워낙 어려우니까'하고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나가라는 말인가. 어떻게 한마디 상의는커녕 통보도 없이 PD집필제란 이름의 작가퇴출계획을 밀어붙이는가. 4시간 가까이 뜨거운 토론이 오갔다.
 
주옥같은 다큐멘터리들을 남긴 한 대선배는 역설했다.
 
"우리는 영상을 만들고 그 영상을 바탕으로 한 글을 쓰는 데 훈련된 전문가 집단입니다. 이문열도, 황석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김아무개 작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늘 씩씩한 웃음소리를 달고 다니는, '갸는 성격도 좋은데 일도 진짜 열심히 한데이'라는 평을 듣는 작가였다. 그런데 그날,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PD집필제가 시행되는 11개 프로그램 중 하나에서 일하는 5년차라고 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쓴 무엇이 방송을 통해 세상에 나가는 순간이면, 너무나 긴장되고 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설렙니다. 5년쯤 됐으면 적응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매번 그래요. 그런데 지금 보니 제가 지금까지 거쳐 온 모든 프로그램이 다 PD집필제 시행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네요. 그렇다면 그렇게 가슴 설레며 해온 작가라는 일이 사실은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는 얘기잖아요. 그 프로그램들에서 작가가 없어지면, 결국 제가 섰던 자리들이 다 사라지는 것이잖아요. 그럼 저는 지금까지 뭘 한 건가요. 대체 저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밤을 새가며 일한 것인가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의 눈물. 모두 뭉클해졌다.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 그 가슴 뛰는 일을 못하게 되는 건가, 그냥 이렇게 사라지게 되는 걸까, 참 무섭고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많은 선후배님들이 방안 가득 모인 것을 보니, 용기가 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PD집필제란 이름의 작가퇴출계획을 통해 본 KBS 풍경
 
지난해 가을, KBS 라디오 제작본부 사무실. 새로 취임한 사장단이 일선 제작진들과 인사를 하기 위해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한 부장급 간부가 작가들에게 부탁을 해왔다. 잠시만 사무실 밖에 나가 있어 달라는 것. 알고 보니, 앞서 TV 제작본부를 방문했던 새 사장이 '작가가 왜 이렇게 많냐'고 했다는 것이다. 또 그런 반응이 나오면 다들 곤란해지니 좀 피해가자는 얘기였다. 결국 새 사장단이 왔다가는 동안, 작가들은 복도 한쪽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벽장 속에 숨겨둔 사생아인가.' 라디오 작가들은 그날 큰 자괴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비이락처럼 PD집필제라는 것이 도입되었다. 이후 속속 기묘한 풍경들이 나타났다. PD집필제가 시행되는 한 프로그램. 100% PD집필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몇 명의 작가들이 일하고 있다. 그런데 프로그램 끝에 올라가는 스태프 스크롤을 보면, 작가가 없다. 대신 '스페셜 라이터' 또는 '스페셜 리서처'라는 방송 역사상 유래가 없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작가를 라이터라 부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작가를 작가라 부르지 못하는 웃지 못할 현실. 안에는 분명 존재하는데 밖으로는 쉬쉬하는, 작가는 투명인간이란 말인가.
 

PD들은 PD들대로 상처를 입었다.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PD집필제에 대한 사전 의견수렴과정이 없었을 뿐더러, PD집필을 강제로 할당하는 것 자체가 제작 자율성 침해라는 것이다. 프로그램에 따라, 강하고 희귀한 사례를 많이 발굴해야 되는 프로그램이라면 그런 면에 강한 작가들을 대거 등용하고, 시적인 내레이션이 필요한 프로그램이라면 단 한 명의 '글발 좋은 작가'를 쓸 것이고, 미술 전문 프로그램이라면 작가 대신 아트디렉터를 고용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더 좋은 프로그램'라는 당위를 위한 자율성의 영역이다.
 
더구나 PD집필제 시행의 또 다른 이유로 경영진은 'PD들의 역량 강화'를 들었다. 그렇다면 '아나운서 역량 강화'나 '기자 역량 강화', '기술직 역량 강화'는 왜 하지 않는가. PD들의 역량이 부족해서, PD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그동안 작가에게 의존해 온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날 프로그램 하나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60분짜리 다큐멘터리 한 편을 제작하는 데, 과거에는 촬영원본이 30분짜리 유매틱 테이프 20개~30개 정도에 그쳤다면, 지금은 60분짜리 HDV 테이프 100개를 넘는 일이 허다하다. 한 장면을 얻는 방식 자체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피사체에게 "이쪽으로 걸어오세요, 저쪽을 보세요"하는 식으로 촬영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피사체가 마음을 움직여 진짜로 올 때까지 상황을 세팅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한 장면을 얻어낸다. 그렇게 힘들게 얻어낸 '진짜'가 아니라면 시청자에게 바로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저렇게 말해주세요'해서 '따낸' 인터뷰는 이제 그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다. 낡은 매뉴얼로는 지금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방송에는 노동집약적인 면이 있다. 더 뛰어난, 더 많은 인재가 투입될수록 더 좋은 방송이 나온다. PD는 집필뿐 아니라 촬영도, 성우도, 더빙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왜 굳이 노련한 카메라맨과, 목소리 좋은 성우와, 숙련된 더빙감독을 쓰는가. 전문적인 인재풀을 총동원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아니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프로그램은 한 사람이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팀'이 움직여 만들어진다. 더구나 '업계 용어'로 '아이템 찾는다'고 하는 기획부터 사전조사를 하고, 사례를 발굴하고, 섭외를 하고, 촬영 전 구성을 하고, 촬영 후에는 편집 구성을 하는 그 모든 과정을 PD와 함께하는, 그리고 마지막에 원고라는 체리를 얹는 작가는, PD라는 엔진 옆에 달린 또 하나의 엔진이다. 그런데 지금 KBS가 그 엔진을 뜯어내려 하고 있다.
 
회사 어렵다고 핸들·엔진 뗀 차 팔겠다고?
 
이른바 PD집필제라는 작가퇴출계획의 또 다른 목표는 경비 절감이다. 위기가 닥쳐오면 여러 가지 타개책이 필요할 것이다. 이전 경영진이 부실 경영을 이유로 경질되었으니 다급한 사정도 있을 것이다. 흑자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경영위기를 타개하는 KBS의 방식이 참 대담하고 과감하다. 임직원의 임금은 보전하는 대신, 방송의 질 저하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제작비를 줄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대체 어떤 회사가 돈벌이가 안 된다고 제품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선택을 하는가. 어떤 자동차 회사가 경제가 어렵다고, 핸들 떼고 엔진 떼고 자동차를 파는가. 공영방송으로서 시청자를 고려했다기보다는 지극히 공급자 위주의 솔루션을 선택한 듯 보이는 KBS는, 현재 수신료 인상을 준비 중이다.
 
비정규직의 임금에 먼저 손을 댄 것도 공영방송답지 못하다. 프리랜서인 작가들의 원고료를 삭감하는 것에서 나아가, 일자리를 줄이는 방식으로 제작비 절감에 나선 KBS. 먼저 약자의 편에 서야 마땅한 공영방송의 기본적인 정의감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공정', '공익'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KBS는, 이번 작가퇴출을 통해 어떤 공정성을 획득하고 얼마만큼 사회적 공익에 기여하게 될까.
 
다큐 5년차, 김 작가의 꿈은 이루어질까
 
다시 김 작가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수요일에 방송을 하는 그녀는 목요일에 현장 답사를 가고, 금요일에 촬영구성안을 써서, 촬영이 진행되는 주말에는 다음 아이템을 찾고, 월요일에는 프리뷰와 편집구성 회의, 화요일에 데스크 시사를 거쳐, 수요일에 원고를 쓰고 방송을 낸다. 같은 팀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그래도 주말이 한가해서 미안하다는 그녀에게 낯간지러운 질문을 해봤다. '김 작가는 꿈이 뭐예요?'
 
"다큐멘터리 쓰면서 살고 싶어요. 정말로요. 돈은 별로 못 벌더라도 다큐멘터리를 쓰면서 사는 게 꿈이에요."
 
김 작가는 프리랜서다. 물론 그런 일은 드물지만, 오늘 전화해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해도, 억울하지만 별 방법이 없다. 노동의 내용도, 강도도 비슷한, 그러나 정규직인 PD에 비하면 보수도 영 신통치가 못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뜨겁게, 신나게 일해 왔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 프로그램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작가라는 일이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혼을 증명하기 위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김 작가의 꿈은 소중하다. 이 사회의 모든 꿈꾸는 약자들이 소중하듯이. 그런데 지금 그 꿈이 위태롭다. 김 작가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그녀의 꿈을 지켜줄 수 있을까.

태그:#PD집필제, #KBS, #구성작가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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