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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뻑'하면 '내 살아온 얘길 소설로 쓰면 열두 권 남짓은 쓰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셨다. 당시 머릴 쥐어뜯으며 글을 쓰겠다고 책상머리에 앉아있던 난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럼 아버지가 쓰시든가!'하며 못된 딸년 노릇을 톡톡히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버진 소설을 쓰셨다. 그러나 그 분량은 아버지의 장담대로 열두 권 분량은커녕 A4용지로 열두 장도 채 안 됐고, 그것도 완성을 못 하시고 어느 날 슬그머니 접으셨다. 처음에 화날 땐 뭐라 했지만, 이후에 아버지의 치기가 귀여워, 몇 번을 비아냥거림이 아닌 진심으로 여러 번 '글을 쓰시라' 권유했는데, 나한텐 '그러마'하시고 결국엔 한 장도 남겨놓지 않으셨다.

 

작가지망생을 교육하는 곳에서 면접을 하다보면 많은 지망생들이 드라마를 쓰려는 이유가 '저 정도 드라마는 나도 쓰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나는 웃으며 '아, 네'하며 가차 없이 낙제점을 준다. 단순히 내가 하는 일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되겠다며 써보지도 않은 증거를 잡은 이유다.

 

써본 이는 안다. 어떠한 이야기도 잘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음을. 그래서 먼저 이 길을 간 선배에 대한, 같이 이 길을 가는 동료에 대한, 이 가시밭길을 같이 걷겠다고 하는 후배가, 마냥 안쓰러워지기만 하는 것도 '이 작업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치기스러워' 보이는, KBS PD집필제

 

 

최근 KBS가 PD집필제를 실시한다 공포하고, 일부는 실시했다. 말로는 '피디 역량 강화'지만, 본질은 '사장 재선임을 염두에 둔, 혹은 선임 후 임기 내 한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적자구조 탈피'로 보인다.

 

피디는 피디인데 '글로 역량을 문제 삼겠다'는 억지로 피디의 입을 틀어막고,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노하우를 축적한 수백의 작가들 목을 일시에 날려버린 이 사태는 소설 열두 권 분량을 쓰시겠다고 덤빈 내 아버지처럼, 한 줄 글도 안 써보고 수십 시간을 때우겠다고 달려든 수많은 지망생들처럼 치기스러워 보인다.

 

지금은 힘들어도 미래를 위한 투자로 문화콘텐츠진흥원을 만든 정부정책, 방송문화와 KBS의 미래에도 반하는 이 정책이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조용히 치러야 할 사장 임기 내의 한시적 눈에 보이는 효과'가 아닌 누구나 공감하는 '적자탈피'란 경제논리로 위장된다면 아이디어를 얹어줄 수도 있다.

 

집을 지을 때도 무조건 돈이 먼저면 기술자 대신 잡부 쓰면 되고, 철근 까짓것 빼도 일단 잠시 잠깐은 집 모양은 나니 괜찮다. 집과 방송국이 다른 예라면, 값싸게 제작되는 힘없는 교양다큐 부문에 칼날을 댈 것이 아니라, 비싼 돈이 드는 드라마, 예능에 먼저 칼날을 대면된다.

 

개런티 상위그룹 작가, 연기자, 예능인 100여 명 방송 정지. 연봉 높은 순으로 임직원부터 칼을 대는 것은 남 보기에도 명분 있고 참 좋다. 여러 사람 칼 안 대고 돈은 줄이고. 아예, 제작금지도 좋다. 방송사를 전파사로 취급해서 뭐든 틀기만 하면 된다면 재방, 삼방 만들어 놓은 것 계속 돌리면 된다.

 

공영성 속에서 십여 년 집필해온 나는 겁이 난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의 것을 충족할 순 있지만, 조용히 치르진 못할 것이다. 그건 정말 상관없고, '당장은 몰라도 나중엔, 결국 손실이 더 커지고, 질적 저하, 미래 없는 임시방편 등등'의 생각이 든다면, 다큐 작가의 성명서 맨 마지막 말처럼, '대화하라'. 걔들이 경영에 대해서 뭘 아냐고? 부정적인 맘이 들어도, 한솥밥 먹어온 작가들에게도 애사심은 있고 대화가 무슨 소용이야 해도 여러 사람이 머릴 맞대면, 십시일반이라고 시너지가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근 십여 년 시청률만큼 중시돼온 KBS의 공영성 속에서 십여 년 박해받지 않고 집필을 해온 나는 겁이 난다. 혹여, 이 글로 KBS 경영진에 밉보여 글쓰기를 박탈당하지 않을까. 밥그릇이 걱정되는 것도 진정이다.

 

그러나 경영진의 권력이란 게 임기 내뿐임을 오랜 경험으로 아는지라, 짧게는 몇 달 길게는 2~3년 소심하게 고개 숙이고 있지, 한다.

 

일개 드라마작가의 말이, 거대한 방송사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때려치울까 하는 부정적인 맘이 쓰는 내내 들지만, 그래도 다 한솥밥 먹는 사람들인데 서로 배려하는 맘이 왜 없겠나, 의견을 솔직히 드러내고 같이 살아보자 머릴 맞대면 그래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해피엔딩을 꿈꾸는 드라마작가의 직업병이 글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게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향신문> 6월3일자에도 실렸습니다. 


태그:#PD집필제,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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