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종로 근처에서 자주 술을 마신다. 거리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생맥주 한 잔 하고, 피맛골로 들어가 동동주에 파전을 곁들여 먹는다. 모든 음주가 끝이 나면 보신각을 뒤로 한 채 담배 한 대 태우는 게 그 날의 마무리. 대학 때부터 단짝이었던 우리는 십 년 가까이 같은 곳에서 엇비슷한 행로를 반복해왔다.
시꺼먼 어둠 속으로 담배 연기를 날려 보내다가 하늘 향해 끝도 없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빌딩 속 불 켜진 사무실을 보고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도대체 늦은 밤까지 무슨 일을 저렇게 하는 걸까. 종각 지하철 입구 방면은 언제나 붐볐지만, 횡단보도가 있는 쪽은 비교적 한산했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보신각 앞에는 의자가 몇 개 있었고, 때문에 근처에 서성이고 있으면 항상 연인들의 낯간지러운 연애행각이나 이따금씩 보이는 술주정꾼의 하소연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재미가 의외로 쏠쏠했다. 늦은 밤의 종로와 광화문 주변은 낭만을 꿈꾸고 실천할 수 있을 만큼 아늑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곳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종로 거리는 경찰들 것이 되어버렸다. 길게 늘어선 버스행렬, 두껍게 진을 치고서 무표정하게 시민 앞에 선 전경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아주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로는 완전히 변했다. 다른 곳으로 탈바꿈했다.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그 거리를 보기 힘들게 되었다. 피맛골의 주점은 하나둘 쫓겨나고 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우리는 사는 맛도, 술 맛도 찾지 못한 채로 또 다른 곳을 헤매야 했다. 왠지 서글펐다.
공포의 거리, 추적자와 도망자 바보 · 천치를 뜻하는 영어 단어 'idiot'은 공적인 것에 무관심한 자를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 남성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이 작은 책은 지난 1년 반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 사회공동체에서 바보 · 천치가 되지 않으려는 저자의 자구(自救)행위의 산물이다.-첫머리에, 〈보노보 찬가〉(조국 지음)중에서<한겨레>,<경향신문>,<시사IN>등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온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가 최근 <보노보 찬가>를 냈다. '파니스쿠스(paniscus)'라는 종명(種名)을 가진 보노보는 침팬지와 구분되는 행동양식을 지닌 영장류 동물이다. 침팬지가 수컷 중심의 수직적 서열구조, 폭력을 수반한 권력투쟁, 전쟁, 유아살해 등 끔찍한 행태를 보이는 반면, 보노보는 누구 하나 소외시키지 않으며 평등한 문화를 유지한다. 1960년대 반전평화운동의 슬로건처럼 그들은 '전쟁이 아니라 연애'를 한다.
저자는 온순한 이 동물 집단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맥을 짚는다. 더불어 자발적으로 타올랐던 촛불에 대한 헌사이고 송가인 동시에 낡은 깃발에게 성찰과 혁신을 요구하는 고언도 담겨있다.
이 책은 촛불집회를 전후로 한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을 꼬집어낼 뿐 아니라, 대안 없이 그저 비판에만 몰두하거나 현실성 없이 너무 허황된 논리만 펼치는 진보세력에 대한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법을 가르치는 저자는 상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향을 꿈꾸지 않는다. 현실 가능한, 그리고 우리가 충분히 누릴 수 있을 만한 대안과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물타기에 급급하던 몇몇 진보세력에 대한 냉혹하지만 진정성이 담긴 채찍질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사회소수자에 대한 법적 제도 개선 마련 요구 및 해결 방안 등 허망한 감상에만 그치지 않는 냉철한 주장이 돋보인다.
이 중 집회의 자유를 언급하는데 특히 눈길이 더 갔다. 최근 각종 언론을 통해 '도심집회 불허가 명백한 위헌'이라고 말하는데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집회 시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사전에 봉쇄하는 것에 반대한다.
또한 폭력집회를 빌미로 집회 자체를 해산시키려는 정부와 경찰의 행동에 경악한다. 사실 이 문제는 지난 MBC TV PD수첩이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지난 5월 1일 노동절 행사와 2일 촛불 1주년 기념집회에서 경찰이 보여준 공권력 과잉이 가히 엽기적이었기 때문이다.
폭력 사태를 막는단 빌미로 사전에 집회 자체를 막고, 전혀 근거 없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상당수 단체에 지원을 끊는 등 그들의 공격성은 공포 영화 속 살인마, 괴물을 능가한다. 제이슨이나 프레디, 그리고 처녀귀신이나 저승사자를 보고도 사람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이유는 현실의 그들이 훨씬 더 고단수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시민단체의 말 하나하나를 '정치적 발언' 이라는 이유로 가로 막고, 폭력집회를 막겠다며 일반 시민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인 관광객에까지 무차별 폭행을 휘두르는 경찰의 모습에서는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민들의 호소를 비웃는 것뿐 아니라, 집회참가자와 시민들을 죽일 듯 노려보는 검은 제복의 그들은 더 이상 민중의 지팡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차라리 권력의 지팡이라면 모를까.
저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를 내자폭력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폭발을 유도하는데서 시작한다.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은 약소 세력을 살살 건드려가며 토끼몰이 하듯 통제하고 억압한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어 분노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꼭두각시 인형이 아닌 이상 누군가는 폭발하게 되어있고, 그러면 경찰은 그 때를 노린다. 기회다 싶은 경찰은 사회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사람들의 목을 조인다. 무차별 폭력에도 그들은 묵묵부답, 그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하이파이브 하며 더 많이 때리라고, 더 혹독하게 다루라고 부추긴다. 이건 전시 상황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광장의 모든 사람이 그저 '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단 소리다. 제 2의, 제 3의 '사무라이 조'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공포 사회가, 바로 우리가 두 발을 내딛고 사는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믿기지 않았다.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는 경찰 관계자의 말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앞으로도 선의의 피해자가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증거이니까. 영화 <빈집>(김기덕 감독)의 마지막에는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문구가 나온다. '내가 있는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눈을 혹시 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피부로 느껴지는 이 억압과 공포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자신과 사회 속에는 이미 침팬지가 너무도 많다. 이제 우리 자신과 사회 속에 움츠려 있는 보노보를 찾고 키울 시간이다. 침팬지 속성과 침팬지 세상의 원리를 정확히 직시하는 보노보, 침팬지의 공격에 대해서는 정당방위로 받아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보노보, 이와 동시에 보노보처럼 법 · 제도 · 문화를 구상하고 모색하는 보노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보노보들의 즐거운 어울림과 신나는 연대가 필요하다. -〈들어가는 말〉 중에서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마법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속에 우리가 필요한 모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198쪽, <맺음말을 대신하여〉중에서<보노보 찬가>는 제목처럼 즐겁게 어울리고 신나게 연대하며, 그 어떤 공격에도 정당방위로 맞서는 떳떳한 보노보들이 되자고 제안한다. 거대 세력이 내미는 검은 유혹, 그 폭력의 법칙에 순순히 넘어가지는 말자는 것. 정글 같은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한 때 유행했던 책 제목처럼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암흑기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는 바로 그것, 그러니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날이 어둡고 아무리 추워도 끝끝내 아침은 온다. 경찰과 버스행렬이 없는, 다시 낭만이 가득한 종로 거리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