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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넓다. 한나라당의 위기가 그렇다.


위기는 잠시의 긴장으로 수습되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깊다. 약간의 조치로 풀릴 수 없을 듯하다. 그 정도로 넓다. 하지만 깊고, 넓은 위기 앞에 여권은 한가하다. 보이는 꼴은 마치 치열하다. 내뱉는 말은 언뜻 비장하다. 그러나 쇄신은 그 뿐이다. 도대체 가닥을 못 잡고 있다. 도무지 진전이 없다.

 

한나라당, 5년 만에 지지도에서 민주당에 뒤지다

 

한나라당이 오랜만에 뒤졌다. 21.1% 대 23%, 한국리서치의 정당 지지도 조사 결과다. 한나라당 쇄신특위가 의뢰했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부정하고 싶던 사실이 허무하게 확인된 것이다. 지지도 역전, 이젠 누구도 부정할 수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이다.

 

여론조사는 수치방정식이 아니다. 흐름방정식이다. 전통적으로 한나라당은 50대 이상 노년층에서 강세다. 노년층은 투표율이 매우 높다. 한나라당 반대는 20~30대에서 많으나, 이들은 투표율이 낮다. 지난 총선의 유권자 비율에서 20~30대가 전체의 약 42%, 50대 이상이 약 34%를 차지했다. 그러나 투표자에선 비중이 역전됐다. 20~30대가 약 29%, 50대 이상이 약 47%를 차지했다. 이것이 2004년 4월의 17대 총선 후부터 이어진 한나라당 강세의 뒷배였다. 이것이 변했다. 4․29 재·보궐 선거는 정당 지지층별 투표율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20~30대와 50대 이상의 투표율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한나라당은 지지도에서 민주당을 3배 가까이 앞섰다. 한 달 뒤 1.9~8.4%P 차이로 뒤집혔다. 광범위한 반MB, 반여 정서가 재·보궐 선거 결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일파(一波)였다. 여권이 놀라기엔 충분한 위용이었다. 당연히 왕배덕배 잘잘못을 가리느라 따따부따했다. 친이·친박 간에 갈등이 재연했다. 이파(二波)였다. 으레 그랬듯 어김없이 친박 지지층이 이탈했다. 그리고 마침내 초대형 허리케인이 들이닥쳤다. 노무현 추모 물결이 여권을 강타했다. 한나라당 지지도의 절반 가까이 날아가 버렸다. 삼파(三波)는 쓰나미(tsunami)였다.

 

엘리어트의 시어대로, 황무지에게 4월은 잔인하다. 죽은 땅에 꽃을 피워내기 때문이다. 추억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에게 5월은 잔인했다. 아픈 상처를 덧나게 했다. 시름 깊게 만들었다. 송그린 민주당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황무지에게 겨울이 오히려 따듯했듯, 한나라당에겐 촛불국면이 차라리 편안했으리라.

 

"새벽에 천둥·번개가 무섭게 치더니 조용해졌다"

 

다른 시좌(視座)도 있다. "새벽에 천둥·번개가 무섭게 치더니 조용해졌다." 박희태 대표의 말이다. 매혹적인 자기 셈법을 담고 있다. 재·보궐 선거 패배는 국민들이 잠깐 솟본 결과다. 친이·친박 갈등은 대수로운 게 아니다. 어차피 큰 선거 때엔 뭉칠 거 아닌가. 노무현 추모 열기도 한바탕의 회오리에 그칠 것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을 '장악'했다. 한나라당은 지난 대선에서 26%P, 총선에서 13.8%P 우세를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최근, 수도권에서 한나라당 지지도는 민주당에게 추월당했다. 6.7%P(리서치플러스), 6.5%P(윈지코리아컨설팅), 9.9%P(KSOI) 차이로 뒤졌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영남을 '독점'했다. 대선 때 PK에서 55.6%, TK에서 71.0% 득표했다. 총선 때 각각 50.7%, 57.7% 얻었다. 이런 독점성이 많이 무뎌졌다. 최근 한나라당 지지도는 PK에서 24~27%, TK에서 34~44%를 보이고 있다. PK에서의 낙폭이 더 크다. 현 정부에서 TK가 인사를 독식하고 있다는 비판을 감안할 때 PK의 지지도 하락을 일시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대기업·부자정당(24.6%), 보수정당(24.2%), 영남정당(20.0%)이다. 지난 대선의 투표자를 기준으로 보면, 영남(527만)은 호남(259만)에 비해 2배가 넘는다. 후보 득표에서도 이명박 후보가 영남에서 얻는 표는 정동영이 호남에서 얻은 표보다 111만이나 많았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이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대쌍적(對雙的) 구도 하에서라면 한나라당이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절대다수를 소외시키는 사회경제적 덫!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보수 성향과 진보 성향은 각각 47.4%, 44.5%로 나타났다. 진보 성향의 유권자는 기권율이 높다. 진보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과소 대표되고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보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부자의 지지다. 법 개정 이전에 종합부동산세를 내는 가구는 전체의 2% 정도였다. 한 추계에 따르면, 재산이 10억 이상 되는 가구는 3% 내외다. 따라서 부자정당 이미지는 절대 다수를 소외시키는 사회경제적 덫이다.

 

또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분향소를 찾은 사람의 수가 5월 29일 영결식까지 500만에 달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가 얻은 표가 617만이었다. 이를 통해 조문객 수의 엄청난 규모와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이 기저에 깔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다.

 

노 전 대통령 추모로 표출된 민심은 정치보복, 검찰수사, 민주주의 후퇴 등에 대한 불만을 담고 있다. 일종의 정치적 반발인 것이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는다. 850만 비정규직의 노동조건과 삶의 질은 날로 열악해지고 있다. 2009년 3월 전체 노동자 1608만 명 중 427만 명(26.5%)이 저임금 계층이고 이 중 380만 명이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이는 전체 비정규직의 절반(45.2%)에 육박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의 분석이다.

 

법정 최저임금 미달자가 전체의 13.8%인 222만 명이다. 지난해 8월 이후 반년 사이에 47만 명 늘어났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올 들어 매달 1만 명씩 늘고 있다. 4월 말 기준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157만 3000명이다. 이 제도가 2000년 처음 도입된 이래 가장 많은 수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IMF의 예측대로 -4%로 하락한다면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근로빈곤층'이 대폭 늘어나게 된다. 2007년 156만 명에서 올해 24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근로빈곤층과 함께 거주하는 근로무능력 가족을 포함하는 위기계층은 2007년 대비 120만 명이 더 늘어나는 것으로 추정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예측이다. 이렇게 되면 2007년 282만 명에서 올해 말 402만 명으로 급증하게 되는 셈이다.

 

1월 현재 558만 7000명의 자영업자, 특히 고용원 없이 혼자서 영업하는 412만 명은 폐업과 소득 감소에 시달리고 있다. 빈부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1990년 통계 작성 이래 지니계수는 올해 최악이다. 일자리는 줄고, 부채는 늘어간다. 작년의 물가상승률은 4.7%로 전년에 비해 2.2%P 올랐다. OECD 국가 중 6번째 높은 수치다. 한길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MB정부가 부자 특권층 위주의 정책을 편 것이 여권 위기의 원인이라는 데에 국민의 71%가 동의를 표했다.

 

심연은 깊고, 지평은 넓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형편이 추모 열기의 밑바탕이다. 그래서 '노무현 추모'는 사건(event)이 아니라 운동(movement)이었다. 여론의 70%가 MB의 국정기조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이의 표현이다. 한나라당의 정책은 시종일관 이런 흐름에 역주행하고 있다. 게다가 친이·친박 대립은 구조적 상수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5월 이전 수준의 지지도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여권은 지금 쇄신을 둘러싸고 극심한 혼란을 보이고 있다. 정책레짐(policy regime)을 바꾸자는 쇄신의 벼리는 어느새 실종됐다. 책임 전가의 덮어씌우기 게임, 상대를 나쁘게 규정하는 스핀 워(spin war)에 빠져 있다. 이런 정도의 앙상한 쇄신이라면 한나라당이 대선·총선 때의 우위를 되찾기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기 마련. 한나라당 지지층이 다시 결집할 수는 있다. 보수·노년층과 영남권이 위기의식 아래 친여로 뭉치는 것이다. 여기에 북풍 변수는 호재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지지도를 회복할 것이다.

 

또 민주당이 지나치게 '노무현 현상'에 편승하려 하거나, 사회경제적 이슈를 담아내지 못하고 정치투쟁에만 매몰되는 것도 한나라당으로선 희원이다. 친노 세력과 민주당 간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는 것도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선 교실 내 모든 갈등을 선생님이 일거에 해결한다.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보수의 세계관, 한나라당의 현실이다. 지금 한나라당은 선생님, 즉 MB 눈치 살피기에 바쁘다. 어쩌면 태산명동 끝에 서일필로 끝날 지도….

 

무릇 심연은 깊고, 지평은 넓다. 한나라당의 위기가 바로 그렇다.

덧붙이는 글 | 이철희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수석 애널리스트로서 여론 동향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서로 <1인자를 만든 2인자들>, <어드바이스 파트너> 등이 있다.


태그:#한나라당, #쇄신, #노무현,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이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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