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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간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상점 위에 매달거나 앞에 놓아두는 장치, 또는 회사나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두는 시설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 얼굴에 비유해서 사용하기도 하지요.  

간판은 상점·회사·관공서 등의 이름과 취급하는 상품이나 품목을 써서 사람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놓는데요. 단순히 알리는 데 이용했던 옛날과 달리 요즘엔 세련된 디자인과 그림이 들어가, 예술이라는 생각에 감탄사가 나오는 간판도 자주 눈에 띕니다.   

거리에 나가면 초대형 간판에서부터 붕어빵집 간판까지 다양한 간판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하면서도 각자 특색이 있어 멋과 웃음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공해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는데요. 문화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부작용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간판에는 그 시대의 문화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담겨 있지요. 그래서 도시 발전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요. 50년대 거리사진과 최근의 거리사진에 등장하는 간판을 비교해보면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진하게 나누는 여관?

째보선창 부근에 있는 ‘진한여관’ 간판. 아무리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도 주인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째보선창 부근에 있는 ‘진한여관’ 간판. 아무리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도 주인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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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째보선창 부근에 있는 여관 간판입니다. 부족국가 이름을 붙였을 것 같지는 않고, '사랑을 진하게 나누는 여관'이라는 뜻인지, '진안'을 '진한'으로 잘 못 쓴 것인지, 여관 주인 부부가 남편은 '진' 씨이고 부인은 '한' 씨여서 '진한'이라고 했는지, 상상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다 저녁을 먹고 부둣가에 산책하러 나가면, '고군산여인숙', '한산여인숙' 등 생선이나 젓갈을 사러온 인근 섬과 충청도 사람들이 묵었던 여인숙 간판들이 백열등 아래에서 졸고 있어 '파시 때는 강아지도 1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흥청거렸던 동네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50∼60년대까지만 해도 여관에서는 손님에게 밥을 제공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막집 분위기가 많이 났지요. 점치는 사람들이 여관이나 여인숙에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묵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갔던 기억이 새롭네요. 

친하게 지내던 급우 아버지가 전남 광주와 군산에서 호텔과 여관을 경영했기 때문에 여관 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요.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럽고 개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관에서 아침을 먹고 왔다는 외당숙에게 "여관 밥은 비쌍게 세 끼니 밥은 집이 와서 먹어!"라고 하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일면식도 없으면서 한 집(여관)에서 먹고 잔다는 이유로 옆방 손님과 흉허물없이 지내고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수작을 거는 아저씨도 있었는데요.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고 여관 주변에 다양한 식당이 개업하면서 손님들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불러 먹기 시작하자 점차 그러한 풍경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관을 경영하는 지인의 말을 빌리면 출장을 오거나 가족이 묵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나 이상한 관계로 보이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예전에는 하룻밤을 자고 가는 손님이 많았고 여관 주인도 그래 주길 원했는데, 지금은 길어야 몇 시간 머물다 간다고 하더군요.

고향동네 이발소

고향동네 이발소. 엄니가 도장밥 자국에 마늘을 문지르니까 아프다고 고성을 지르며 난리를 피던 ‘개똥이’(계동이)를 떠오르게 하는 사진입니다. 지금은 육십 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됐겠네요.
 고향동네 이발소. 엄니가 도장밥 자국에 마늘을 문지르니까 아프다고 고성을 지르며 난리를 피던 ‘개똥이’(계동이)를 떠오르게 하는 사진입니다. 지금은 육십 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됐겠네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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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어난 고향동네 이발소 간판입니다. 철부지시절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때는 이발소에 있는 모든 게 신기하고 멋있고 재미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와 고(故) 김진규(영화배우)씨 사진은 볼수록 멋있었고, 이발사가 면도칼을 문지르는 시커먼 가죽끈조차도 신기하게 보였으니까요.

특히 이발소 입구에서 쉬지 않고 돌아가는 둥근 통은 저와 동네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도 모르는 수수께끼였습니다. 파란색과 붉은색 줄이 통 밑에서 계속 위로 올라오면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는데요. 의미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유럽에서는 18세기까지만 해도 이발사가 외과의사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이발소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몸에서 피를 빼는 것으로 건강을 지켰는데, 이발사가 피를 빼는 방법을 익혀 치료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발사는 자신이 피 빼는 기술을 습득했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고 동맥을 의미하는 빨간색, 정맥을 의미하는 파란색, 붕대를 의미하는 하얀색을 둥근 막대에 그려 문에 내걸었다고 하는데요. 널리 퍼지면서 세계 공통 표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역사적 바탕이 있기 때문에 식당 등 다른 업소에 비해 이용업소가 위생에 관심이 많고, 검열도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모양입니다. 이발소에 가면 소독한 기계와 물수건 등을 넣어두는 소독함을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밖에는 이발소 간판을 걸어놓고, 안에서는 온갖 불법과 탈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발을 하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가 아니라 불법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동네 이발소 주인은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이발소 아닌 이발소가 전국적으로 1만 개도 넘을 거라고 하더군요. 

환자보다 '간판'부터 치료를

구 군산역 앞 부근에 있는 병원 입간판. 시내버스에서 내리면 눈에 띄는데요. 지금도 그대로여서 환자들에게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구 군산역 앞 부근에 있는 병원 입간판. 시내버스에서 내리면 눈에 띄는데요. 지금도 그대로여서 환자들에게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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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환자를 받는 병원 입간판입니다. 저렇게 지저분한 간판을 보고도 환자들이 진료를 받겠다고 찾아가는지 궁금하더군요. 환자 진료보다 '간판 치료(?)'가 더 시급하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의사들은 진료를 마치면 항상 손을 씻습니다. 그만큼 병원은 위생과 청결에 철저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병원 간판이 고물상 간판보다 지저분하다니, 환자를 무시하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신경정신과 환자가 보면 치료는커녕 병세가 더욱 악화되지 않을까 봐 우려되더군요.         

요즘은 의사들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옛날과 달라졌고 서비스도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서비스가 돈 액수에 따라 다르고, 환자를 손님 대하듯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걸 보면 병원도 히포크라테스 정신에 앞서 신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경쟁하는 하나의 사업체로 변한 것 같습니다. 

사진·서예·그림 등 예술 동호회 회원들의 작품전에 찬조금은 내도 팸플릿에 병원 상호도 넣지 않았던 예전과 달리, 시내버스나 공공 게시물에 광고도 하고 환자유치 경쟁도 하는 데서 알 수 있거든요. 결과적으로 질 좋은 진료는 환자들의 현명한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간판의 역사

군산 월명공원을 관통하는 월명굴 입구(해망동 방향)에 있는 미장원 간판. 염복순이 주연이었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가 떠올라 독자들과 함께 보려고 올렸는데요. 전화번호 앞에 국 번호가 없고, 미장원 앞에 ‘영자’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70년대에 제작한 간판으로 생각됩니다.
 군산 월명공원을 관통하는 월명굴 입구(해망동 방향)에 있는 미장원 간판. 염복순이 주연이었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가 떠올라 독자들과 함께 보려고 올렸는데요. 전화번호 앞에 국 번호가 없고, 미장원 앞에 ‘영자’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70년대에 제작한 간판으로 생각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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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의 역사는 서양은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과거보러 가는 선비나 역관들이 이용했던 주막집 처마나 대문 기둥에 달아 놓았던 등(燈)이 간판의 원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나무나 쇠로 살을 만들어 속에는 불을 밝히고 헝겊이나 종이를 씌운 표면에 '酒' 자를 써서 주막집에 매달아 놓은 등이 사극이나 풍속화에 심심찮게 등장하거든요. 여관 간판의 효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초에 유리제품이 만들어지면서 주막 문 앞에 기둥을 세워 그 위에 네모꼴 남포등을 고정한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여 '酒' 자를 써놓고 밤이면 불을 켜서 영업용 간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네온사인 간판은 1920년대부터 서울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초에는 네온사인으로 만든 입간판, 돌출간판, 벽면간판, 옥상간판 등이 5천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통계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더군요.

주막을, 말 그대로 술이나 마시고 일하는 과부에게 수작 부리는 집으로만 알기 쉬운데요. 선비나 역관들이 길을 가다가 끼니도 해결하고, 피로도 풀면서 쉬어가는 쉼터이자, 비밀리에 만나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의 애환이 서린 주막이 여인숙-여관-호텔-모텔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불륜의 씨앗을 뿌리는 장소로, 가정파탄의 원인제공을 해주는 장소로 변해버렸는데요. 이런 현상을 도시발전의 부작용이라고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발길을 멈추게 했던 목공소 간판. 몇 달 전 형님댁에 가다가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목공소 주인이나 아들이 쓴 간판으로 생각되는데요. 잘 쓴 글씨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 획 한 획에 글쓴이의 정성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어 자꾸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발길을 멈추게 했던 목공소 간판. 몇 달 전 형님댁에 가다가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목공소 주인이나 아들이 쓴 간판으로 생각되는데요. 잘 쓴 글씨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 획 한 획에 글쓴이의 정성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어 자꾸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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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헷갈리게 했던 간판. 처음에는 ‘방칠수’로 읽고 잠시 헷갈렸다가 ‘방수 칠’인 것을 아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는데요. 간단하면서도 수요자들의 눈을 모으는 간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색깔 선택도 잘했고요.
 잠시 헷갈리게 했던 간판. 처음에는 ‘방칠수’로 읽고 잠시 헷갈렸다가 ‘방수 칠’인 것을 아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는데요. 간단하면서도 수요자들의 눈을 모으는 간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색깔 선택도 잘했고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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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간판의 역사, #간판의 종류,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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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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