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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여왕 포스터
선덕여왕 포스터 ⓒ MBC

MBC 드라마 <선덕여왕>이 화제다. 고현정은 사극에 처음 출연한 것임에도 미실궁주를 잘 그려내어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미실궁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대충 들리는 이야기는 '문란했던 여자', '성을 이용해 권력을 잡았던 여자' 정도다. 미실에 대한 이런 평가는 과연 옳은 것일까?

우선 미실이라는 여인은 필사본 <화랑세기>가 발견된 이후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화랑세기>는 통일신라 시대에 살았던 김대문이 지은 책이다. <고승전> <한산기>와 함께 이름만 전해질 뿐 어느 시대엔가 없어져 버린 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랬던 <화랑세기>가 1989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책은 박창화라는 한학자가 해방 이전 일본에서, 그 당시에 제작된 종이에 베껴온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진짜 <화랑세기>를 베껴온 것인가, 아니면 박창화가 지은 소설인가 논란이 일었다.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이 책을 위서(僞書)로 보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화랑 단체를 여러 유형으로 분류해 그 갈등과 통합의 상호 작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이 근대인의 사고 방식이기 때문이다.' - 이기동
'<화랑세기>의 화랑도상이 무사단으로서의 이미지가 약하고, 문란한 성관계와 귀족 사회의 근친혼에 대한 기록이 위작의 증거이다.' - 노태돈
'<화랑세기>의 용어가 일본 사료에 나타나는 특징과 많이 닮아 있으므로 일본인에 의해 위작된 것이다.' - 임창순

<화랑세기>, 박창화가 지어낸 이야기일까

미실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의 기본 역사서로 인정받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전혀 없다. 오직 진위 논란이 진행 중인 <화랑세기>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미실은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라면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위서가 아니라면 실존 인물이 된다.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나는 개인적으로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 책에 소개된 성관계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종욱 교수가 번역한 <화랑세기- 신라인의 신라 이야기>는 10년 전 처음 출판되었을 때 샀지만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다가, 며칠 전에야 간신히 다 읽었다.

일례로, 이 책에 등장하는 관계는 보통 'A가 B를 정비(正妃)로 삼은 뒤 H를 낳고, C와는 사통(私通) 관계였다가, C를 자기 동생인 D에게 넘겼으며, D는 E라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F를 낳고, B와의 사이에서도 G를 낳았다. A는 F와의 사이에서는 J를 낳았다' 등과 같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복잡했다. 게다가 여기에 사회적 관계까지 혼란스럽게 얽혀 있다.

사실 이 복잡한 통정 관계에 대한 기록을 보고 있자면, 이게 동물의 왕국의 이야기인지 우리 조상 이야기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나름대로의 성도덕과 질서는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남매도 없고, 조카도 없고, 사촌도 없고, 고모나 이모도 없는 이들의 자유로운 성관계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문란을 넘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주류 역사학계에서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이 책이 박창화가 위작한 소설이라면, 그는 셰익스피어를 능가하고, 아인슈타인을 넘어서는 천재일 것이다. 읽는 것도 버거울 만큼 복잡한 인간관계를 모순 없이 창조해낸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윤리관이 지배한 조선 말기를 살았던 사람의 머리가 이런 복잡다단한 애정 관계를 창작했다면 그건 진실로 기적이다.

근친혼은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신라 왕실 사람들이 근친혼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시대 왕들도 같은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다른 이복남매라면 전혀 문제없이 결혼을 했다.

학자들이 미실에 주목하지 않은 이유

 선덕여왕 포스터
선덕여왕 포스터 ⓒ MBC

이것은 우리나라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도 친동생과 결혼했다. 클레오파트라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수많은 파라오들도 근친혼을 했다. 근친혼은 고대 세계의 흔한 풍속이었는데,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를 통해 권력을 통제하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은 역사학계의 비주류 학자들이다. <화랑세기> 관련 학술회의 때 위서가 아니라는 의견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종욱 교수는 1999년에 필사본 <화랑세기>를 번역하여 <화랑세기- 신라인의 신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많은 이가 읽어보고 이것이 위서인지 아닌지 판단해 보라는 의미였다. 역사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들도 이 번역본을 통해 필사본 <화랑세기>를 접했는데, 이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미실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으로 선정된 김별아의 소설 <미실>이다. 그 후 미실의 이야기와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은 많은 문학 작품과 사극에 활용되었고,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처음 연구한 학자들은 미실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첫째는 신라 왕실 사람들이 정을 통한 이야기가 워낙 많이 나오므로 미실만 딱히 이상하게 볼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위서냐 아니냐 진위를 가리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화랑도의 조직과 구조, 운영 형태 등에만 관심을 두었고, 미실이 몇 명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실과 문노는 '대립관계' 아닌 '협력관계'?

이 책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했던 일반인들은 자유분방한 신라인들의 애정 행각에 놀랐고, 그 중 특히 미실에 주목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실은 색공지신(色供之臣 : 왕이나 태자에게 색을 바치는 신하) 가문의 여인이다. 세종전군이라는 남편이 있었고, 진흥왕, 동륜태자, 진평왕의 3조(朝)를 모두 색공으로 섬겼다. 미실이 얼마나 매혹적이었던지, 그에게 빠진 진흥왕은 그가 잘못을 해도 내치지 못했다고 한다. 미실은 왕에게 일방적으로 색공을 바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설원랑, 미생(미실의 동생) 등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를 택하기도 했다.

이 내용만 보면 미실은 색사(色事)에 환장한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미실의 전부는 아니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던 진지왕 폐위 관련 이야기가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나온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실은 진지왕을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가, 그가 약속을 어기자 폐위를 주도했다. 다음 왕인 진평왕 때는 옥새를 관장하는 새주(璽主)가 되는 등 정치권력도 손에 넣었다. 미실은 섹시한 매력을 통해 사랑과 권력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에 크게 의지하여 만든 사극이다.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닌 사극이기에, 사극 <선덕여왕>은 진실과 허구를 모두 담고 있다. 단, 이 글에서 말하는 진실은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사실을 말한다.

<선덕여왕>의 국선(國仙) 문노(文弩)와 미실은 대립하는 관계인데, 이것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과 다르다. 드라마 속 문노는 진평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갓 태어난 덕만공주와 유모를 왕궁 밖으로 구출해 내고, 미실 일당은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드라마는 아마도 문노를 선덕여왕의 지지세력으로 만들고 미실과 끝까지 대립하게 할 것 같다. 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 속 문노와 미실은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미실의 배려와 주변인의 설득으로 협력하는 관계가 된다.

선덕여왕과 김유신이 연인 사이?

 선덕여왕 포스터
선덕여왕 포스터 ⓒ MBC
진평왕과 미실의 관계도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과 다르다. 드라마 속 진평왕은 미실로 인해 약해진 왕권을 한탄하며 미실과 불편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 속 미실은 진평왕에게 신국의 도(이것은 색사를 의미하는 말이다)를 가르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지 않는 설정은 선덕여왕과 김유신 장군의 관계이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드라마는 이 둘을 연인 관계로 만들 것 같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김유신이 김춘추보다 아홉 살 정도 많다. 그런데,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자매인 천명공주의 아들이다.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필요 없고, 여자가 열 살 이상 많아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여자가 열 살 이상 많은 연인 관계도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연상인 선덕여왕과 어린 김유신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비슷한 나이의 연인 관계로 설정하는 것 같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춘추의 아버지, 그리고 삼촌이 선덕여왕을 모셨다고 한다. 실제로는 나이도 비슷하지 않은 두 사람을 연인으로 설정한 것은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여성들을 위해서인 것 같다.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이지만 이것은 허구임을 꼭 알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실은 섹시한 매력도 갖추었고, 정치권력도 손에 넣었다. 이런 면 때문에 현대인도 미실을 매력적인 인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여성 위인을 조사해 오라는 숙제에 미실을 조사해 온 학생도 나오는 걸 보면, 많은 이가 미실을 실존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미실이 실존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사극은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니, 오해 말자

개인적으로 나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가 완벽하지는 않아 주류 학계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실에 대해서, 그리고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해서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짜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를 베낀 것이 맞다는 증거가 완벽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미실도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을 문학 영역에서 맘껏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사극에서 활용하는 것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극은 그 당시를 배경으로 만들어낸 사실에 가깝게 만든 허구이지 결코 완벽한 역사적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극은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이 널리 알려지고 많은 이가 이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미래의 어느 날 어릴 때 드라마 <선덕여왕>을 아주 재미있게 본 어떤 사람이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본 여부를 가려줄 결정적인 발견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재미있게 들었던 슐리이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 낸 것처럼 말이다.


#화랑세기#미실#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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