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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범국민대회를 경찰과 서울시가 불허한 데 반발해 지난 10일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이 광장 봉쇄를 차단하기 위해 서울광장에서 천막 농성을 했다.
 6·10 범국민대회를 경찰과 서울시가 불허한 데 반발해 지난 10일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이 광장 봉쇄를 차단하기 위해 서울광장에서 천막 농성을 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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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대중은 저마다 자기 가슴 속에 광장 하나씩을 품고 산다. 근대는 광장에서 태어났다. 중세는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대중들의 야유를 받으면서 피를 흘리며 박물관 진열장을 향해 기어갔다. 광장을 창조하면서 대중은 이윽고 역사의 주인으로 솟구쳐 올랐다.

프랑스혁명(1789)은 콩코르드광장에서 태어났다. 루이16세와 앙투아네트가 여기서 사라지면서 봉건의 목도 단두대에서 함께 잘려나갔다. 파리 시민은 루이15세 광장을 혁명광장으로 바꾸어내면서 박동하는 역사의 중심부로 격렬하게 밀고 들어갔지만 구체제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거룩한 희생 없이 나타난 광장은 없다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 굴욕당한 지배세력이 도망간 파리를 지킨 이들은 근로대중들이었다. 방돔광장에 서 있던, 왕관을 쓴 나폴레옹 동상을 쓰러뜨리면서 파리코뮌(1871)은 정점으로 타올랐다. 대중은 이를 기념해 새로 등장한 카메라로 혁명적 자치를 그 광장에서 기록했다.

놀랍게도 프로이센과 결탁한 왕당파는 3만 명을 죽인 '피의 일주일' 뒤 사진을 근거로 혁명 참가자들을 식별해내고 수배령을 내렸다. 경찰 채증사진 기원은 코뮌 패배에서 비롯되고 있는데, 사진 속에는 당대 최고의 리얼리스트 화가 쿠르베도 들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코뮌을 지원하고 기록했다.

근대광장은 결코 도시 건설자나 토목설계자 손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대중의 거룩한 희생 없이 나타난 광장은 일찍이 없었다.

빵을 달라는 맨체스터 면직공 6만 명을 워털루전투 귀환병들에게 술을 먹여 진압한 성 피터광장 학살(1819)에서 가난한 대중이 흘린 피는 이름(피터는 베드로, '바위'라는 뜻) 그대로 바위로 굳어 영국 차티스트운동의 밑돌이 되었다. 역사는 이를 비아냥거려 피털루학살로 부르고 있다.

오늘 서울에서 시민시위 때마다 띠를 두르고 나와 핏대를 세우는 '동원되는 애국자'들은 이미 영국에 있었다. 그 노동자들이 짬을 내 공장 인근 공터에서 함께 즐기던 운동경기가 시장으로 흡수된 게 EPL 축구다. 훌리건의 행악은 시장화된 광장에서 분출되는 왜곡된 몸짓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지배세력은 광장 또한 체제내화해 스포츠맨십 따위로 대중의 역동성을 억압하는 가치를 주입해왔다.

법관 옷을 입은 심판 복장은 이 대중유희가 지배적 룰 아래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시장화와 더불어 규칙엄수는 자본과 권력의 또 다른 승리인 셈이다. 며칠 전 6월항쟁을 기념하는 광장 뒤편으로 보수언론이 운영하는 전광판에서 축구중계가 진행되고 있었던 건 단지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광장은 역사의 근육

1차 러시아혁명은 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광장에서 일어난 노동자학살에서 비롯됐다. 러일전쟁에서 패해서 돌아온 수병들이 동조해 일으킨 반란을 영화 <전함 포템킨>이 담아냈다.
 1차 러시아혁명은 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광장에서 일어난 노동자학살에서 비롯됐다. 러일전쟁에서 패해서 돌아온 수병들이 동조해 일으킨 반란을 영화 <전함 포템킨>이 담아냈다.
ⓒ 전함포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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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러시아혁명(1905)은 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광장에서 일어난 노동자 학살에서 촉발되어 러시아 전역으로 몸을 일으켰다. 러일전쟁이 아니었으면 봉기내용이나 크기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한국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전쟁에 패해 흑해 오데사로 돌아온 수병들이 이에 동조해 일으킨 유명한 반란을 에이젠슈쩨인은 영화 <전함 포템킨>(1925)으로 제작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벌어진 그 전쟁 결과물인 을사늑탈(덕수궁 중명전, 1905)로 조선은 실질적으로 일제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국가관리 책임을 지고 있던 고종이 죽은 일로 대중이 일제 식민지 권력에 저항해 떨쳐 일어나면서 한반도에서는 비로소 광장이 역사 전면에 부상했다. 길을 넓히면서 조금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3.1운동(1919)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대중광장을 만들어내면서 삼천리로 확산되어갔다. 고작 달포 남짓 뒤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공화정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식민지 저항운동이자 봉건을 동시에 밀어내고자 한 근대적 투쟁이었다.

근대 이래 광장은 역사의 근육이었다. 세습지배자나 식민지 권력, 선출된 위임권력에게 자기 운명을 맡기지 않고 대중이 스스로 정치적 의사표현과 정치를 실행하고자 할 때 광장은 거센 숨을 내쉬며 역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왔다. 광장이 가지고 있는 가장 벅찬 대목은 바로 직접성이다. 억압과 위임을 분쇄, 회수할 수 있는 힘은 공간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대중이 광장의 주인일 때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벌어지는 유희(축제)는 자생적 대중이 내뿜는 향기라고 할 수 있겠다.

서울시청 앞(대한문 앞)에서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는 공간은 3.1운동 이후 해방, 4.19(1960), 6.10항쟁(1987), 월드컵 응원(2002), 미군장갑차여중생압사사건항의시위(2002), 노무현대통령탄핵안거부투쟁(2004, 시청앞광장이 공사중이라서 주로 광화문 일대), 한 해 전 촛불집회 등을 통해 한국인의 생동하는 역사근육으로 작동해왔다. 포럼, 아고라, 스퀘어 등 광장을 부르는 숱한 이름이 있으되 시청앞광장만큼 한 몸으로, 지속적으로 역사를 증거하고 있는 경우는 안팎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단일한 공간 하나로 근대한국을 압축한다면 그곳이 바로 시청앞 광장이다. 1백만 명에 이르는 대중이 적어도 3번 이상 모여 저항 깃발을 들고 쟁취해낸 광장은 세계에 없으리라 믿어 마지않는다.

광장은 대중의 사회적 고향

이 광장에서 민족해방투쟁과 민주주의가 태어났다. 이곳이야말로 한국인의 성스러운 공간이다. 대중의 위대한 기억이자 민주주의의 자궁인 그 광장은 지금 닫혀 있다. 광장에 들어가고자 하면 경찰 곤봉에 두들겨 맞고 방패에 찍히거나 들머리에서 끌려가고 있다. 광장의 죽음은 대중토론, 대중표현, 대중행동의 죽음이다. 요컨대 민주주의의 죽음이다. 민주주의 역사는 광장의 자유와 동격으로 일치한다.

이 광장을 빼앗긴 것은 한국 대중에게 실로 치욕스런 일이다. 6월광장이라 부르는 게 마땅한 시청앞 광장이 서울광장(2004)이 되었을 때 치욕은 벌써 예감되었다. 서울광장 조성과정은 숭고한 역사를 지우는 작업이기도 했다. 대중의 기억을 훼손한 자리에 들어선 풀밭은 녹색 지우개로 작용해왔고, 스케이트장 설치는 역사광장을 소비공간으로 위락화했다.

5백 년 이상 버림 받은 민중의 삶터였던 청계천 물길 일대 또한 구경거리로 둔갑해 시각소비물로 중산층 유권자에게 차압해주었다. 이곳에서 금연을 하자는 주장은 건강권과는 별도로 공간성격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색 구성(흰색, 빨강색, 파란색)이 같다고 해서 원통형으로 회전하는 이발소 간판이 프랑스혁명 정신을 이르는 삼색기일 수 없듯 왜곡된 광장가치와 정신을 되찾는 일은 역사적 과업이 되고 있다.

6.10항쟁 22돌을 기리고자 시민과 야당은 시청앞 광장에서 장대비 아래 가장 긴 '1박2일'을 보내야 했다. 경찰이 차벽으로 봉쇄한 빼앗긴 광장을 되찾기 위한 신산스런 투쟁은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이 정권은 광장을 지우고 또 막고 있지만, 가슴 속에 광장이 있는 한 광장을 향한 대중의 행진은 사회 유전자적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거기가 이 나라 대중의 사회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시청 앞 광장이 서울시 소유? 광장의 숨소리는 역사의 맥박

역사, 문화, 사회적으로 시청앞 광장은 서울시 소유라고 보기 어렵다. 서울시 관할이고자 한다면 이 위대한 역사를 계승해 마땅히 광장을 대중에게 내놓아야 한다. 시청앞 광장의 생동감에는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사용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기를 허락 없이 들이키는 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광장언어를 두려워하는 자는 어차피 역사에서 소멸하는 세력들이다. 민주주의를 능멸하고 인권을 짓밟는 자들은 결코 광장에 이름을 남길 수 없다. 봉건세력과 다름없이 이들 또한 머잖아 역사의 어두운 쇼케이스 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대지의 공공성은 그 사회 구성원의 공간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광장은 그 꽃이다. 영동(강남)을 개발하면서 공공공간으로 할애한 게 고작 도산공원(1973, 약 3만 ㎡)뿐이었던 그곳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까닭이 이와 무관치만은 않다고 여긴다. 광장이 부재한 채 투기욕망이 끓어넘치는 사유지만의 대지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성과 상상력은 밀폐적 특성을 지니기 십상이다.

시청 앞 광장은 이 참에 온전히 대중과 역사의 품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광우병쇠고기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처음 열린 청계광장도 마찬가지다. 새로 이름을 붙이고, 조형작업을 하고, 대중의 이름으로 이를 소유해야 한다. 지난 1백 년 역사 동안 대중의 피와 땀, 일제저항과 민주화운동이 창조해낸 그 광장을 되찾아 세계인 앞에 내보여야 한다. 이곳이 콩코르드이자 흑백인종차별을 끝내고자 마틴 루터 킹이 행진(1963)해간 워싱턴 링컨메모리얼임을 자랑스레 노래해야 한다. 그보다 더 길고 험난한 역사를 통해 시청앞 광장은 한국인의 가슴이 되었다.

광장의 숨소리는 역사의 맥박이다. 그러므로 광장을 빼앗는 일은 대중의 가슴을 빼앗는 일이다. 대중은 광장에서 태어나, 결코 늙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오늘, 그 대중의 심장이 세상과 민주를 부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서해성씨는 소설가이자 한신대 외래교수입니다.



태그:#서울광장, #서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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