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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원재료를 제공하고 언론이 가공한 노무현 스토리들이 2008년 11월 어느 날 이후 노무현이 산화할 때까지 여섯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대짜배기 기사로 가능한 모든 매체를 뒤덮어, 노무현을 관제피의자로 만들어가는 동안, 노무현을 능멸한 것은 이른바 보수세력만은 아니다. 노무현과 가까운 사람들이나 민주당마저, 어쩐지 겸연쩍다는, 괜히 흙탕물이 튀길까 조심하는, 그런 자세로 몸을 오그렸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노무현의 '참회'를 압박하는 사람들마저 없지 않았다. 자살을 명령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중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노무현은 이제 형편없는 위선자, 도덕적 파산자였다. 벌레보다 더 못한 존재였다. 이명박들이 겨냥한 대로였다.

왜 패자인가?

그런데 상황은 느닷없이, 더할 수 없이 극적으로, 뒤집어졌다. 조롱하고 능멸하던 그 입들이, 그 언론들이, 그를 칭송하고, 그의 유덕을 기리고, 그의 유훈을 되풀이하여 암송하게 되었다. 역사상 이토록 극적 반전은 없었다. 있을 수가 없는 극적 반전이었다. 그 경황 중에도 노무현의 승부수에 대해 입질을 한 언론이 있었다.

- 노무현이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그러니까 상황의 극적 반전은 노무현의 승부수가 적중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한때 노무현이 이른바 승부수로서 탄핵을 유도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한나라당 사람들마저 노무현이 띄운 승부수에 걸려들어 노무현의 덫에 치였다고 탄식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노무현은 귀신에 버금갈 신통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 되겠는데, 역시 극적 반전을 일으켰던 그때 그 탄핵이 정말 노무현이 띄운 승부수였던가, 어쩌면 뒷날에라도 그런 증언이 나올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날린 그것이 그가 띄운 '마지막 승부수'였던가, 그런 증언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홀로 결단한 것 같고, 그는 이미 대붕이 되어 창공을 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또 극적 반전을 이룩했다.

그 반전 국면에서,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모두 패자가 되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은, 어쨌거나 사람이기 때문에, 한때의 동지였다가 등을 돌린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는 겸연쩍음 때문에, 그의 지지자였던 사람들은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대중들은 아직 살아 있던 시절 그의 진실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에, 요컨대 그를 되돌아보아 마음 편안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모두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또 싸워야 한다

싸움은 생태계의 질서다. 싸움 없는 생태계는 없다. 싸움에 의해 생태계의 질서는 형성되고 변화한다. 그 변화가 진전이 될 수도 있고, 퇴보가 될 수도 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싸움에 의한 굴복은 있어도 순리에 의한 승복은 불가능하며, 세상은 결국 이긴 자의 관점과 이긴 자의 언어에 의해 주물러질 수밖에 없다. 싸워야 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 모두 패자가 되어 판이 우습게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자들은 자기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과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또 싸워야 한다.

이제 막 시작된 우습지만, 심각한 이 패자전의 이상적인 목표는 모두가 승자가 되는 세상의 성취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을 이룩한 나라도 있으니까. 퇴보가 아닌, 다수가 지는 싸움이 아닌, 진전이 가능한, 다수가 이기는, 그래서 모두가 승자가 되는 세상을 마침내 이룩해내는 싸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상식과 원칙이 가능한 세상,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을 이룩해내기 위해, 능한 싸움꾼이 되어야 한다.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용기가 필요하다. 우선 적과 동지를 알아보는, 더불어 적의 실체를 파악하는 지혜가 전제되어야 한다.

좌는 무엇이고 우는 무엇인가

싸움에는 앞동네와 뒷동네 싸움도 있고, 밥 먹은 계급과 죽 먹는 계급의 싸움도 있고, 치마 입은 사람과 바지 입은 사람 사이의 싸움도 있고,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의 싸움도 있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싸움도 있고, 귀가 큰 사람과 귀가 작은 사람 사이의 싸움(이스터섬)도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현실로 보아 가장 큰 싸움판은 이른바 좌와 우, 또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혼란스럽다. 이른바 좌와 우의 분별이 쉽지 않다. 그놈이 그놈 같다. 정통 민주세력을 자처하는 민주당이 배출한 최대의 사이비 김영삼이 소속 의원들을 대동하고 노태우에게 투항(3당합당 - 1990년)하여 좌로부터 우로 전향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요 정책 가운데 하나로 내걸어, 극좌로 분류되었던 민중당 출신들 가운데 지금 한나라당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재오, 김문수, 차명진 등 여럿이다.

노무현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뒤, 민주당 의원들이 떼를 지어 한나라당으로, 그러다가 노무현이 당선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떼를 지어 민주당으로 몰려왔다. 그렇게 어제까지 우로 일컬어지던 사람이 느닷없이 좌로 자리를 바꿔 앉고, 어제까지 좌로 일컬어지던 사람이 느닷없이 우로 자리를 바꿔 앉는 일이 드물지 않다 보니 더욱더 혼란스럽다. 도대체 좌는 무엇이고, 우는 무엇일까? 그래서 좌나 우 대신, 민주와 비민주로 문패를 바꿔 달아보기도 하는데, 그래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를 비민주로 분류하는 것은 맞아 보이지만, 좌를 민주라, 그렇게 분류하는 것은, 그들에게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하기에, 아무래도 주저되기 때문이다.

좌니 우니 하는 분별은 싸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서유럽 여러 나라처럼 좌와 우가 얼마만큼이나마 분별되어 실천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상으로 보아도 좌니 우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이 대개는 정치적 국면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기 위한 싸움 도구이기 일쑤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한쪽에서는 걸핏 하면 좌니, 빨갱이니, 친북이니 하고 몰아붙이지만, 그래봤자 그것은 상대방을 욕하고 탄압하고, 더 심하게는 아예 죽이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반공을 국시의 으뜸으로 삼은, 우익의 할아버지, 박정희가 남로당이었다는 것이나, 민주당 출신 김영삼이 한나라당의, 한나라당 출신 이부영이나 손학규가 민주당 대표 노릇을 했다는 것이나, 부자 양대에 걸친 골수 민주당 조순형이 골수 보수 이회창 아래에 들어가 엎드려 있는 것은 이 대목 주제와 연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좌니 우니 하는 분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적 순도다. 내남없이 욕망의 종속물일 수밖에 없다 보니, 이성과 양심에 거슬리는 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정도가 문제다. 아예 드러내놓고, 그래 나 도적이다, 어쩔래, 하는 축과, 도적질을 한다 해도 어쩐지 겸연쩍어 하기는 하는, 도덕적 고통을 실제로 느끼는, 수오지심이 살아있는, 그런 축이다.

이 글의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을 이명박과 노무현을 비교해볼 수 있다. 이명박은 변칙이 판치는 난세에서의 물적 생산성이 탁월하게 우세하다는 것 외에는, 인간을 평가하는 어떤 면모에서도 노무현과 견줘질 수 없다. 조중동과는 달리, 이를테면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신문이나 한국일보가 반성의 포즈를 취하는 것도, 거기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직 죽지 않은 수오지심이 발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좌나 우, 또는 진보나 보수,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순도가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다. 양심이나 이성적 능력의 잔존량이라고나 할까? 물의 급수에 견줘볼 수 있다. 물에 산소 용존율이 얼마나 되느냐, 곧 1급수냐, 2급수냐, 3급수냐…, 그런 것. 굳이 정의해보자면, 좌니 우니 하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2급수와 3급수의 싸움이라 하는 게 맞다. 왜냐하면 인간 가운데 1급수에 해당하는 그런 부류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이른바 보수 측 시위현장에 나가보면 아닌 게 아니라 일당 받고 나온 듯한 나이든 사람들이 태반이다. 운동모자를 쓰거나 무슨 군복을 입거나, 그리고 색안경까지 뒤집어쓴 그들은 마구 외치지만, 자신의 외침에 대한 순정한 열정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일당만큼 하고나면 곧 툴툴 털고 사라진다.

반면에 이른바 진보니 좌니 하는 사람들의 시위 현장에 가보면, 그들 가운데 일당 받고 나온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것부터 차이가 난다. 그리고 열혈적이고,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꽃놀이를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보 측 시위에 몇 만이 모이는 것은 예사로운 반면, 보수 측은 수십이나 수백 명이 모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수 언론은 이것을 등가로 다룬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그러니까 좌파, 또는 진보 쪽 지지 세력이 더 많은데, 궁극적으로 권력을 잡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은 그 반대다, 왜 그런가? 첫째, 이른바 우파는 축적이 많고, 재벌이나 주류 언론 등,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을 대표한다. 가용 화력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이른바 좌파, 또는 진보, 이렇게 분류되는 사람들은 자기 주관들이 뚜렷하고, 현상에 대한 열정이 넘치다 보니까 단합이 잘 되지 않는다.

반면에 그 반대편 사람들은 공범의식이 확고해서, 자기들끼리 싸울 때 싸우더라도, 좌파, 또는 진보를 상대로 싸울 때는 일사불란하게 단결한다. 그래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그런 표현이 무슨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돌아다닌다. 다음 대목에서 실증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실제로도 그렇다.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이 새로운 싸움판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답이 있다. 한쪽은 이기고, 다른 한쪽은 진다. 한쪽은 살고, 다른 한쪽은 죽는다. 한쪽이 이기는 길이 다른 쪽에게는 지는 길이고, 한쪽이 지는 길이 다른 한쪽에게는 이기는 길이다.

어느 쪽이 이길까?


#노무현#패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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