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좌파인지 우파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스스로의 정치적 스탠스를 손쉽게 결정하고 규정지어버리는 몇몇 논객들의 태도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무이념적 태도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을 해보곤 한다. 과학자로 살아온 지난 10년간, 나는 이념이란 종교처럼 위험한 교조적 태도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곤 했었다. 마르크스 주의를 '마(馬)교'라 부르고야마는 도올의 태도가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인 내게 가장 상식적으로 다가왔던 현실인식에 대한 관점은 상황윤리적 태도였다. 나는 정책으로 승부하자는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주장에도 상황윤리적 고민이 깔려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않는다.
상황윤리, 이념의 확장, 법치주의
사회적 현실문제들은 복잡하다. 그냥 복잡한 것이 아니라 보통 하나의 답이 주어지지 않는 문제인 경우가 많다. 상황윤리는 윤리학에서도 나타나는 이런 복잡한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규범윤리를 비판하면서 전면에 등장한 관점이다. 규범윤리는 도그마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론중심적이다. 상황윤리는 윤리학적 문제는 그런 도그마들로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례중심적이다. 상황윤리의 상식은 매 사안마다 상황의 다양함을 인정하자는 메시지다. 맥락을 중시하고, 다양한 사례들을 분석하는 것이 상황윤리의건강성이다. 사회적 문제들은 과학이 다루는 대상들처럼 조작가능하고 단순화할 수 없는 대상들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접근에서 이론 혹은 규범을 맥락없이 들이대는 일은 위험할 수 있다.
상황윤리적 사고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이념은 무의미하다'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모든 사안은 상황에 따라 해결 방법이다른다. 같은 사안이 시대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해결될 수도 있고, 다른 사안이 같은 방법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내가 때로는 한나라당의 정책에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행동은 배신이다. 그리고 이들은 회색분자로, 양비론자로 매도된다. 정치적 사안이 걸린 문제에 중용은 없다. 그것이 대한민국에서 정치논객들이 벌이는 논쟁의 기저에 존재하는 상식이다. 결국 정책적 차이가 벌어졌을 때, 논객은 결정해야 한다. 당적을 버릴 것인가, 나의 입장을 포기할 것인가. 전자는 배신이고 후자는 비겁함이다. 나는 왜 이런 극단적인 선택들만이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박동천 교수는 이를 논리의 연장이라는 수사로 표현한다.
그러나 어떤 노선도 논리적으로 계속 연장하다보면 일관성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지점을 만나게 된다. 예컨대 환경보존을 중시한다고 자연물의 이용을 모두 반대할 수는 없다. 당장 150년 전만 해도 인간은 자동차도 전기도 없이 살았다. 그 전이나 그후나 인간의 삶이 기본적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환경과 개발의 문제도 두 원칙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개발을 어떤 상황에서 허용하느냐(또는 허용하지 말아야하느냐)고 하는 문제, 즉 시의(時宜)에 따른 선택이 진짜 문제가 되어야 한다.
[박동천의 집중탐구⑤] 진보와 보수-2: 프레시안, 박동천
어디까지 이념의 논리를 밀어붙여야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윤리학의 황금율이라 불리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은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관통하며 나타나지만, 어떤 범죄자가 "나는 사람을 때리는 것이 좋다"라고 주장할 경우, 그리고 실제로 그런 가학적 심리상태가 그 범죄자에게 존재할 경우 우리는 이 황금율조차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없다. 인류는 이런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법치주의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진보에게 법이란 가장 마지막에 가서야 사용해야 하는 수단이다. 법치적 해결이 난무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는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규범윤리학이 안고 있는 문제와, 이념의 확장문제, 그리고 법치주의 문제는 연결고리를 지닌다.
개인과 구조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상황의존적이다. 박동천 교수의 말처럼 진보/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명목척도'보다는 '순서척도'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몇가지 기준들이 있다.
빈곤은 개인 탓이 더 큰가 아니면 사회 탓이 더 큰가?
현재 사회질서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고칠 수 있다고 보는가?
현재의 법체계는 만인에게 공평한가?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켜도 좋은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불평등이 불가피한가?
환경보존이 중요한가 개발이익이 중요한가?
정의가 물리력보다 우선인가 아니면 정의도 물리력에 복종하는가?
다원적인 사회가 바람직한가 획일적인 질서가 바람직한가?
이러한 기준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적절한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표는 된다. 나는 첫번째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빈곤이라는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진보는 그것이 개인 탓이라기보다는 사회 탓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높다. 박동천 교수의 말을 빌려보자.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사태의 원인을 개인 차원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높고,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 범죄를 범죄자의 개인적 특질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경향이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높은 반면에,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회경제적 환경이 범죄자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
[박동천의 집중탐구③] 어젠다를 상실한 한국 진보: 프레시안 박동천
원인의 분석에 있어 진보적 성향인 사람들은 그 원인을 '구조(나는 이를 '체계' 혹은 '시스템'이라 부르겠다)에서 찾는 경향이 높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원인을 '개인'에서 찾는 경향이 높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해결방법을 제시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시스템의 문제를 제시하던 진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갑자기 대중 혹은 개인의 결단을 중시하게 되는 경우다. 예를 들어 노정태의 글,
<택배가 늦는다고 짜증내지 말자>는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택배가 늦는다고 짜증내지 않는 것이 화물연대파업에 대한 개인적 결단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택배가 늦는다고 짜증내는 시민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게 될까. 노정태의 노빠에 대한 태도는 이런 방식의 진보적 해결책이 도달할 결말을 잘 보여준다(
팬클럽에서 정당정치로).
자 이제 고민해보자. 도대체 우리는 진보세력의 희망처럼 움직이지 않는 시민사회를 어떻게 판단하고 대처해야 할까. 지적으로 우월한 논객들이 대중을 계몽시키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진중권과 노정태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계몽주의적 태도는 진보로서 제대로 방향키를 잡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한 태도가 지나치게 쉬운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집단지성을 높이 평가하는 진중권에게서 디빠들에 대한 노골적인 조롤이 나타나는 이유는 진보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촛불처럼 자신들의 이념에 맞는 대중적 행동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노빠나 디빠들처럼 이념과 불일치하는 행동은 계몽하려는 시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원인은 시스템에서 찾으면서도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개인을 탓하는 문제는 진보가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결은 개인적 각성을 요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택배가 늦는다고 짜증내지 말자'라는 노정태의 주장이, '에너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절전을 생활화화자'라는 정부의 캠페인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나아가 진보적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이 문제를 너무 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촘스키조차 존경한다는
스탠리 코언의 책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이 번역되었다고 한다. 코언도 국가의 잔인함을 외면하는 대중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대중을 바라보는 관점은 언제나 대중탓만 하는 우리네 진보들에게 반성을 요구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역사를 창조' 하는 것보다 '생계를 꾸리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이다. (…)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사회정의는 분명 법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훌륭한 시민성'이라는 상태도 있을 수 있다. 이 덕목은 거창한 영웅적 행동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침묵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눈 먼 자들의 도시…당신은 눈을 뜨고 있는가? 프레시안 강양구
문제의 원인을 시스템에서 찾았다면, 문제의 해결책도 시스템에서 찾아야 한다. 원하지 않는 대중의 태도를 경멸하는 것은 자칭 극좌에 서있다는 진보들이 취해야할 태도는 아니다.
추신: 나는 PD수첩에서 방영된 광산노조에 관한 진보신당의 입장을 듣고 싶다. 여전히 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기대고 있는 몇몇 거대노조들의 횡포는 반드시 고민하고 해결해야할 문제다. 적어도 조중동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추신: 상황적 사고라는 말을 이렇게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다라는 사실은 벅찬 감격이다. 박동천 교수의 글은 새롭고 놀랍다.
얼핏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념이 일정한 지점에서 일관성을 잃어버리고 마는 난점은 하나의 발상을 논리적으로 무한히 연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어떤 정책이나 노선을 논리적으로 연장해서 일관성이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볼 필요는 있다. 그래야 정치인들의 말이 공허한 립 서비스에 불과한지 아니면 진실로 실천할 의사가 있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논리의 연장을 해당 맥락에서 필요한 데까지만 해야지, 그 한도를 넘어가버리면 언어적 변별력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한다.진보와 보수의 문제처럼 흔히 이념이라고 이해되는 사항에서는 논리적 일관성이 상당한 수준으로 요청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현실 맥락에서 나오는 적실성이라는 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박동천의 집중탐구⑤] 진보와 보수-2: 프레시안, 박동천
덧붙이는 글 | 이글은 필자의 블로그 http://heterosis.tistory.com/ 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