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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을 가리지 않고 세대담론이 무성하게 오르내린다. 우석훈 교수과 박권일씨의 <88만원 세대>는 유럽과 일본에서 시작된 20대의 경제적 독립운동을 대한민국20대의 현실과 중첩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이 노리는 것은 책의 제목이 표상하는 것과는 다르다. 저자들은 20대가 처한 현실을 지적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경제적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다. 10대와 20대의 독립이 지체되는 사회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회다. <88만원 세대>는 경제적 양극화와 학벌중심사회로 흐르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10대와 20대라는 상징물을 이용해 고발하려는 시도다.

진보는 사회적 모순의 원인을 구조에서 찾는 경향이 높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이다'라는 사고는 진보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대론을 내세움으로써 한국사회의 경제적 모순을 지적하려던 우석훈과 박권일의 시도는 엉뚱한 아류 이론들을 양산하는 파국을 맞고 있다. 그 중심에는 386에 대한 증오로 일관하는 변희재의 '실크세대론', 386에서 88을 뺀 90년대 초중반 학번을 지칭하는 고재열 기자의 '298세대론', 386과 298세대의 진보적 향수에 취함과 동시에 10대 촛불소녀들의 위대한 쟁취를 찬양하며 전면에 등장한 김용민의 '20대 개새끼론' 등이 있다. 비록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촛불시위에 나온 386세대들의 생물학적 세대론도 이러한 논의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촛불을 들고 나온 현재의 10대들이 바로 민주화를 이룩한 386의 자식들이라는 논리다.

세대론의 문제, 계층화

세대개념은 다양한 담론들의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어 왔지만 그 의미가 학술적으로 잘 정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대개념의 과용과 혼란은 보통 가족적 개념과 사회적 개념을 혼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계통학적 혹은 가족적 세대개념은 가족 내에서의 출생순서의 차이에 따른 범주고, 역사적 혹은 사회적 세대개념은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비슷한 연령대를 구분하는 범주다. 전자는 주로 미시적인 접근에, 후자는 거시적 접근에 사용된다(전상진, 한국사회학회 2002).

만하임에게서 보이는 계통학적 세대이론은 한 세대를 약 30년으로 잡는다. 문제는 지속적인 출산이 벌어지는 현실 속에서 30년이라는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이다. 만하임에게서 보이는 개인적 현상의 무리한 사회적 투영은, 60년 4.19를 통해 등장한 젊은 세대, 87년 6.10 민주화항쟁을 주도했던 세대를 거쳐 2010년쯤에는 새로운 젊은 세대가 혁명에 나서리라는 정감론적 예언으로 회자되곤 한다.

빌헬름 딜타이에 이르러 문화적 의미가 강조된 세대이론은 또래집단이 겪은 집단적 경험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딜타이는 세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1) 개인들이 동시적으로 공통적 경험을 가져야 하고, (2) 이 경험은 '감수성이 예민한' 생의 시기에 이루어져야 하며, (3) 이 공통적 경험은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사건들에 의해 '각인'돼야 함을 지적한다(전상진, 한국사회학회 2002).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세대론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에 노출된 예민한 20대들에 집중하게 된다. 문제는 그 역사적 사건들의 가중을 평가하는 일이다.

현재 유행하는 세대론은 위에서 언급된 계통학적-가족적 범주와 사회적-역사적 범주의 무분별한 잡탕이다. 그러한 분석이 일견 설득력이 있다 해도 세대론은 간과할 수 없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세대론이 일종의 계층화로 흐르기 쉽다는 점이다.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잘 지적했듯이 계층화, 물화, 환원주의, 이분법은 서구의 지적전통이 가진 네 가지 병폐다. 이 중 계층화는 우리 두뇌가 가진 생물학적 속성으로 '모든 사물을 선형으로 증가하는 가치로 서열화하려는 경향'을 뜻한다. 우리의 두뇌가 가진 속성이라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임과 동시에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가치는 생물학적 가치와 동일하지 않다. 노예제와 우생학 그리고 제국주의로 점철된 계층화의 악습은 인류가 추구해온 진보의 반대쪽 노선에 위치한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세대담론은 정확히 계층화의 논리로 흐르고 있다. 변희재는 386과 실크세대를 서열화시키고 싶어하고, 고재열 기자는 298을 끌어들여 중간계층을 형성하려 한다. 김용민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20대를 가장 열등한 세대로 단정지어 버린다(김용민, 충대신문 2009). 결국 세대담론은 자신이 속한 세대에 대한 정당화로, 다른 세대에 대한 평가절하와 찬양으로 흐른다. 그러한 논의가 귀착되는 지점은 결국 세대간 계층화다.

문제는 이러한 계층화의 논리가 얼마나 생산적이고 효용을 가지느냐는 점이다. 과연 현재 우리사회가 처한 문제가 세대들을 대립시킴으로써 풀릴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이처럼 마구 내뱉는 말들은 그다지 생산적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86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힌 변희재는 차치하고라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진보 진영이 특별한 경험을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세대를 찬양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이유로 폄하하는 것은 못마땅한 일이다.

진보의 진정한 가치관은 모든 세대에게는 각자의 가치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다양한 경험을 공유한 세대가 생산하는 문화는 그 다양성만으로도 존중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승만의 독재를 끝낸 젊은 세대도, 박정희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젊은 세대도, 민주화에 앞장서야만 했던 어떤 세대로, 운동권의 몰락을 경험해야만 했던 필자의 세대도, IMF를 거치며 학벌중심사회의 극단을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세대도 모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세대가 아니다.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실은 세대 그 너머에 있다.

1920년대의 청년담론

시대의 불운을 따지자면, 독재를 경험했던 세대도, 경제위기를 경험중인 세대도 일제시대의 젊은 세대를 따르지 못할 것 같다. 일제 식민지 시절, 불운을 경험해야만 했던 조선에서도 청년담론이 유행했었다. 조선이 망국의 길에 접어든 19세기 말부터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청년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애국계몽운동을 거치면서 일본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담론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논의되던 청년담론은 조직화되지 못한 채 1920년대로 넘어갔다.

1920년대는 3.1 만세운동이라는 대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문화정치가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3.1운동은 대중의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고양시켰고,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문화운동의 이 시기가 필요로 했던 것은 이 기획을 실천할 사회적 주체였다.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사회의 세에넨(소년) 개념에 익숙했던 지식인들은 다양한 청년회를 조직했고 그 수는 2년 만에 2천 여개에 육박했다.

동시에 청년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려는 시도들도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노년층을 배제하자는 세력과, 구조선/신조선을 가르는 의미에서 현재의 관점으로는 장년층까지를 청년에 포함시키려는 세력이 갈등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식민지 부르주아지들의 문화운동에 의해 광범위하게 설정된 청년 개념은 1923년 사회주의 운동이 거세지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무산청년론이 등장했고, 일부 사회주의 계열은 30대를 연령의 상한선으로 잡는 구체적인 시도들을 감행한다.

사회주의의 계급투쟁론이 무산청년을 실천의 주체로 설정하면서, 활발했던 청년담론은 연령제한론과 같은 분탕질로 흐른다. 특히 "사회주의 사상에서 '청년'의 세대적 구분은 계급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계급론을 주축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인식이 정착한 이후 세대로서 청년담론은 계급의 하위 범주로 급격히 종속"되어 버렸다. 결국 1920년대말부터 "사회주의 담론 내부에서 '청년'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줄어"들게 되었고, 청년운동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다음의 기타 운동 중의 하나로 밀려나 버린다(이기훈, 역사문제연구 2004).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청년담론이 처음에는 부르주아지의 문화운동을 위해 이용당했고, 이에 반대하면서 등장한 사회주의 세력조차 이전 세대를 '노인간부'라 조롱하며 연령제한 논쟁과 같은 공허한 싸움에 천착했다는 점이다. 비록 청년의 자각을 권고하고 이들을 주체세력으로 삼고자 했던 노력이 무조건 폄하될 바는 아니지만, 청년담론이 세력간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실제로 사회주의 세력이 계급론이라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청년담론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현재의 세대담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대담론을 넘어

세대담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386과 298과 현재의 20대, 10대가 모두 경험하고 있는 역사적 공감대는 바로 현재의 경제붕괴를 야기한 자본주의의 위기다. 정치적 민주화에 앞장섰던 세대에게 현재의 20대는 공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경제적 독립이 지연된 현재의 20대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노동자와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문제는 금융자본의 탈주에서 비롯된 경제적 위기가 소득 양극화로 이어지고, 우리 모두 여기에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구조의 모순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한 세대다. 경제적 불평등은 세대론의 문제가 아니다. 중산층은 독재정권 시절 이후 끝없이 그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적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386 세대도, 경제적 위기가 피부로 느껴지는 시대를 살았던 298세대도, 88만원이라는 임금으로 암울한 현재의 20대도 결국 하나의 공통된 분모 속에서는 동일하다. 이명박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이유로 386을 비난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선출된 배경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위기는 그 프레임을 바꿨다. 우리는 더 이상 정치적 위기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철저히 경제적인 것이다. 그것이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단 하나의 이유였고, 우리가 세대담론으로 잃어버린 화두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세대론이 아니다. 식민지 시대의 청년담론이 사회주의 계급론에 종속되어 갔듯이 결국 세대론도 경제적 위기라는 더욱 거대한 쟁점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진보의 과제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는 것이다. 세대담론은 낭비다. 누가 더 잘났는가는 훗날 따져도 늦지 않다. 적은 웃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heterosis.tistory.com/ 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세대담론#변희재#우석훈#고재열#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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