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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은 항상 또 다른 보복을 불러 온다.'

'권력의 은밀한 욕망은 만국의 공통적 현상이다.'

'권력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치명적인 유혹이다.'

 

현실정치가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식상함을 안겨준 때문일까. 텔레비전의 정치 드라마가 인기다. 정치 드라마의 공식도 엇비슷하다. 하지만 최근 지상파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방영하고 있는 정치 드라마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과거 고전 드라마와는 다름이 읽혀진다.  

 

과거 '권선징악'과 '가부장적 제도(남성의 지배적 역할과 여성의 부차적 지위)' 등을 옹호하는 체제유지와 전통적 가치들이 주류를 이뤘다면 최근엔 정치통념을 바꾼 개혁군주, 그들 중에서도 남성보다 여성 중심의 권력변환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을 이룬다.

 

은밀한 권력욕망은 성을 초월할 정도로 만국의 공통적 현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정치적 보복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 있는 권력의 '가학성'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다소 황당무계한 소재에 우연이 남발되고 등장인물이 한결같이 '사이코'라 해도 좋을 만큼 강한 개성의 소유자들을 등장시키고 있는 사극에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나고 있다.

 

권력과 마초이즘을 등치시켰던 과거와는 달리 권력과 페미니즘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어 흥미를 더욱 끈다. 정치 드라마에 빠져든 시청자들은 정치현실의 치부를 적시해내는 주인공들 언어와 태도에 까닭 모를 반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이면에 통렬함도 느낄 법하다. 최근 지상파방송 3사가 공들여 방영하고 있는 <천추태후> <선덕여왕> <시티홀>엔 그런 요소들이 충만하다.

 

드라마라고 하는 커뮤니케이션 양식 자체의 구조가 일순간 페미니즘적인 드라마로 전락시킨다는 점을 지적받을 만도 하지만 드라마 속 여인들은 모두 권력을 사랑한다. 정치 드라마에서 무기력한 현실정치의 치료법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과거와 현대를 교묘히 교차시키는 동시에 픽션과 팩트를 가미한 퓨전의 맛을 곁들여 더욱 볼만하다.

 

[# 천추태후] 끝없는 권력유혹과 치명적인 정치보복의 종말은 과연?

 

천추태후 KBS 2TV의 주말 사극 천추태후.
천추태후KBS 2TV의 주말 사극 천추태후. ⓒ KBS

세 정치 드라마 중 가장 오래된 <천추태후>(극본 손영목, 연출 신창석)는 지난 1월부터 주말마다 방영되고 있는 KBS 2TV 대하사극이다. 외적의 침입에 맞서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해내는 여걸로 그려진 천추태후의 일대기를 그려 방영 전부터 큰 주목을 받은 드라마다.

 

2006년부터 불어 닥친 고구려 사극 열풍이 잠잠해짐과 동시에 오랜만에 선보인 고려시대 사극이라는 점, 여느 사극과는 다르게 여성, 그것도 왕의 어머니인 천추태후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세웠다는 점, 채시라, 김석훈, 최재성, 이덕화 등 쟁쟁한 배우들의 캐스팅 등 <천추태후>는 제작단계에서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과도한 상상력을 유발시키거나 다소 사실이 왜곡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고려 5대왕 경종의 비, 7대왕 목종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는 권력의 치명적 유혹과 보복의 중심에 선 격랑의 인물로 묘사됐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과 암살, 투옥, 유배 등을 서슴지 않는다. 경종의 왕후였던 천추태후는 정부였던 김치양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목종을 살해하려 했던 인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선 조선 초기 사학자들에 의해 천하의 '요부'로까지 묘사됐던 그녀가 천 년 만에 여걸로 재탄생된다.

 

결국 강조 정변(1009년)의 여파로 정부 김치양은 죽고, 자신은 섬으로 유배됐다가 황주(黃州)에서 여생을 보내지만, 전쟁과 정쟁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돌파한 그녀의 희생으로 현종 이후 200년의 평화시대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드라마는 전한다. 안으로는 명장 강감찬과 외교의 달인 서희 등과 손잡고 신라계를 견제하며, 거란의 침략을 세 차례에 걸쳐 막아낸 전략가이자 여걸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 드라마는 사극에서 항상 피동적으로만 존재했던 여성상을 탈피해 진취적인 여성상을 나타내는 데 주력했다. 대장군 이상의 무관들을 편전에 들게 하고, 무관들에게도 전시과를 지급하는 개혁을 실시하는 그녀이지만 강한 카리스마와는 달리 늘 주변의 정적들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 중 문화왕후 일가와 연속적으로 벌이는 처절한 정치보복 장면은 현실정치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다. 천추태후와 복수를 위해 소찰리와 손을 잡은 문화왕후의 실감나는 정치보복의 반전과 반전은 비정함을 넘어 안쓰러울 정도다.   

 

또한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김치양과 강조 등 남자 주인공들은 꽤 박력 있고 똑똑하게 보이지만 그들이 벌이는 사랑 이야기의 주도권은 여자들이 쥐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대의에 봉사하는 인물들로 손색이 없다.

 

드라마 속 여인들은 모두 권력과 사랑을 쟁취하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고전 드라마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드라마의 시공간적 한계가 추구하는 쾌락적 가치는 일상적 삶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페미니즘적인 사랑을 보여 주고자 했다면 여기서 여성은 사랑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지 분명히 보여주고자 한다.

 

[# 선덕여왕] 미실의 구밀복검 정치에 무릎 꿇는 권력들, 그녀의 운명은? 

 

선덕여왕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
선덕여왕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 ⓒ MBC

MBC가 월·화 사극으로 방영하고 있는 <선덕여왕>이 세간의 화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정치 사극이라는 점에서 더욱 세간의 관심을 끈다. KBS <천추태후>와  SBS <자명고>에 이어 <선덕여왕>이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대하사극끼리의 치열한 경쟁구도로 돌입한 것도 이 시점이다.

 

이요원, 고현정, 박예진, 엄태웅, 유승호 주연의 <선덕여왕>은 경주에서 연 제작보고회를 시작으로 방영 전부터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1회부터 시청자몰이를 하기 시작한 <선덕여왕>은 사극전문 촬영감독인 김영철 감독과 <이산> <대장금>을 이끈 김근홍 PD가 현장을 진두지휘하면서 흥미진진한 정치 사극을 이어가고 있다.

 

신라시대의 긴 역사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전개해 나가는 이 드라마에선 남성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여성과 권력의 관계에 포커스를 가했다는 점에서 <천추태후>와 이데올로기가 흡사하다. 특히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와 대규모 전투신 등으로 기존 사극과 확실한 차별화를 이루려 노력했음이 엿보인다.

 

그동안 사극들이 궁중에서 벌어지는 암투가 극의 전부였다면, 즉 여주인공들은 남성 중심의 '정치판'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 하나에 의지한 채 극을 이끌어갔다면 <선덕여왕>은 과감하게 궁을 벗어나 다양한 사건과 전쟁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것도 여성 중심으로 소화해 내고 있다.

 

덕만과 천명 등 여주인공들은 그 안에서 뛰고 구르며 액션을 모두 소화하고 있다. 성별만 여성일 뿐이지, 기존 남성 사극의 신화적인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가다. 특히 미실 역을 맡은 고현정은 누구보다 여성스럽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독특한 캐릭터에선 강한 권력의 카리스마가 묻어난다.

 

드라마에서 미실은 겉으론 늘 웃는 척하지만 속에는 무서운 검을 감추고 있는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정치의 내면에까지 숨겨온 바로 그 구밀복검 정치의 진수를 보여준다. 매우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를 지녔지만 자신의 권력욕과 정치적 결심에 따라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오늘의 정치와 매우 흡사하다.

 

김서현과 그의 아들 유신을 자신의 편으로 삼아 미실과 대적하려는 천명의 정치적 야심과 계략들도 앞으로 전개될 이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다. 신라왕실의 편에 서서 미실 세력과 맞서고 왕실을 위한 공을 세울 김유신의 모습이 등장하면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이 드라마가 초반부터 펼치는 권력의 암투와 대결은 마치 오늘의 정치판을 오랜 과거 속으로 끌고 간 듯하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 신라시대 원화 출신으로 미모와 계략이 뛰어나 정치권을 쥐락펴락하는 실력자 미실 역을 맡은 고현정은 캐릭터에 알맞은 의상과 메이크업은 물론, 목소리와 대사 톤까지 새롭게 설정하며 인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상대방을 협박할 때는 낮은 목소리와 차분한 톤으로 연기해 여느 캐릭터와 차별화하고 있다.

 

고현정이 연기하는 미실이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권모술수를 도모하는 모습이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것 자체가 단점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중심에서 정국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탁월한 권모술수와 구밀복검 정치가 어떤 종국을 가져올지 두고 볼 일이다.

 

[# 시티홀] 10급 공무원에서 최연소 여성시장이 된 '신미래 신드롬'

 

시티홀 SBS 수목드라마 '시티홀'
시티홀SBS 수목드라마 '시티홀' ⓒ SBS

SBS 드라마 <시티홀>(극본 김은숙, 연출 신우철)은 다른 방송사들의 사극이나 자사가 방영하는 사극 <자명고>와는 달리 현실정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미화하거나 비판하면서 한 발짝 더 다가서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처음엔 시시껄렁한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인 줄로 알았지만 정치에 대한 흥미성을 보충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이는 드라마다.

 

<시티홀>은 국내 한 가상의 도시 '인주시'를 무대로 한 정치 풍자 에피소드를 비롯해 10급 공무원에서 최연소 여성시장이 된 신미래와 부시장에서 국회의원을 거쳐 대권에 도전하는 조국 사이의 흥미진진한 사랑과 정치의 관계가 관심을 끌 만하다. 

 

특히 여주인공 신미래 역을 맡은 김선아는 지난 2005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삼순이 신드롬'을 재현하고 있다.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최연소 여성시장의 자리까지 오르는 여주인공 신미래 역을 열연 중인 그녀는 특유의 재기 발랄함을 과시하며 코믹연기의 진수를 선보이고 있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당찬 모습과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내면을 통해 눈물을 자아내는 감동적인 정치를 주민들에게 선사하려고 노력하는 여주인공. 게다가 드라마 속 신세대 여성 정치인인 그녀는 페미니즘의 깃발을 한껏 휘날리다가도 어느 순간 그 깃발을 정치를 위한 백기로 사용한다.

 

남주인공인 조국 역을 맡은 차승원의 혼신을 다한 연기 또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드라마에서 '인주시의 슈퍼맨'을 자처한 조국이 총선에서 기호 5번 무소속후보로 출마해 실제 국회의원 후보보다 더 실감나는 명연설로 모인 관중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여러분은 반성하셔야 합니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건…당신의 선택이 잘못됐던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직장을 잃어도, 집을 잃어도, 그 흔한 문화시설 하나 없어도 다 내 팔자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런 팔자를 원하셨던 겁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의 연설은 현실 정치인들의 폐부를 찌를 정도의 예리하고 현란한 내용을 담았다. 그는 또한 "인주(가상의 도시)가 바뀌어야 당신의 삶이 바뀌고, 당신의 삶이 바뀌어야 당신 아이들의 삶이 바뀝니다. 한 시민이 진정한 정치는 '국민의 삶을 정성껏 치유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칼날 같은 그 말에 제 심장은 피를 철철 흘렸습니다. 그래서 전 여러분의 삶을 정성껏 치유하고자 이곳에 선 것입니다.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을 웃음으로 치유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이어나갔다.

 

이 같은 내용이 방영된 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선 "차승원 같은 후보가 2010년 총선에 나오면 무조건 찍겠다", "연설에다 정치판이 세심하게 잘 그려져 있어서 그동안 무관심했던 정치에 대해 많은 관심이 가고 있다"는 등의 글이 줄을 이었다.

 

왜 드라마에 까닭 모를 반감을 느끼면서도 통렬해 하는 걸까?

 

이 같은 정치 드라마가 최근 시청률 상위 랭킹을 유지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치 드라마에 빠져든 시청자들은 현실 정치의 치부를 적시해내는 주인공들 언어의 영민한 '가학성'에 까닭 모를 반감을 느끼면서도 통렬해 하고 있다. 장안을 후끈 달군 정치 드라마는 이전의 사극들과는 무언가 다른 부분이 있어 주목을 끌 만하다.

 

<태왕사신기> <대조영> <주몽> 등 고구려를 소재로 했던 일련의 방송사 사극 열풍 이후 요즈음 신 사극들은 모두 한 시대와 한 국가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꾼 '위대한 왕', 기존의 수구세력과 대항하여 정치의 통념을 뒤바꾼 개혁 군주 또는 여성 정치권력을 다루고 있다.

 

<이산> <대왕 세종> 같은 드라마들이 한결같이 조선의 가장 위대한 왕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이들이 어떻게 온갖 난관과 음모 속에서도 권좌에 오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제왕 등극기'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지만 <천추태후>와 <선덕여왕>은 권력 주변의 여성과 정치적 역학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무엇보다 최근 사극들은 과거의 권력을 무덤에서 되살려, 현재의 지도자상에 투영하고자 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

 

사극과 현대극을 넘나드는 정치 드라마의 공식은 '권력의 은밀한 욕망은 만국의 공통적 현상이다', '권력이라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치명적인 유혹이다'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또 드라마에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권력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일러주기도 한다. 과거에서뿐만 아니라 현재에서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드라마 의제가 정치 현실에 옮겨 붙은 걸까. 아니면 정치현실이 드라마 의제로 옮겨 붙은 걸까. 공식이 너무도 흡사하다. 


#정치 드라마#시티홀#여성정치#선덕여왕#천추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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