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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30년을 투자해 세계 1위 기업이 될 수도 있고, 세계 1위 기업을 인수해 30년을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작년 여름, 세련된 화면과 신뢰감을 주는 성우의 목소리로 시선을 끌었던 TV 광고 중 일부이다. 광고의 주인공은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 '굳이 세계 1위 기업이 되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그냥 세계 1위 기업을 사버리면 된다, 두산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내용의 광고이다.

1896년 서울 종로에서 '박승직 상점'으로 창업한 두산은 한국기네스협회에 가장 오래된 한국기업으로 등록되어 있다. 두산건설,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두산동아, 두산타워 등 30개 가까운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광고 문구대로 인수합병(M&A)을 통해서 성장해온 기업답게 현 계열사의 절반 가까이를 기존기업 인수를 통해 확보했다.

두산의 과감한 구조조정?

두산그룹이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두산 DST, 삼화왕관, SRS코리아 3개 계열사와 한국우주항공산업(KAI) 지분을 신설되는 특수목적회사에 매각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지난 3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두산타워 기자회견장에서 두산그룹 직원이 휴대전화를 하며 로고 앞을 지나가고 있다.
 두산그룹이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두산 DST, 삼화왕관, SRS코리아 3개 계열사와 한국우주항공산업(KAI) 지분을 신설되는 특수목적회사에 매각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지난 3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두산타워 기자회견장에서 두산그룹 직원이 휴대전화를 하며 로고 앞을 지나가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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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두산이 무리한 인수합병의 후과로 최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07년에 있었던, 국내 최대 규모의 해외 인수합병으로 손꼽히는 미국 건설장비업체 잉거솔랜드(Ingersoll-Rand)의 소형 건설중장비 부문 밥캣(Bobcat) 인수 때문이다. 밥캣 인수로 두산은 세계 7위 건설중장비 업체가 되었다고 선전했지만, 51억 달러라는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빌린 돈에 대한 상환 압력과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밥캣의 실적 악화가 발목을 잡았다.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3일 두산은 계열사 중 두산DST(방위산업), KAI(우주항공산업), SRS코리아(버거킹, KFC 등 외식전문업), 삼화왕관(병뚜껑제조업) 4개사를 7808억 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매각대금을 바탕으로 밥캣 유상증자(주식을 새로 발행해서 자기자본을 늘리는 것)를 진행하고, 차입금을 상환하여 유동성 부족을 해결할 예정이다. 두산이 매각하는 계열사 4곳을 사들이는 회사는 'DIP홀딩스'와 '오딘홀딩스'라는 특수목적회사로 4개사의 지분을 각각 51퍼센트와 49퍼센트로 나눠갖게 된다.

이처럼 주요 계열사를 과감하게 매각한 두산의 구조조정을 두고 대단한 결단을 내린 승부수이며, 구조조정의 모범이라는 평이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DIP홀딩스는 두산그룹의 지주회사인 (주)두산이 2800억 원을 출자하고 나머지는 금융권에서 추가 투자하는 형식으로 설립된 회사이다. 금융권의 투자는 사실 두산이 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것이라고 보면 된다. 결국 두산이 매각한 회사를 두산이 다시 사들인 셈이다. 경영권 역시 두산이 유지하며, 5년 안에 특수목적회사를 매각하고 매각 시에는 두산이 우선매수권을 갖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자신이 판 기업을 자신이 다시 사는 꼴

따라서 두산이 구조조정을 위해 과감히 경영권을 포기하고 계열사를 매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매각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계열사를 특수목적회사에 담보로 맡기고 신규자금을 투자받은 것으로, DIP홀딩스라는 종이회사(페이퍼 컴퍼니)를 방패로 삼은 채 '눈 가리고 아웅'한 꼴이다.

또 하나의 특수목적회사인 오딘홀딩스는 미래에셋5호 사모펀드(PEF)와 IMM로즈골드 사모펀드(IMM 프라이빗 에쿼티)가 출자하고 금융기관의 차입금을 끌어들여 만든 회사이다. 하지만 재계의 한 관계자는 "오딘홀딩스를 만든 두 사모펀드의 출자자들에 두산그룹과 두산의 백기사 세력이 얼마나 있는지는 금융감독원만이 안다"는 말을 통해 오딘홀딩스 역시 실상은 두산그룹을 위한 방패막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

DIP홀딩스나 오딘홀딩스와 같은 특수목적회사(SPC, Special Purpose Company)는 원래 일시적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가짜회사이다. 부실 채권을 매각해야 하거나 회계장부에 남기고 싶지 않은 거래를 할 때, 따로 떼어서 특수목적회사를 만든 후 처리하는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투자은행들의 무리한 파생상품 거래가 지목되었는데, 파생상품 거래에 따른 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 투자은행들이 사용한 것 역시 특수목적회사였다. 회사의 회계장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면서도 실질적인 소유와 경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회피하는 구조조정

두산의 경우처럼 특수목적회사를 통한 구조조정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실제로 부채와 부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산의 장부에서 사라져서 가짜회사의 장부로 옮겨갈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면, 기술을 개발하고 투자를 늘리는 등의 노력 없이도 기업 경영이 가능하며 당연하게도 국민경제 전체 발전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산의 경우 무리한 인수합병과 새로 인수한 밥캣의 경영 악화에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인수합병 정책에 대한 평가와 밥캣의 실적 회복이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1분기 두산인프라코어는 영업이익으로 440억 원을 달성하고도 당기순손익은 1238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두산인프라코어가 51퍼센트의 지분을 갖고 있는 밥캣의 부진 때문으로, 지분법 손실액만 2200억 원에 달한다.

경영 잘못해도 잃는 게 없는 자본가들

또한 이런 식의 구조조정은 경영진과 사업자금을 투자한 금융권이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빠져나가도록 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경제위기 때마다 가장 먼저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의 칼날 아래 일자리를 잃어왔다. 일자리는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경제수단이다. 하지만 정작 기업의 경영을 책임졌던 경영진들, 핵심적으로 기업의 소유자들은 책임이 없다. 두산의 경우도 무리한 인수합병 경영을 추진한 경영진과 그에 대한 자금을 지원한 채권단은 자산을 잃지도 않았고, 경영권을 잃지도 않았다. 대신 최근 두산은 3905명에서 1840명으로 절반 정도의 인력을 감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하반기에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두산의 이번 구조조정이 경영에 대한 책임 회피와 근본적 문제 해결을 덮어버리는 좋은 방법으로 다른 기업들에게까지 전파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만약 기업가 정신이란 것이 있다면, 그리고 국내 대기업의 소유주들이 그런 정신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하면 손쉽게 세계 1위 기업이 되어볼까' 고민하기 전에 '왜 세계 1위 기업이 되어야 할까', '국민경제에서 대기업의 역할은 무엇일까' 등을 먼저 고민하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http://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수연 기자는 새사연 경제연구원입니다.



태그:#두산구조조정, #밥캣, #인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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