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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9일 오후 5시,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을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어 3호선 지하철을 탔다. 녹번역이라는,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곳으로 향하면서, 나는 마치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맛을 찾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그 모든 생각은 단 하나, 결국 '이곳에서 만드는 전통주는 어떤 맛일까'로 모이고 있었다.

그래서 2시간여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나는 박 소장님께 바로 뒤이어 있을 전통주 강의를 들어볼 수 있는지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그런데 소장님은 "수업은 들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때의 내 실망감은, 고픈 배를 부여잡고 집으로 뛰어들어와 밥통을 열었을 때 텅 빈 밥통을 보고는 무너져 내리는 마음과 흡사 비슷했으리라. 이대로 인터뷰를 끝마치고 돌아가야 한다면, 한국전통주연구소에 와서 단지 믹스커피 한 잔 마셨을 뿐이라는, 슬픈 사연을 안고 돌아가는 것 아닌가.

내 간절한 마음이 얼굴에 비치기라도 한 걸까. 박록담 소장님은 정 그러하면 수업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전문가반이라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젯밥에 관심있는 내게 제문(祭文)이 한자로 되어 있든 한글로 되어 있든 무슨 상관이랴. 전통주 한 잔에 한 발 다가간 듯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소장님을 따라 강의실을 찾았다.

전통주연구소에서 믹스커피만 먹고 갈 순 없잖아

전통주 만들기 이론 공부 중
 전통주 만들기 이론 공부 중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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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젊은 여자분이 앞치마를 두르고 체에 쌀가루를 내리고 있었다. 저녁 7시 수업이라고 했지만, 시간이 넘었는데 학생들은 다 오지 않은 듯했다. 나는 어떤 분들이 이 전통주 전문가반 수업을 듣는지 무척 궁금했다.

소장님께 사전에 알아본 바로는, 남자 요리사도 있고, 여자 선생님도 있단다. 전통주를 배우는 요리사와 선생님이라. 그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른 그분들의 이미지는 나이는 한 40대쯤 됐고, 덩치도 좋으시고, 술을 좋아하시는, 마음 좋아보이는 아저씨 정도? 

고정관념은 이래서 위험하다. 쾨쾨한 냄새가 은근히 풍기는 이곳에서 나보다 어린 20대 남자 요리사와 나보다 어린 여선생님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나름 상상했던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얼마 후, 젊은 여자분이 또 한 분 들어왔다. 이분도 역시 앞치마를 두르고는 미리 작업을 하고 있던 여자분 옆에서 작업을 도왔다. 체를 친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계속 저어주었다. 그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고서, 마치 도배풀처럼 되었을 때에야 손을 놓았다. 그 이후에도 학생들은 작업하는 동안 썼던 도구들을 씻느라 무척 바빠보였다.

잿밥에 관심 많던 나, 필기를 포기하다

나도 제일 뒷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으며 소장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공책에 받아적었다. 그날 배우는 술은 '유하주'라고 했다. 흐를 유(流), 노을 하(霞)자를 쓰고, 흰 노을이 흐르는 술이라고 했다. 색깔이 희기 때문에 탁주이고, 알콜 도수는 낮고, 누룩에 대비해 쌀이 많고, 그래서 달고 부드럽고, 주막에서 팔았고 등등…. 유하주에 대한 소장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유하주 만드는 과정
 유하주 만드는 과정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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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모두 다섯 명. 젊은 여자가 넷, 젊은 남자가 한 명이었다. 전통주를 배우겠다고 그 먼 녹번역까지 마다않고 찾아온 젊은 학생들은 소장님 말씀과 전통주에 푹 빠져있었다. 모두들 열심히 소장님 말씀을 들으며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는 질문을 했다. 엉뚱한 질문을 해서, 소장님께 "공부 좀 하라"는 꾸지람 아닌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나도 처음엔 열심히 공책에 받아 적었으나, 저장성을 높이려면 배합 비율을 어떻게 해야 하고, 뭘 하려면 뭘 해야 하고, 하는 부분에서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 그건 마치 'A이면 B이다'라는 수학 공식과도 같았다. 이는 더하기도 못하는 학생에게 비례연산을 풀라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전문가반이라서 수업을 듣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하셨던 소장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요구르트 같은 술, 술독째 퍼먹고 싶구나

이화주
 이화주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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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수업이 끝나고 지난 시간에 만들어 둔 술을 평가하고 맛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드디어 제사가 끝나고 젯밥 먹을 시간이 온 것이다. 이날은 지난 시간에 만든 두 가지 술을 맛보았다. 

이화주는 이화국이라는 쌀가루 누룩으로 만든 술인데, 마치 떠먹는 요구르트 같은 상태였다. 내가 보기엔 미숫가루에 물을 탄 것 같았는데, 걸쭉하니 '맛있었다'. 온도 때문에 제대로 발효가 안 된 상태라고 했지만, 나는 맛이 깔끔해서 아주 좋았다. 아주 술독을 부여잡고 퍼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발효된 술을 베보자기에 거르기
 발효된 술을 베보자기에 거르기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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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성향이란 술을 걸렀는데, 이 술은 시큼하니 조금 어색한 맛을 냈다. 그래도 맛있었다. 하긴 애주가인 내게 무언들 맛이 없을까마는. 이화주도 그렇지만 집성향도 잡다한 맛이 나지 않았다. 깔끔하다. 조미료 범벅인 떡볶이를 먹다, 다시 국물로 맛을 낸 떡볶이를 먹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작은 잔에 고작 세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취기가 올라왔다. 기름진 빈대떡을 안주 삼아, 쭉 들이키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내가 이 제사의 제주(祭主)가 아니니 마음을 비우고는 뒤로 물러났다.

"술은 정성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빚는 것"

술을 걸러 내기
 술을 걸러 내기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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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마지막엔 이론 수업 전에 개어서 식혀놓은 쌀죽에 누룩을 넣고 버무리는 일을 시작했다. 전통주 만들기가 얼마나 힘든 건지, 버무리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쌀죽에 맷돌로 간 누룩을 넣고, 쌀죽이 물처럼 흘러내릴 정도까지 계속 오로지 한 팔만 사용해서 버무렸다. 쉽게 말해 누룩이 쌀죽을 삭혀서 물이 될 정도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 버무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지 보고 있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정말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빵반죽 하는 기계가 있듯, 쌀죽 버무리는 기계가 있다면 쌀 빚기가 훨씬 쉽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자, 소장님은 "술은 정성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빚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힘들게 만든 유하주는 일주일 동안 발효를 하고, 다음 수업에 다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수업은 그렇게 3시간 동안 이어졌고, 마지막쯤엔 수박을 나눠 먹고,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어느덧 밤 10시, 긴 수업으로 피곤했을 학생들 손에는 직접 만든 이화주가 한 봉지씩, 집성향이 한 병씩 들려 있었다. 물론 내 손에도 집성향 한 병이 들려 있었다.

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전통주를 정말 좋아하고, 널리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술도가 주인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던 올해 스물아홉 호텔조리사 강병규씨의 꿈이 빨리 이뤄지길 바라면서, 집성향 한 잔을 따라놓고 그날 학생들의 열정을 떠올려 본다. 아, 술맛 좋다, 혼잣말을 하면서.

받아온 술, 아끼느라 소주잔에 마시면서.
 받아온 술, 아끼느라 소주잔에 마시면서.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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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만들면, 막걸리 못 마셔요"
수업이 시작되기 전 잠깐 짬을 내어, 일찍 와서 쌀죽을 만들던 두 여학생과 짧은 인터뷰를 했다. 배소영씨는 이제 스물여덟 살, 직장인이라고 했다. 최경은씨는 서른 살, 얼마 전에 직장을 그만둬 무직이라고 했지만, 식당에서 설거지 '알바'를 한다고 했다.

최경은(왼쪽), 배소영(오른쪽)
 최경은(왼쪽), 배소영(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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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분 다 무척 젊으신데, 어떻게 전통주를 배우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요.
최: "어떻게 알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전통주연구소를 알게 됐어요. 그냥 관심만 갖고 있다가, 작년부터 배웠어요. 처음에는 막걸리를 만들어 먹겠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배우다보니 전통주가 막걸리만 있는 게 아니더라구요. 정말 맛있는 술이 너무 많아서,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까지 배울 게 있어요."

- 그럼, 기초반부터 하신 거네요. 지금 전문가반이잖아요.
최: "네, 네 번째 반이에요."

- 소영씨는 어떻게 배우기 시작했어요?
배: "저도 막걸리를 직접 만들어 먹고 싶어서 집에서 만들어봤는데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어디 가르치는 데 없나 하고 찾아보다가 전통주연구소를 알게 됐어요. 왠지,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실 것 같아서 배우게 됐어요."

- 원래부터 막걸리를 좋아했나요.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최: "막걸리가 맛있잖아요. 그래서 직접 만들어볼까 생각한 거죠."

- 배운 지 일 년이 됐는데, 배우기 전이랑 전통주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게 있나요.
배: "많이 달라졌죠. 처음에는 막걸리가 맛있어서 배우기 시작한 건데, 정작 지금은 막걸리를 못 마셔요. 시중에서 파는 막걸리는 맛이 없어요. 연구소에서 직접 만든 게 정말 맛있으니까요. 차원이 달라요. 저희 집 식구들도, 여기 술 마셔 보고는 지금은 파는 막걸리 안 마시거든요. 그게 큰 거죠. 여기서 만든 수준으로 전통주를 팔면 우리 술이 진짜 맛있는 거라고 사람들이 알 텐데, 그게 아직은 어렵죠."

- 그럼, 직접 집에서 술을 만들어보시나요?
최: "저는 잘 안 하는데, 다른 분들은 많이 하세요."
배: "집에서 해보기는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서, 실패를 많이 해요."

- 여기서 배운 걸 어떻게 활용하겠다거나 하는 계획 있으세요?
최: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데요.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것처럼 술을 담가서 먹고 싶어요."
배: "술을 만들어 판매하는 게 불법인데, 그것만 어떻게 해결되면, 주변에 마시고 싶다는 사람들한테 팔아보고 싶어요. 그냥 나눠주면 더 좋겠지만, 재료 값을 제가 다 감당할 수는 없으니깐요."

- 전통주를 배우고 싶지만 머뭇거리는 분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최: "정말 맛있어요. 자기가 잘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술도 있다, 맛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정말  새로운 세계가 열려요."
배: "저는 처음에 기초반 듣다가 술이 정말 맛있어서 이걸 계속 배워야 되겠다 해서 전문가반까지 왔거든요. 전통주 정말 맛있어요."


태그:#전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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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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