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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는 곳마다 뜻밖의 상황을 연출하시는 우리 어머니가 그날은 우리 고장 군수님 앞에서 한바탕 웃음바다를 만드셨다. 잔뜩 긴장하고 군수님과 뻣뻣한 자세로 악수를 나누던 동네 사람들이 와르르 담벼락 무너지는 소리를 내면서 폭소를 터뜨렸고 당황한 군수님은 사태 수습을 위한 어색한 웃음을 애써 짓느라 한동안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이 마을 촌로들을 더 웃게 만들었다.

 

마을회관에서였다.

 

동네 이름을 옛 이름으로 바꾸고 현판식을 하는 자리였다. 스무 가구 남짓 되는 산골마을에서 군수님까지 모시고 치르는 행사라 우리는 달포 전부터 준비를 했었다. 주민회의도 여러 차례 했는데 현수막은 몇 개를 달고 떡은 몇 말을 할지, 초청장은 몇 장이나 인쇄하면 좋을지 분분한 의견들이 소주잔과 함께 어지럽게 오고갔다.

 

괜히 핏대를 세우는 할아버지가 있으면 술 한 병이 비워지고, 안주가 남았다고 또 술 한 병이 더 바닥나곤 했었다. 

 

이장 트럭을 타고 면 사무소로 가서 행사용 천막과 접이의자 120개를 싣고 온 것은 행사 하루 전날이었다. 막걸리 한 통을 다 비워가면서 너댓 개의 천막을 치고 정면에 연단도 만들었다. 대형화분과 현판도 전날 도착했다. 버스 종점에서부터 마을회관까지 길 가 풀들을 매느라 호미를 들고 오리걸음을 하기도 했다.

 

현판식 날 새벽부터 회관 가마솥에 돼지다리를 삶느라 이장 부인이랑 부녀회장이 분주했다. 마을 방송은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를 서너 차례나 반복하면서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 해 주실 것을 당부했다.

 

계획했던 그대로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준비가 잘 진행되었다. 기대했던 대로 날씨마저 화사했다. 우리 어머니의 특별연출만이 예상 밖이었다.

 

치매가 심하신 어머니도 생일 선물로 받았던 생활한복을 꺼내 입고 기저귀까지 산뜻하게 바꿔 차시고는 휠체어를 타고 행사장으로 갔다. 고분고분 내가 하자는 대로 어머니가 잘 따라 주신 것까지 기대 이상이었다.

 

농협조합장도 오셨고 군의원도 오셨다. 면장도 오셨고 신협이사장도 오셨다. 아랫마을 이장은 물론 농업기술센터 과장도 오셨다. 산골마을이 사람들과 자동차로 북적였다.

 

화장까지 한 동네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여기서부터 그날 해프닝의 조짐이 있었지만 나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머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아무 기억과 마구잡이로 연결하여 혼자 반가워하고 엉뚱한 안부를 묻곤 하셨다. 듣기 좋은 덕담이면 마음이 놓였고 눈치 보이는 흉허물을 들추어내면 내가 민망했다.

 

"고사리 할머니 아니오? 집에 불이 났다더만 오째 고사리는 안 탔나?"라고 해서 한 할머니가 삐치기도 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어머니는 말씀이 일방적일 수밖에 없어 동네 할머니들은 손뼉을 치면서 웃어대는 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군수님 앞에서도 그랬던 것이다.

 

군수님이 도착하자 행사장은 가벼운 긴장과 정중함이 조성되었다. 입구에서부터 차례로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기 시작한 군수님이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 오셨다. 한 사람도 빼 놓지 않고 악수를 하셨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동네 노인들은 허리를 굽히면서 군수님의 손을 맞잡았다.

 

어머니 차례였다.

 

군수님 손을 쩔쩔 흔들면서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도 크게 반겼다.

 

"아이고.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요즘 안 바쁘나?"

 

어머니의 이 한 마디에 손을 잡힌 군수님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머리도 벌써 허옇게 쉬었네? 너도 인자 늙는가보다. 너 올해 몇 살이고?"

 

어머니 말씀이 계속되자 상황을 눈치 챈 참석자들이 와르르 와르르 폭소를 터뜨렸다. 행사장의 긴장과 정중함은 어느새 축제 분위기 특유의 유쾌함으로 바뀌었다. 군수님은 공손하게 허리를 어머니 휠체어까지 굽히며 네네, 했다.

 

 

높으신 군수님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었다. 이 순간 우리 어머니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http://cafe.naver.com/mobo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동명마을, #현판식,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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