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팔려."함께 사는 '동거녀1'의 싸늘한 한 마디가 귓전을 때렸다.
"너만 X 팔리니? 나도 그래. 난들 이러고 싶었냐고. 지금 상황에서 그런 가시 돋친 말이 무슨 득이 된다고.""득 되라고 한 것 아니야."말대꾸까지 하며 뻣뻣하게 나오는 동거녀1이었다.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 문제는 이미 발생한 건데. 그런 말 한다고 이 상황이 바뀔 것도 아니고."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어떡하니"만 연발하며 정신 없이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거기 보안경비 회사 전화번호 있잖아. 전화 좀 해 볼래? 아님 911이라도 부르던가.""엄마가 해. 잘못한 사람이 해야지."'쌀쌀맞은 ㄴ!'누구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는데 동거녀1의 반응은 정말 쌀쌀맞았다. 아니 쌀쌀맞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주방에서 난 냄새, 화를 부르다냄새가 진동했다. 방에 있다가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한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단거리 선수 속도로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아악, 이게 무슨 일이지?
이미 늦었다. 오븐 위로 보이는 빨간 불꽃이 냄비를 그을리고 있었다. 냄새는 고약했고 연기는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건강에 좋은 '엄마표 도시락'을 먹인다고 도시락을 준비한 게 화근이었다. 저녁을 잘 먹고 다음 날 챙겨갈 아이들의 샌드위치 도시락을 싼다고 오븐 위에 감자를 올려놓았는데 이런 정신머리라고는, 그만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었다.
냄비 안에서 잘 익어가던 감자는 쫄아들었고 이내 석탄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까운 냄비 하나 바싹 태워 없애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주방의 환풍기를 돌리거나 집안에 있는 창문 다 열어제쳐 환기를 시키면 끝나는 '일반'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벌여놓은 상황은 예사롭지 않은 '특별' 상황이었다. 그냥 특별한 게 아니라 심각한, 아주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될 조짐을 보였다.
"삐이~ 삐이~"갑자기 주방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성능 좋은 '미제' 경보기에서 터져 나오는 경보음이었다. 그 소리는 초메가톤급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큰 경보음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어쩌면 조용한 밤, 한적한 주택가에서 울리는 경보음이어서 더 크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 끔찍한 소리는 나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악, 무슨 소리가 저렇게 크다냐!'
웬수같이 터져나오는 경보기의 울음이었다. 그 소리는 대단히 규칙적이고 목청껏 외쳐대는 고함이었다. 키 크고 덩치 좋은 미식 축구선수가 운동장에서 포효하듯 외치는 괴성이었다. 더구나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그 소리는 가히 위협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험상궂은 표정의 동거녀1이 "X 팔린다"고 했던 말도 사실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 나도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어디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우리 집 근처 주택가는 실버타운이라 불릴 만큼 나이든 분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초저녁부터 적막공산을 이루는 아주 조용한 동네였다. 그런데 바로 그 '소음제로'인 청정 타운을 우리 집 깡패(?) 경보기가 완전히 들쑤셔놓고 있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원인 제공을 한 '불량 주부' 내가 있었지만 말이다.
함께 사는 다른 '동거녀2'도 이런 사태를 야기시킨 엄마가 원망스러운 듯 "지금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 내다보고 있어"라고 점잖게 한마디 거들었다.
'아, 그래. 나도 안다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굴욕적인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내가 그걸 모르겠냐고?'
죽지 않는 경보음 때문에 결국 911을 부르다
오븐 위에 올려놓은 감자가 원인이었다. 물론 그 감자가 다 타도록 방치한 내가 직접 원인이었고. 하지만 여느 집과 달리 사태가 커졌던 것은 바로 집안 곳곳에 설치된 든든한 보안장치 때문이었다.
지난 해 여름,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전 주인은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그런데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자식들은 이러저러한 보안 장치를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화재가 발생할 경우, 의사가 필요한 경우, 경찰이 필요한 경우 등 여러 경우에 대비해 비상벨이 준비되었고 각종 보안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집 바깥에는 이 집이 보안 장치가 잘 된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노란 스티커가 현관문, 창문, 뒷문, 차고 등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내 실수로 집안에 탄 냄새와 연기를 들이게 되니 경보기가 작동한 모양이었다. 물론 우리는 이사를 하면서 보안장치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보안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녹음된 음성만 나올 뿐 직원과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메시지를 남겼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결국 죽지 않는 경보음을 죽이기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건 911을 부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경찰은 시민들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민중의 지팡이'이기에 그들이라면 슈퍼맨이 되어 내 어려움을 해결해 줄 것 같아서였다.
전화를 직접 걸었다. 처음에는 동거녀1, 2를 시켜 민중의 지팡이와 통화를 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동거녀1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라며 까칠하게 나왔고 실제 전화걸기를 거부했다. 또한 동거녀2는 다소 겁먹은 듯한 얼굴로 있어서 차마 시키지 못했다.
전화가 연결이 되자 전화기에서는 삐~소리 같은 무전기 신호음이 터져 나왔다.
911: "무슨 일인가?"나: "이런 일로 전화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우리 집 보안장치가 계속 울리고 있어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911: "보안 경비 회사에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할 텐데."나: "해봤다. 그런데 지금 통화가 안 된다. 메시지를 남겼지만 연락이 안 되고 있다."911: "네 이름이 뭐냐? 알았다. 기다려라. 너희 집 근처에 있는 경찰을 속히 가도록 하겠다."위성으로 우리 집 추적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주소도 묻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집으로 온다고 하는 걸 보면.
전화를 끊고 나서도 경보기의 삐~ 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나는 경찰이 와서 뭔가를 해줄지 모르지만 그 동안만이라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려고 했다. 이것 저것 눌러 보면서.
그런데 앗,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뭘 건드렸지? 아니면 저 스스로 때가 되어서 잠잠해진 것인지? 시끄럽게 울려대던 경보음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살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911에 전화를 걸었다.
"아까 전화한 사람인데 우리 집 경보기가 마침내 멈췄다. 그러니 올 필요 없을 것 같다."계속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곁에 있던 심란한 표정의 동거녀2가 경찰이 왔다고 알려줬다.
"엄마, 경찰이 왔어."일단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다.
"미안하다. 아까 시끄러운 경보음 때문에 전화를 했는데 이제 멈췄다. 내가 뭘 눌렀는지 알 수 없지만.""아, 그러냐? 잘 됐다. 실은 우리가 와도 네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경비회사에서 직접 나와서 해결해 줘야지."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나도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궁금한 점을 경찰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왔느냐? 네가 와도 해결을 못할 거라면서?(웃음) 그냥 전화로만 그렇게 말하고 오지 말지.""우린 신고가 들어오면 일단 출동한다. 실제로 네가 말한 상황이 맞는지 직접 우리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아, 그러냐? 정말 고맙다. 그렇게 성의를 다해서 시민을 위한다고 하니."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음산한 밤, 우리집 앞마당에서는 무섭게만 느껴지던 미국 경찰과 다정한 대화가 오갔다.
내 부주의로 감자를 태우고 고약한 그 냄새 때문에 경보기가 작동했던 사건. 바로 그 사건 때문에 미국 911까지 출동했던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런 끔찍한 일마저 나만의 특별한 경험일 테니 그리 고약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고? 세상의 모든 경험은 결국 그리운 추억이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