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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철을 맞은 복분자가 까맣게 익었다. 수확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제 철을 맞은 복분자가 까맣게 익었다. 수확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 이돈삼

"아주머니! 여기 복분자 술 있죠? 두 병만 주세요."

"왜? 요즘 기력이 딸리나? 복분자를 찾게."

"아니, 소주 안 마시는 여직원들 복분자 와인 한 번 맛보라고, 피부미용에도 좋다잖아."

 

달포 전쯤이었다. 간만에 마련된 직원 회식 자리. 남자 동료가 여직원을 배려한다며 복분자 술을 주문, 소주를 마시지 않는 직원들에게 한 잔씩 돌렸다. 그러더니 자기도 복분자 술을 마신다.

 

술병을 보니 기존의 복분자주와 다르다. 토속적인 느낌이 드는 전통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디자인이 세련됐다. 병의 모양새가 미끈한 게 외국산 와인처럼 생겼다. 양주 같기도 하다. 눈길을 사로잡는다.

 

"병이 좀 특이하게 생겼네. 그게 그렇게 맛있는가?"

"와인이야, 복분자 와인. 그냥 복분자 술이 아니고. 얼마나 부드러운데, 깔끔하고. 함평에서 만들었는데 프랑스산 와인보다도 더 맛있어."

"난 행사장에 갔을 때 몇 번 마셔봤는데 좋던데. 식사할 때 한 잔씩…."

"그래요, 나도 한 잔 따라 줘보세요."

 

맛이 좋다. 와인이라면 아직 초보자 수준이지만 붉은 색깔이 입맛을 돋운다. 복분자의 독특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혀끝을 감도는 달짝지근한 맛이 목넘김으로 이어진다. 부드럽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으로 이어진다. 금세 두 병이 바닥을 보이고 "두병 더"를 외친다.

 

 전통주에 머물던 복분자주가 복분자 와인으로 변신했다. 조병준 함평천지복분자영농조합법인 대표가 생산공장에서 복분자 와인 '레드마운틴'을 한 잔 들고 있다.
전통주에 머물던 복분자주가 복분자 와인으로 변신했다. 조병준 함평천지복분자영농조합법인 대표가 생산공장에서 복분자 와인 '레드마운틴'을 한 잔 들고 있다. ⓒ 이돈삼

"그것도 많이 마시면 취해! 술도 못하면서…."

"괜찮아, 이거 알코올 도수 13%인가 15% 밖에 안돼."

"난 과일주는 안 마셔. 마시고 나면 머리 아프고, 뒤끝도 안 좋고…."

"이 술이 안 좋은 게 아니라 과일주 자체를 안 좋아하는 거겠지."

"그래, 난 과일주하고는 안 맞아."

 

"이건 다른 과일주하고 달라. 뒤끝이 깨끗해. 머리도 아프지 않고…. 내가 보기엔 외국산 와인과 구별 못하겠더라."

"나는 산에 갈 때 조그마한 병 하나씩 들고 가는데. 드링크병만한 크기로 나온 것이 있는데, 산행에 지장도 주지 않고 피로도 빨리 회복시켜줘."

 

회식 자리의 주제가 복분자 와인으로 옮겨지더니 자연스레 품평회로 변했다. 그 사이 소주를 마시던 직원들도 복분자 와인을 섞어 '소·복'으로 마시고 있다. 빈병의 수가 늘어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대화의 깊이도 더해간다.

 

"지난번 설 때 이 와인을 선물했는데, 받은 사람들이 좋아하더라."

"비싸지 않나? 비싸게 생겼는데…."

"그렇게 부담 없었어. 한 세트에 2만 원대, 3만 원대가 있는데 괜찮았어. 고급스러워 보이고…. 물론 한 병에 5만원, 7만원하는 것도 있는데, 그건 서로 부담이잖아."

 

"한 세트에 2∼3만원이면, 실제 한 병 값이 만원도 안 되겠네. 포장값 빼면…. 난 와인이라고 해서 비싼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그 정도면 큰 부담 없이 사마실 수 있겠다."

"근데, 어떻게 책임지려고 복분자술 선물을 했어? 요강이라도 깨면 어떻게 하려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웃음). 집에서 부부끼리 기분 좋게 나눠 마시라고 했지."

 

 복분자 와인의 원료가 되는 유기농 복분자. 함평천지복분자영농조합법인의 '레드마운틴' 생산공장에서 발효공정을 기다리고 있다.
복분자 와인의 원료가 되는 유기농 복분자. 함평천지복분자영농조합법인의 '레드마운틴' 생산공장에서 발효공정을 기다리고 있다. ⓒ 이돈삼

이야기는 복분자의 효능으로 이어진다. 소변줄기가 너무 세어 오줌항아리가 뒤집어져서 '복분자(覆盆子)'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얘기에서부터 복분자가 시력에 좋네, 머리를 검게 해주네, 살결을 부드럽게 해주네, 약리작용을 하네 등등 끝이 없다. 나중엔 변기통이 깨지네, 바위를 뚫네 하면서 허풍으로 흐른다.

 

몇몇 직원은 고급스러우면서도 가격이 비싸지 않다며 올 추석선물로 활용해야겠다고도 했다. 그때 귀담아 듣고 있던 함평출신 직원이 끼어들었다.

 

"다들 복분자 좋은 건 알아가지고 말야. 이 와인은 지역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복분자만을 사들여서 만들고 있다네. 농업인들이 출자해서 만든 회사가 생기면서 복분자 재배농민들 소득도 짭짤해졌을 걸. 발효할 때 클래식을 틀어주는 클래식공법을 써서 맛과 향도 좋아. 지난번에 남도명주 선발대회에서 이게 최우수상을 받았잖아. 해외로 수출도 되고 있는데?"

 

"맞다. 일본에서 본 적 있다. 지난번에 일본 갔을 때 한 음식점에 갔더니 거기에 있더라. 정말 반갑더라고. 외국에서 우리 것을 보니까."

"그래, 일본 미국 인도네시아 또 어디더라, 좌우간 여러 나라로 수출도 해."

 

 복분자 와인 '레드마운틴'은 계약재배를 통해 생산된 유기농 복분자만을 원료로 하고 있다. 한 농업인이 레드마운틴의 원료가 될 복분자를 수확하고 있다.
복분자 와인 '레드마운틴'은 계약재배를 통해 생산된 유기농 복분자만을 원료로 하고 있다. 한 농업인이 레드마운틴의 원료가 될 복분자를 수확하고 있다. ⓒ 이돈삼

농업인들이 출자해서 만든 회사라. '오죽했으면 농업인들이 직접 나섰을까' 하는 생각에 순간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다른 복분자보다 훨씬 더 정직하게 가꿨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농업인들이 막걸리도 아닌 와인을 통해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제품이 많이 팔려서 돈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복분자주에서 진화한 복분자 와인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혹시 이거 알고 있는가? 김정일 국방위원장한테도 선물로 전달됐다는 거? 재작년인가 언젠가 광주에서 6·15남북공동선언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이 있었잖아. 그 행사의 만찬주로 쓰이고 또 북한에서 온 사람들한테 한 상자씩 선물하고 김 위원장한테도 전달해달라고 보냈잖아. 요즘 이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가? 어쩐지 프랑스산 와인보다도 더 맛이 좋은 것 같더라. 유럽시장에 가도 괜찮겠어. 맛도 좋고, 병도 멋있고…. 그래, 우리가 유럽으로 보내는 거야. 유럽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지도록…."

 

가급적이면 앞으로 지역에서 생산된 복분자 와인을 애용하기로 의기투합하고 회식이 끝났다. 공무원들답게 지역상품 애용운동으로 귀착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하나같이 바르다. 평소 같으면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갈지(之)'자 행보를 했을 사람까지도. 어깨도 쭉 펴고 팔에도 힘이 들어가 있다. 씩씩하기까지 하다. 저게 복분자의 힘인가?

 

 함평천지복분자영농조합법인의 복분자 와인 '레드마운틴' 생산공장. 지금까지의 복분자 술을 와인으로 변신시킨 곳이다.
함평천지복분자영농조합법인의 복분자 와인 '레드마운틴' 생산공장. 지금까지의 복분자 술을 와인으로 변신시킨 곳이다. ⓒ 이돈삼

#복분자#레드마운틴#함평천지복분자영농조합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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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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