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뱃살에 미안하다. 뱃살에 대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마른 체격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30대 후반까지, 두둑한 뱃살은 남의 것으로만 생각했다. 특히 청년기에는 마른 체격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다며 동정을 사기도 했다.
나는 가끔 사진첩을 꺼내 대학시절에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30여 년 전 나의 모습이지만 몹시 어색하게 다가온다. 얼굴부터 상하반신, 거기에 달린 팔다리까지 아주 날씬한 모습이 지금과 너무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군복에 검정물을 들인 위아래 옷을 마치 유니폼이나 되는 것처럼 나는 그런 차림으로 대학 4년을 보냈다. 이런 모습이 얼핏 비쩍 마른 북한 병사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변하다니 얼굴에 살이 붙어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중년의 티를 강하게 풍기고 있으며, 두터워진 뱃살을 감추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도 헛수고가 되고 만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뱃살로 인해 인사받을 때가 잦다. 어려운 세상사에 할 얘기가 많지만 나온 배를 매개로 첫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유쾌한 일이 못 된다.
한 때는 배 나온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나이상한 것은 배가 나왔다고 직설화법으로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에둘러 듣기 좋게 말하여 나의 기분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요즘 신수가 훤하십니다.""풍채를 뵈니 좋은 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인사는 그런대로 듣기 좋은 인사말에 속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나온 배를 겨냥해서 인사하는 경우도 있다.
"6,70년대는 배가 조금 나와야 사람 행세를 했다죠?""배가 좀 나와야 든든하게 보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도 내가 그런대로 듣고 넘길 수 있는 것들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속담을 들먹이며 나의 배를 빗대 말을 건넨다.
"배가 남산이 되려면 아직 멀었군요.""뱃살은 뱃심과 통한다고 하네요." 지난 시절 비쩍 마른 신체는 내 마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가 적당히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긴 열악한 환경에 기인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잃은 나에게 구차한 삶이 앞에 주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참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홀로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고학(苦學)하며 공부했고 또 사회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늘 허기진 배로 인해 움츠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 때 나에겐 배 나온 사람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어느 정도의 연치(年齒)를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온 배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뱃살을 넉넉함과 연결 지어 쉽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마 40 중반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나온 배를 매개로 내게 인사를 해올 정도로 뱃살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두통을 앓게 되리라고는 예전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나의 뱃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뱃살이 찌면 빼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국가 GDP가 낮고 살기 힘든 시절, 부(富)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뱃살이 지금은 건강에 적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두 시간 이상 걷기 운동을 했더니...현대의 성인병이 배가 나온 사람에게 쉽게 기생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뱃살과의 전쟁은 중년층 이상의 성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헬스클럽에 등록 해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또 어떤 이들은 조깅을 하면서 체중 조절을 하고 있다. 그것도 아니면 다이어트 식품을 애용함으로 몸무게를 줄이는 방법을 쓰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한때 걷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며 뱃살을 뺄 생각을 가지고 실천에 옮겼던 적이 있다. 건강 검진을 받은 후 나온 고지혈증이라는 진단이 계기가 되었는데, 담당 의사가 매일 정기적으로 일정 시간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나의 신체조건(양 하지 소아마비)에 맞는 운동이라며 권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훼손되어서가 아니다. 사는 동안 건강을 유지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이 같은 생각일 것이다. 특히 어릴 때부터 건강에 치명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나는 늘 건강한 삶을 희구했다. 그런데 뱃살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당해야 하다니….
나는 의사의 권면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열심히 걷기 운동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걷기 운동을 개시한 지 두 달여가 지난 뒤, 무릎 관절에 통증이 느껴졌다. 왼쪽보다 오른쪽 다리의 통증이 더 심해 걷기 운동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하반신이 약하기 때문에 상반신의 무게를 버텨 내기가 쉽지 않은 신체 조건임을 먼저 주지시켜 주었다. 운동을 지속할 경우 무릎 관절이 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걷기 운동을 멈추는 게 좋겠다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뱃살 빼려다 무릎 관절이 훼손되면 양다리를 보조기에 의지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목발, 휠체어 아니면 장애인용 전동차! 나는 화들짝 놀랐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내 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음에서다. 나는 뱃살 빼려는 걷기 운동을 멈추고 말았다. 장애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은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할 수 없게 되다니! 맥이 쪽 빠졌다. 내가 뱃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두고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했던가!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하겠다. 식이요법으로 체중을 줄이는 방법도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궁즉통(窮則通)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나의 뱃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좀 알려주세요!
덧붙이는 글 | '뱃살아 미안해' 응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