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역무원이 지키는 간이역과 그렇지 않는 간이역이지요. 간이역이라는 같은 이름을 지녔지만 직접 마주하면 둘의 느낌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이 존재합니다. 섬으로 치면 사람이 사는 섬과 무인도의 느낌이랄까요.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있는 사릉역은 경춘선 기차역 중에 기차의 정차 횟수가 가장 적은 무인도 같은 간이역입니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엔 키 작은 소나무 하나 ♪' 라는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작고 소박한 역이지요.
사릉역은 퇴계원역과 금곡역 사이에 있는 경춘선 무궁화호 전용 기차역으로 1939년에 태어났습니다. 개통 이후 한 번도 보통역으로 승격되지 못한 단출한 역이지만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시골역 같은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간이역입니다. 얼마 안 있어 경춘선이 전철화 되면 칠십년간의 긴 세월을 뒤로 하고 사라질 운명이기도 하구요.
간이역 이름치고는 좀 특별해서 '사릉'을 검색해 보았더니 어린 나이에 권력다툼에 희생된 조선시대 6대 임금인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가 묻힌 곳이네요. 15살에 왕비로 책봉되어 당시 14살의 남편인 단종과 일 년밖에 같이 지내지 못한 비운의 정순왕후 송씨 (세종22년 1440년 ~ 중종16년 1521년) 마음 속에 비명에 간 단종을 생각하며 긴 세월을 살았을 것이라 여겨 무덤의 이름도 사릉(思陵)이라고 지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사릉역 또한 분위기도 무척 차분하고 간이역 특유의 고요함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사색에 빠지게 합니다.
사릉역에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려고 지도를 보니 왕숙천이라는 오래된 역사가 느껴지는 이름의 하천에서 가깝더군요. 왕숙천(王宿川)은 한자 이름 그대로 왕이 묵었던 곳이랍니다. 하천의 상류인 진접읍 팔야리에서 태조 이성계가 여드레를 묵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세조를 광릉에 장사 지낸 후 왕이 잠든 곳이라고 해서 왕숙천이라고 이름지었다는 설도 있으니 조선의 왕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물줄기임은 틀림이 없네요.
그러고 보니 광릉 수목원으로 유명한 세조의 무덤 광릉도 왕숙천 상류에 있고, 태조 이성계의 무덤을 포함하여 아홉기의 무덤이 있는 동구릉도 왕숙천 가까이에 있네요. 가히 조선 왕들의 사연으로 가득한 왕들의 하천으로 불릴만 하네요.
왕이 묵어간 너른 하천을 따라 달리다중앙선 전철을 타고 구리역에 내려서 왕숙천을 따라 상류인 북쪽으로 애마를 타고 달려 갑니다. 한강의 다른 하천과 마찬가지로 왕숙천에도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만들어져 있어서 씽씽 기분좋게 페달을 밟습니다.
왕숙천은 제가 사는 동네의 불광천이나 홍제천과는 다르게 왕이 묵어갔다는 하천답게 강폭이 매우 넓은 하천이네요. 강 건너에 오가는 사람들이 개미만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어제 비가 많이 내렸는지 불어난 하천가에서 동네의 낚시꾼들이 알록달록한 파라솔을 세워놓고 강변에 줄줄이 앉아서 찌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얼마를 달려 갔을까, 갑자기 자전거도로가 사라지고 갈대밭과 습지가 나타납니다. 아마 왕숙천의 옛 모습이 이랬을 것 같은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풍경입니다. 어제 내린 장마비에 먹을 거리가 많아져 찬거리 사냥을 나온 하얀옷을 입은 크고 작은 여러 마리의 백로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그 옛날 조선왕들의 가족들이 왕숙천을 산책하는것처럼 보이네요.
할 수 없이 바로 위쪽 둑길로 올라가 비포장길이지만 그리 험하지는 않은 둑길을 내달립니다. 둑길가에는 목청좋은 닭을 키우는 집들도 보이고 담 밑에 도라지꽃, 백일홍 등의 예쁜 꽃들과 옥수수, 호박 등이 자라는 작고 낮은 집들이 있어 페달을 천천히 밟게 합니다.
그런 둑길이 끝날 즈음 사능리 표지판이 보이고 동네에 오래 사셨을만한 나이드신 주민분에게 사릉역의 위치를 여쭤봅니다. 주민분이 알려준 길로 두리번거리며 달려 가자니 저 앞에서 경춘선 기차가 이쪽 방향이라고 알려 주는 듯 거친 금속성의 숨을 쉬며 지나가네요. 어디서 띵똥띵똥 하는 추억의 소리가 들리기에 보니 사릉역을 코 앞에 두고 만난 기차 건널목에서 들려옵니다. 직관 건널목이라고 써 있는 나무 간판도 붙어 있고 작은 사무실에서 근무하시는 초로의 직원분도 계시고 건널목 옆에는 텃밭도 가꾸어져 있는 정겨운 곳입니다. 이런 건널목은 그냥 지나치기가 왠지 아쉬워 직원분과 얘기도 나눌 겸 알고는 있지만 사릉역의 위치를 또 여쭤봅니다.
사람들을 피해 은둔하듯 숨어 있는 간이역간이역 사릉역은 초행일 경우 찾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역 입구의 길도 비포장의 흙길이이며 평범한 옆 집처럼 붉은 벽돌로 된 작은 건물이 숨어 있다시피 동네 한구석에 빼꼼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진건 파출소가 있습니다) 사릉역이라고 써 있는 파란색의 간판과 옆의 철로가 아니었으면 기차역인 것을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역무원은 없지만 역사 안 서너평의 공간에는 나무의자와 경춘선 기차 시간표 등이 깔끔하게 놓여 있습니다. 간이역을 아끼는 동네분이 틈틈히 명예 역장일을 하신 덕분에 무인역이지만 방치된 느낌은 나지 않습니다. 저도 동네에서 가까운 무인 간이역 명예 역장직에 지원했다가 높은 경쟁률(?)에 떨어진 기억이 나네요. 보수도 없는 명예 역장일에 의외로 많은 분들이 지원했던 걸 보니 기차와 간이역을 추억하고 아끼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군요.
제 키만큼 자라난 옥수수밭과 텃밭에 둘러싸인 고요하기만한 간이역과 기차길에 동네 주민 몇 분이 담소를 나누며 밭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무슨 그림에 나오는 풍경 같습니다. 손님의 승하차를 위해 하루에 여섯 번 경춘선 기차가 잠깐 머물다 간다니 그냥 찾아간 사릉역에서 기차와 마주치는 것은 기분좋은 행운이겠습니다. 게다가 틈틈히 들른다는 명예 역장님이라도 만나게 되면 더욱 반갑겠지요.
경춘선 중에서 가장 예쁜 간이역 중에 하나라는 사릉역의 명성(?)을 듣고서 찾아갔지만 저에게는 예쁘다기보다는 사색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의 간이역입니다. 종종 열차가 오지만 숨가프게 달리며 역을 스쳐 지나갈 뿐인데다 역무원도 없다 보니 인적이 드문 섬 같기도 합니다.
15살 어린 나이에 육지 속의 섬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단종과 그를 생각하며 긴 세월을 살아냈을 정순왕후의 삶을 생각하며 사릉역 앞에 앉아 있자니 저 멀리서 오던 춘천가는 기차가 한 번 휙 쳐다보며 달려 지나갑니다.
덧붙이는 글 | * 버스 타고 사릉역 찾아가기
ㅇ 강변역에서 9번 9-5번 버스를 타고 진건 파출소 정류장 하차
ㅇ 청량리역에서 7-5번, 202번, 707번 버스를 타고 진건 파출소 정류장에서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