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란디, 돈벌이를 할라먼 우리나라에서 할 일이제 사람들이 뭣땀세 일본으로 갔다우?"
"묵고 살기 힘등께 그랬제. 일본놈들이 태평양 전장을 한다고 집집마다 숟구락이며 놋그럭까장 다 뺏어가뿐 바람에…. 특히 여그 남해안 지역에서는 밀항을 많이들 했제."
"밀항이 뭔디라우?"
"조선 사람이 배를 타고 일본에 갈라먼 도항증(渡航症)이라는 증명서를 받어갖고 가야 되는디 그걸 받을 수 없응께 어선이나 상선에 숨어서 몰래 건너들 가고 그랬당께. 이런 일도 있었드란다. 서성리에 사는 최윤남이하고 윤식이는 사춘 성제간이었는디…"
일본으로 밀항하려는 희망자가 많다보니 아예 밀항할 사람들을 모집해서 돈을 받고 몰래 일본에 태워다 주는 중개인들이 성행했다. 일본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윤남이 형제는 전답을 팔고 소를 판 돈을 중개인에게 건네주고 밀항을 감행하였다. 땅거미가 깔린 저녁, 그들 형제는 소형 어선에 올라탔다.
"배를 타고 가다가 순사들한테 들키면 큰일 낭께 절대로 나오지 말고 거그 꼭꼭 숨어 있어야 하네. 알겄능가?"
"알겄구먼이라우."
두 형제는 어선의 바닥 창고에 들어가 담요를 깔고 쪼그려 앉았고, 선주는 출입구의 나무 뚜껑을 닫아버렸다. 잠을 자다 깨다 했으나 워낙 깜깜하였기 때문에 도대체 밤인지 낮인지, 몇 밤을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판인지 오사카인지 하는 디 도착할라먼 안즉 멀었소?"
답답해서 그렇게 물어볼라치면,
"쉬잇! 암 소리 말고 지달리랑께 그라네!"
그런 지청구만 들려올 뿐이었다. 형제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를 잤을까, 통통거리던 어선의 기계소리가 잦아들다가 이내 멈추었다.
"자, 다 왔응께 내리드라고."
"와 여그가 참말로 일본이다우?"
"맞어, 오사카여. 일본 순사한테 들키먼 큰일낭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일본 사람인데키 행동을 해야 하네. 알겄능가?"
"걱정 마시오. 게다(일본식 나막신)도 준비해 갖고 왔고 일본 말도 멫 가지는 배와 갖고 왔응께."
드디어 갑판 위로 올라왔다.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항구 여기저기에 아직 불빛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일본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 용감한 사촌 형제는 옷 보퉁이를 옆구리에 낀 채 게다짝을 따박거리며 부두를 지나 거리로 나섰다. 무엇보다 먼저 그 곳이 정말 일본 오사카가 맞는지, 아니면 그 배 주인이 일본의 다른 곳에다 그들을 내려놓고 가버렸는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맞은편에서 한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미리 연습해간 일본어로 말을 건넸다.
"스미마셍(실례합니다)."
"……"
"고코와 오사카데스카? (여기가 오사카입니까?)"
노인이 걸음을 멈추더니 최 씨 형제의 행색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잠시 후 노인이 지팡이를 휘저으며 그들을 향해 한국말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뭣이라고? 오사카데스카? 미친놈들, 여그는 겡상도 삼천포다, 이 얼빠진 놈들아!"
밀항 중개인을 가장한 사기꾼들에게 물정 모르는 섬사람들이 된통 당하는 순간이었다.
"그라먼 아부지도 돈을 주고 작은 똑딱선에 숨어서 일본으로 밀항을 했소?"
"아니제. 아부지는 겁나게 큰 일본 배를 타고 갔당께 그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 일제는 목포와 군산 등의 항구를 통하여 호남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던 쌀이며 소금이며 면화 등의 산물을 자기 나라로 마구 실어 나르는 바람에 그 두 도시는 대표적인 식량수탈 항구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목포에서 소금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화물선 한 척이 풍랑을 만나 생일도로 대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지역 유지였던 할아버지가 화물선의 선장을 비롯한 일본 선원들을 사흘 동안 먹이고 재워주었다. 풍랑이 잦아들어 그들이 떠나려 할 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싯째 아들놈 제해가 머리는 좋은디 집에 진드거니 붙어서 일하는 것을 영판 싫어항께, 요놈을 일본으로 보내부렀으먼 좋겄는디…이참에 조깐 데고 갈 수 없겄소?"
그렇게 해서 일본의 관리인 선장이 보증을 서는 형식으로 현해탄을 건너갔다. 아버지의 동네 동무 두 사람도 함께였다. 그 때가 1943년 봄이라 했다. 아버지 일행이 도착한 곳은 나고야라는 도시였다는데, 야간학교를 다니고 여기 저기 구경 다니고 했다는 정도만 얘기했을 뿐, 아버지는 해방을 맞아 귀국할 때까지 2년 동안 그 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를 세세하게 들려주지는 않았다.
우리의 주권을 총칼로 빼앗고, 독립을 외치는 조선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조선의 물산을 무자비하게 수탈해 가고…그래서, 내가 교과서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 일본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일본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는 견지하면서도, 그래서 일본 사람들을 언제나 '일본놈'이라 칭하면서도, 당신이 경험담에 버무려 내놓는 일본과 일본인들의 모습은 어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일본놈들은 위생관념 하나는 참 철저하당께. 우리 맹킬로 반찬을 한 군데다 놓고 숟구락 젓그락이 막 들락날락한시롬 지저분하게 묵는 거이 아니라, 각자 반찬 그럭이 따로 있어서 제가끔 덜어다 묵는다, 이 말이여."
"일본놈들은 뭔 일이 있어도 약속은 철저히 지키드랑께. 내가 나고야에 있을 때 말여…."
아버지뿐만 아니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는 아버지 동무들의 얘기도 엇비슷하였다. 여름날 마당에 밀짚거적을 깔고 나란히 누워서, 일본에서의 사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엮어지는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거적의 지푸라기가 자꾸만 홑이불을 뚫고 올라와서 등허리를 들쑤시는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아직 어렸으므로 아버지에게 무어라 항변할 말을 만들어내지는 못 하였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럭 한나에다 같이 담어놓고 묵드래도 밥이든 반찬이든 배불르게만 묵었으면 좋겄구먼.'
학교 가는 아이들이 꾸리고 나선 행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허리에 차거나 어깨에 멘 책보 말고도 저마다 무엇인가를 하나씩 더 챙겨들었다. 양철그릇을 든 아이들이 대다수였고 간혹은 바가지나 군인들이 쓰다 버린 투구, 그리고 투구 속에 받쳐 쓰는 화이버(시골 사람들은 그것을 우물물을 긷는 두레박으로 많이 사용하였다)를 들고 가는 아이도 있었다.
"자, 받어라!"
어떤 아이가 양철그릇을 언덕길 아래쪽으로 굴리자 함께 가던 사내아이들 역시 따라 했다. 순식간에 학교로 가는 언덕길은 쨍그랑, 우당탕탕, 한 바탕 야단이 났다.
"야, 느그들 포탄 터트릴 것잉께 이리 와봐."
종석이가 주머니에서 '에므왕(M₁)' 총알껍질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다른 주머니에서 알 성냥 한 움큼을 꺼내놓았다. 우리는 민첩한 동작으로 알 성냥의 성냥골을 손톱으로 벗겨서 탄피 속에 털어 넣었다. 종석이가 또 다른 주머니에서 큰 쇠못을 꺼내더니 그것을 거꾸로 세우서는 못 대가리를 탄피 속에 넣었다. 여자 아이들이 가까이 왔다 싶을 때,
"자, 시방 도팍으로 내레 쳐!"
희갑이가 돌을 집어 들더니 못을 내려쳤고,
"빠앙!"
화약 터지는 소리가 총소리에 못지않게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여자 아이들이 놀라 혼비백산을 했다. 이어서 탄피 바닥에서 올라오는 화약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 때의 그 묘한 쾌감…그것은 뭐랄까, 아직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수컷임을 우쭐, 과시하고 싶은 무슨 야성 같은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학교가 파했다. 전교생이 저마다 그릇 하나씩을 들고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오늘은 강냉이가루랑 우유가루랑 두 가지를 줄 것잉께 그릇을 두 개 갖고 온 사람은 따로따로 받어 가고, 하나밖에 안 갖고 온 사람은 기냥 한 군데다 받어 가도록 해라. 집에 가다가 도중에 다 퍼묵어 불지 말고 부모님한테 갖다 드려야 된다이. 알겄냐?"
"예!"
구호품을 받아든 우리의 귀갓길은 신바람이 절로 났다. 학교가 소재한 용출리 아이들과는 달리 굴전리에 사는 우리들은 오리 길을 걸어서 집에 와야 했으므로 하굣길은 온통 우유가루 잔치판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아침에 등교할 때 우유가루를 간편하게 퍼 먹을 수 있도록 빳빳한 종이를 미리 찢어서 준비해가기도 했다. 고놈을 첩약 종이 모양으로 오그려 잡고서 분유를 뜬 다음에 입에 털어 넣는 것이었는데, 볼따구니가 미어지게 넣고 먹다 보면 입천장이며 잇몸에 덩어리째로 달라붙기 일쑤여서, 입안 구석구석을 헤집어 분유 덩어리를 파내느라 새끼손가락은 쉴 틈이 없었다.
분유와는 달리 옥수수가루는 날로 먹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별 다른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밥을 지을 때, 소다를 섞은 옥수수가루 반죽을 밥솥에 넣었다 꺼내면 되었다. 비록 보리밥의 밥풀이 덕지덕지 붙긴 했으나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 고놈 한 덩이를 두 손에 받아 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미국의 구호물자 우윳가루는 대개 한 달에 한 번 꼴로 공급이 되었는데 그해 가을에는 석 달이 다 되도록 학교에서 유윳가루 나눠준다는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우리는 마을 들머리에서 뜻밖에도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을의 소사가 또 한 명의 거추꾼과 함께 지게에다 커다란 우윳가루 포대를 포개지고서 마을 어귀에서 잠시 땀을 닦고 있었다.
"이 우윳가루 어디로 갖고 갈라고 그라요?"
"아, 이거? 집집마다 한 됫박씩 나눠 줄 것이여."
"와아!"
우리는 탄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우윳가루 배급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소사의 지게목발 뒤로 졸졸졸 따라가다가 자기 집 차례가 되면 부리나케 뛰어 들어가서 그릇을 가지고 사립에 나와 그 맛난 배급품을 받아들고 들어갔다. 우리 집은 학교 쪽 들머리와는 반대쪽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 차례가 올 것인지 애간장이 탔다. 소사가 양을 잘 가늠하지 못 해서 혹시 우리 집 차례가 오기도 전에 다 떨어져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소사의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책보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 빳빳한 표지를 조금 찢었다. 우윳가루를 받는 즉시 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미리 해둔 것이었다.
드디어 우리 집 윗집인 영길이네 집 차례가 되었다. 영길이가 부리나케 뛰어 들어가더니 양은냄비를 가지고 와서 받아갔다. 기다리던 우리 집 차례였다.
"잠깐만 지달리싸요이. 얼릉 들어가서 그럭 갖고 나오께라우."
내가 막 사립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동네 소사의 심상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랄 필요 없어야."
나는 앞마당까지 거지반 다 달려 들어갔다가 걸음을 물려 다시 사립으로 나왔다.
"그랄 필요 없다는 거이 뭔 말이다우?"
"느그 집 줄 우윳가루는 없어."
"왜라우? 동네 다른 집은 다 줬는시롬 왜 우리 집은…."
"앗다 이거 참 아그들한테 이런 말 하기 참 곤란한디…다른 거이 아니고…메칠 뒤에 대통령 뽑는 선거가 안 있냐. 너도 쩌그 벡보 붙여놓은 것 봤제? 민주공화당 박정희, 민정당 윤보선 또 뭔 당 누구… 그런 것 말여."
"그란디 우윳가루가 그것이랑 뭔 상관이…."
"상관이 있제. 이 우윳가루는 박정희 찍으라고 주는 것인디, 느그 아부지는 아무리 우윳가루를 줘도 윤보선이를 찍을 거이 뻔항께 느그 집은 주지 마라, 이렇게 지시가 내려왔단 말여. 나도 주고자프제마는 욱에서 그렇게 시키는 것을 어짜겄냐. 한 마디로 느그 집은 사상이 불량하다, 그래서 안 주는 것이여."
소사가 지게 멜빵을 어깨에 걸치고 일어서더니 다음 집을 향해 가버렸다. 나는 우윳가루를 떠먹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빳빳한 종이조각을 차마 땅바닥에 버리지 못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때 영길이가 대접에다 우윳가루를 퍼서 마당 끝으로 나와서는 돌담에 그릇을 올려놓고 나를 내려다보면서 유난히 냠냠, 쩝쩝 소리를 크게 내며 먹고 있었다.
"영길아, 나 쬐끔만 주라."
내가 거의 울먹거리며 말했다. 영길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겠으나, 내 지난 삶을 돌아볼 때마다 영길이에게 우윳가루를 좀 달라고 했던 그 때 그 말을 나는 가장 뼈저리게 후회한다. 어느 방송 퀴즈 프로그램에서처럼 내 지나온 삶에 단 한 번의 지우개 찬스가 허용된다면 "영길아, 나 쬐끔만 주라", 바로 그 말을 지우고 싶다.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아버지 어머니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왜 딴 집은 다 주는디 우리 집만 우윳가루 안 줘!"
나는 책보를 토방마루에 패대기치며 아버지를 향해 그렇게 내질렀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눈물 바람을 하고 들이닥친 아들 녀석의 모습에 의아해 하던 아버지는 그때서야 앞뒤 정황을 파악한 듯 침통한 표정을 하더니 숟가락을 놓았다. 어머니도 원망어린 한 마디를 보탰다.
"우윳가루만 못 받었는 줄 아니? 놈들은 석 장, 넉 장씩 다 받은 빨래비누도 느그 아부지 땀새 우리 집만 못 받었단다."
아버지가 천천히 마루를 내려오더니 내 어깨를 다독거렸다.
"선호야, 너가 나이를 더 묵어서 스무 살쯤 되면…그 때는 느그 아부지가 옳았다, 그렇게 이해를 할 것이여. 사나이 대장부가 우윳가루 그 따우 것 조깐 못 얻어묵었다고 울면 쓰겄냐."
그러나 그 때 나에게 우윳가루는 '그 따위 것'이 아니었다. 마당 끝으로 걸어가서 바다 쪽을 향했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심호흡을 했다. 영길이에게 우윳가루 조금만 달라고 했던 일이 약간 부끄러워졌다. 어렴풋이, 아주 어렴풋이, 내가 장차 세상살이를 남들보다 조금 더 고단하게 할지도 모른다는…그 비슷한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