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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방문한 대통령이 크게 주목 받았다. 한-EU FTA 협상이 마무리됐음을 공식 선언했다. 어수선한 시국에 크게 한 건 했다. 유럽연합 의장국 스웨덴 발 뉴스에서 묻어난다. 현지 특파원 이니셜이 강조된 방송과 신문 등 주류언론들은 일제히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크게 부각시켰다.

 

지상파 방송과 서울의 보수신문들은 일제히 "세계 최대 규모의 무역권인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이 최종 타결됐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글로벌 경제의 양대 축인 EU 및 미국과 FTA를 타결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가 됐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지역민심은 호들갑과는 영 거리가 멀기만 하니. 유럽을 향하기 전, 낙점한 두 실세 총장의 청문회 관심지수가 오히려 높았던 것도 무관치 않다. '스폰서 검사', '탈세 청장'이라며 온갖 의혹을 제기하는 야당의원들 앞에서 시종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짓는 당자들하며, '의혹토굴'에서 두 후보를 구하기 위한 끈질긴 여당의 엄호사격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여론의 다양성, 지역성... 다양한 언론 존재했을 때 가능

 

그래서일까. 별로다. 유럽에서 전해오는 소식은 그리 큰 감동을 주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지역에선 성난 민심이 더욱 자극 받은 양태다. 특히 축산, 과일생산 농가가 많은 호남과 제주지역의 농민과 농민단체의 표정에서 읽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의 보수언론은 그저 신났다. 감동적인 드라마가 연일 지면과 영상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대조적이다.

 

13일과 14일 지상파 방송 및 보수신문들은 이번 FTA 협정 체결에 대해 "세계 최대 경제권인 유럽연합(EU)과 2년 2개월 동안 진행해온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마침내 타결됐다"며 "한국은 유럽에 대한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글로벌 경제의 양대 축인 EU 및 미국과 FTA를 타결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가 됐다"고 앞다퉈 전했다.

 

현지에서 기사를 전하는 기자들의 흥분한 기색 또한 역력하다. 대통령의 환한 모습과 발언내용 어디에도 자유무역협정 이후 가져올 후폭풍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도됐다. 한미FTA 당시 전 지역을 뜨겁게 달궜던 저항의 불씨를 벌써 잊은 듯하다.

 

정부가 국민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EU와의 FTA 협상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은 채 서명을 추진하고 있어 '밀실과 불통의 FTA'라는 따가운 지적이 일고 있지만 이들 보수신문과 방송사들의 보도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한-EU FTA 협정 발효 이후 자동차 등 일부 제조업의 수출 증대에도 불구하고, 서비스분야를 비롯해 농축산업 등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에서 대규모 산업재편에 따른 구조조정 등으로 인한 피해가 예상되지만 약자, 소수자의 목소리는 별 의미가 없는 듯, 지면과 영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별 관심이 없다는 태도다.

 

오히려 지역 일간지들이 이번 EU와의 FTA 체결이 가져올 문제점을 냉철히 짚었다. 여론의 다양성과 지역성은 다양한 언론이 존재했을 때만이 가능함을 오롯이 증명해 주려는 듯. 특히 과점언론보다 지역언론이 오히려 지역적인 관점에서 이슈를 분석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신속하게 전하는 사례로 손색이 없다.

 

[호남] "한-EU FTA 타결?, 지금도 힘든데 청천벽력"

 

 

양돈농가가 많은 지역이다. 농심이 심상치 않다. 가뜩이나 한·미 FTA 이후 'FTA 노이로제'에 시달려 온 곳이다. <무등일보>의 14일 르포기사가 단연 주목을 끈다. '한·EU FTA 타결'에 따른 의미와 전망에 관한 보도자료 또는 통신사 뉴스를 거의 그대로 인용해 보도한 다른 언론들과 대별됐다.

 

시름에 젖은 양돈농가의 표정과 목소리를 지면에 담느라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지금도 힘든데 청천벽력"이란 1면 머리기사는 제목에서부터 걱정이 가득 묻어난다. 한국과 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사실상 타결됐다는 소식과 함께 곧바로 찾은 곳은 나주 봉황면의 한 양돈농가였다.

 

"인플루엔자 지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 FTA는 돼지농가 죽으라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한 농민의 목소리에서 시름이 짙게 묻어났다. "한-EU FTA 소식을 들은 나주의 양돈농가 농민들은 한숨을 쉬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는 기사는 "돼지 500여 마리를 기르고 있는 정 모 씨는 '가뜩이나 돼지 키우기 힘든데 계속해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만 들린다'며 하소연했다"고 현지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했다.

 

양돈농가들이 걱정하는 것은 그동안 유지됐던 25% 돼지고기 관세가 없어지면서 값싼 유럽산 돼지고기가 물밀 듯 들이닥칠 게 뻔하기 때문. 이 때문에 기사는 "지금도 국산보다 50~80%까지 더 싼 유럽 냉동 돼지고기가 많이 판매되고 있어 위기에 놓여 있다"며 "게다가 수입 돼지고기에 맞설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상황에서 FTA가 체결되면 누가 비싼 국산 돼지고기를 찾겠느냐"고 울상 짓는 농민들을 대변했다.

 

기사는 이어 "이번 한-EU FTA 체결 소식에 이 지역 양돈농가들의 한숨은 다른 지역 농가보다 더 깊다"며 "매년 5월과 6월 돼지가격이 가장 높아 이때의 수입으로 1년을 버티는데 지난 4월말부터 불어 닥친 돼지인플루엔자 여파로 이 지역 양돈 농가들의 타격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 신문은 "한-EU FTA뿐 아니라 한-칠레 FTA도 양돈농가를 위협하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국산 돼지고기를 찾기 힘들지 모른다"는 우려와 걱정도 실었다.

 

<전남일보>도 이날 '한-EU FTA 발효 땐 전남 양돈농가 타격 불가피'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과 유럽연합과의 FTA협정 타결이 임박함에 따라 큰 타격이 예상되는 도내 축산농가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며 "국내 돼지고기 수입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 양돈 강국인 EU와 FTA가 타결되면 치열한 출혈경쟁과 이를 통한 국내 양돈산업의 폐업이 불가피하다"고 전했다.

 

기사는 또한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실에 따르면 국내 양돈 분야의 연간 생산액이 4조 2000억 원에 달한다"며 "이 가운데 한-EU FTA가 발효돼 피해 액수가 전체 생산액의 10% 정도 피해만 입어도 연간 4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기사는 "전남도의 돼지 사육은 1320농가 89만두, 소는 3만5000농가가 43만두에 달하며 돼지의 경우 전국 사육 규모의 10%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일단 관세율이 25%인 돼지고기의 경우 관세가 철폐될 경우 국내 축산농가의 타격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전남도 양돈협회를 비롯한 축산농가는 정부의 협상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향후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이들 신문은 농가들의 연대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전했다.

 

[제주] "감귤 이어 돼지고기 영향 불가피... 후속대책 시급"

 

 

제주지역도 과일에 이어 양돈농가의 피해를 가장 우려했다. <한라일보>는 이날 '제주감귤, 돼지고기 영향 불가피'란 제목의 기사에서 "감귤과 돼지고기 등 제주의 주력 1차 산업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 불가피해지고 있다"며 "정부와 제주도 차원의 후속대책이 시급해졌다"고 전했다.

 

기사는 "한미FTA보다 먼저 발효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우려하면서 "유럽연합과의 FTA에서 우선 관심이 쏠리는 것은 오렌지와 감귤류, 그리고 돼지고기 등 축산물에 대한 협상결과"라고 덧붙였다.

 

이 신문은 또 다른 기사 '한-유럽 FTA '발등의 불''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유럽연합과의 FTA 협상 타결로 제주 양돈산업 피해액은 연간 협상 발효 초기 55억원에서 관세가 완전 철폐되는 시기에는 210억원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영남] "섬유·기계·자동차부품 수출 유리... 농·축산업은 불리"

 

 

영남지역 언론들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쏟아냈다. <영남일보>는 이날 1면 '섬유·기계·자동차부품 수혜…전자의료기기·농축산업 피해 우려'의 기사에서 "한-EU FTA가 타결됨에 따라 대구·경북의 주력 산업인 섬유, 전기·전자, 기계, 자동차부품 등은 수출 증대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반면 농·축산업부문에서는 전국적으로 비중이 높은 경북지역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분석했다.

 

"대구·경북의 경우, EU 고관세 품목인 섬유와 기계, 전기·전자 등 지역 주력업종 수출에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유럽에 비해 기술력이 떨어지는 정밀기계, 전자의료기기, 소형 가전은 타격을 받을 전망"이라고 한 이 기사는 대구경북연구원이 분석한 자료를 인용해 지역적 관점에서 진단했다.

 

"한-EU FTA에 따른 대구·경북지역의 생산성 효과는 후생(厚生)수준 38억4천만달러, 고용 7만5천명 등으로 1.04%의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이 예상된다"는 기사는 대구경북연구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한-EU FTA가 발표되면 농업부문에서는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지만, 한미FTA와 더불어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촉진, 수입선 대체효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전했다.

 

<매일신문>도 이날 엇갈린 전망을 내놓았다. '차 부품·섬유·전자 유리…정밀기계·소형가전 불리'란 제목의 기사에서 "전문가들은 고관세 품목인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전기전자, 섬유, 기계 등은 수출 증대가 기대되나, 기술력이 떨어지는 정밀기계, 전자의료기기, 소형 가전 부문은 열세를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EU 의류제품에 부과하는 8~13%의 관세가 없어져 유럽산 고급 의류 수입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지만 정밀 기계분야는 유럽이 고급 기계 원천기술력을 많이 확보하고 있어 국내에서는 그동안 많은 양을 수입해왔기 때문에 FTA 타결로 불리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이날 <경남도민일보>도 '한-EU FTA 타결' 기사에서 "경남지역의 자동차 수출이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농축산 업계는 우려감이 팽배하다"고 전제했다. 기사는 이어 "국내 돼지고기 시장의 절반 이상을 유럽산(벨기에·프랑스) 돼지고기가 차지하고 있어 양돈 농가의 타격이 예상된다"고 하면서도 "도내 자동차 부품업체의 한 관계자는 '10% 수준에 이르는 EU 관세가 철폐되면 더욱 강화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는 내용을 부각시켰다.

 

[충청] "산업계 희색, 농업계 사색... 농민단체 심상치 않다"

 

충청지역도 우려와 기대를 함께 쏟아낸 기사가 눈에 띈다. <충청투데이>는 이날 '산업계 희색, 농업계 사색'의 기사에서 엇갈린 반응을 보도했다. "2년여에 걸친 한국과 유럽연합 간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타결되면서 산업계와 농업계의 희비가 교차하고 있다"는 기사는 "자동차 관련 업종과 전자, 섬유, 화학 등이 최대 수혜 업종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낙농·양돈 농가는 직격탄이 우려된다"고 전했다

 

"이번 FTA로 유럽산 농산물의 수입 확대가 예상되면서 국내 농업계는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는 기사는 "특히 유럽의 주요 수출품인 돼지고기와 낙농품이 국내로 밀려들어올 경우 관련 농가의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농민단체들은 한-EU FTA가 어떠한 의견수렴이나 토론회도 없이 진행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며 "한미FTA의 경우 지난 2006년 수많은 토론회를 가졌음에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가 산적했는데, 규모면에서 이에 못지않은 이번 한-EU FTA는 아무런 의견수렴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됐다"는 한 농민의 말을 부각시켰다. 결집된 농민들의 저항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대목이다.

 

더욱이 이번 한-EU FTA에는 한미FTA에서 독소조항으로 지적된 내용들이 상당수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정부는 한-EU FTA 협상을 타결해 놓고도 가서명 때까지 협정문을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EU와의 약속에 따른 것이라곤 하지만 국민들이 이번 협상 결과를 평가할 기회를 박탈한 셈이다. 거센 후폭풍이 예고되는 이유다.


태그:#FTA, #성난농심, #양돈농가, #제주감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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