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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 현성의 남쪽 문 입구
 곡부 현성의 남쪽 문 입구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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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에서 곡부로 향하는 길. 한적한 도로 양쪽에 끝도 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보며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다보니 높은 성곽과 함께 '곡부(曲阜)'라는 지명에 눈에 들어옵니다.

곡부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수도이며 공자의 고향으로 공자의 사당인 공묘,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공부, 공자와 그 후손들의 가족묘인 공림이 있는 곳으로 유교사상이나 동양사상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생에 한 번은 꼭 다녀와야 할 성지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중 고등학교 시절 한문시간, 고문시간, 윤리시간, 세계사시간 등에 걸쳐 주입식으로 유교사상과 공자의 일생에 대해 공부한 것도 모자라 중국역사와 유교철학에 대한 책들을 읽고 이에 심취했던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남편에겐 여행이라기보다는 성지순례의 의미가 더 큰 곳이었으니 말입니다.     

인구 65만정도의 작은 시골도시 곡부는 도시 전체가 고풍스러운 고대건축물로 가득하며 어디를 둘러봐도 공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 경주에 온 듯 고대도시로의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현성은 일반 성곽들과 다르지 않게 해자로 둘러쳐진 총 길이 5.5km의 성곽으로 공자의 사당인 공묘와 공자 후손들이 살았다는 공부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공묘의 담을 따라 형성된 기념품 거리
 공묘의 담을 따라 형성된 기념품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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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현성의 안쪽인 구시가와 밖인 신시가로 구분되는데 성벽 안 구시가는 공부나 공묘와 같은 유적지는 물론 호텔 등 숙박시설과 음식점, 시장, 기념품점등이 즐비한 관광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현성 안은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어 3층 이상 높이의 건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낮은 처마가 평온하게 이어진 곡부의 스카이라인은 낯설기도 하지만  한없는 안정감을 안겨 주기도 하지요.      

공묘의 동쪽 문 곁에 위치한 호텔에 짐을 푼 우리는 고대하던 공자님을 만나기 위해 부푼 가슴을 안고 공묘로 향합니다. 공묘 담을 끼고 걷는 길. 인사동처럼 도로 양옆으로 기념품점이 즐비합니다. 공자님이 위대한 학자였던 때문인지 묵과 붓, 도장과 서예작품 등을 파는 상점들이 특히 많아 보입니다.

공묘의 전문(前門)인 금성옥진방
 공묘의 전문(前門)인 금성옥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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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에 들어가기 위해 입장권을 사려고 하니 주변에 있던 여러 명의 사람들이 가이드를 해주겠다며 우리를 따라 붙습니다. 가슴에 공식 가이드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저마다 자신이 공씨의 후손임을 자처합니다. 하긴 곡부 인구의 5분의 1이 공씨 성을 가진 공자의 후손이라고 하니 이렇게 흔하게 만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공묘의 전문(前門)에 해당하는 금성옥진(학문의 처음이오, 끝이다-유학의 집대성을 의미)을 지날 때만 해도 100위안을 부르던 가이드들이 정작 입장권을 받는 성문(영성문-대성전에 이르는 열개의 문 중 첫 번째 문에 해당)을 지나니 가격을 확 내려 80위안, 60위안 하면서 흥정을 붙여옵니다.

통역 겸 가이드를 위해 우리를 따라 나섰던 조선족 여직원 역시 중국 역사나 유교사상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어 답답했던 터라 우리는 몇 걸음을 더 가다가 공씨 문중 78대손이라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에게 50위안에 공림까지 가이드를 맡기기로 합니다. 몇 걸음 만에 100위안을 50위안으로 깎았으니 중국에서 부르는 값 다쳐주면 바보라는 말이 실감되는 장면이지요.

공묘 안에는 공자의 제자인 안회, 자공, 자로등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 있다. 이곳에서 제갈량의 위패도 만날 수 있다.
 공묘 안에는 공자의 제자인 안회, 자공, 자로등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 있다. 이곳에서 제갈량의 위패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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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공씨 후손이라는 가이드는 다행히도 달변가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거나 미리 공부해가지고 간 공식적인 기록을 확인해 주는 것은 물론 그들만이 알고 있을 법한 재미있는 야사까지 덧붙여 설명해주니 귀에 쏙쏙 들어오겠지요.

가이드에 의하면 많은 건축물들이 문화혁명시절 파괴되거나 훼손되었고 그 후에도 한동안은 화교자본에 위탁 관리되며 소홀하게 다루어졌다고 합니다. 천정이나 기둥의 단청들이 변색되거나 썩어서 떨어져 나오는 등 수난을 겪고 있는데 이것 역시 유물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도 하지 않은 관리인들이 함부로 물청소를 하고 난 후에 생긴 일이라며 안타까워합니다.

하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지난 시절 중국인들을 지배해 왔던 유교사상은 큰 걸림돌이었을 테고 걸림돌을 제거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엄청난 문화재 가치를 가지게 될 공부, 공림, 공묘 문화제에 대한 훼손 역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공자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유명대학에 공자학과가 개설되는 등 공자에 대한 새로운 바람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한때 타도해야 할 봉건잔재였던 공자사상이 개혁과 개방을 받아들인 중국사회에 새로운 이념의 틀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는 말이겠지요.

공묘의 주전인 대성전. 공자 사후 200년에 걸쳐 해마다 이곳에서 공자의 제자의식이 거행되었다.
 공묘의 주전인 대성전. 공자 사후 200년에 걸쳐 해마다 이곳에서 공자의 제자의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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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의 주전에 해당하는 대성전은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정전으로 화려함이나 장엄함이 자금성의 그것과 비유되며 태산의 대묘와 함께 중국의 3대 궁전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대성전의 백미는 대성전 처마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10개의 석주(반룡석주)입니다. 기둥마다 구름위로 승천하는 두 마리 용이 새겨져 있는데 황제가 살고 있는 궁의 그것과 비유해 손색이 없을 정도라, 황제가 이곳에 와 공자의 제사를 지낼 때면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모든 기둥을 붉은 천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문화혁명 당시 공묘나 공부의 책과 기물을 함부로 훼손했던 홍위병들도 이 석주만큼은 훼손하지 않았다고 하니 중국인들에게 대성전의 석주가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케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장엄한 건축물들은 공자가 학문을 이룸에 있어 황제에 버금하는 위치에 올랐다는 뜻으로 공묘는 물론 공자의 장손들이 대를 이어 기거했다는 공부에서도 동일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조 덕에 공자의 후손들은 궁벽해 보이는 시골마을에 모여 살면서도 황제 일가 못지않은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던 것이죠. 
      
황제가 참배를 올 때면 붉은 천으로 감싸야 했다는 대성전의 10개의 석주(반룡석주)
 황제가 참배를 올 때면 붉은 천으로 감싸야 했다는 대성전의 10개의 석주(반룡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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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를 나와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던 관저에 해당하는 공부에 들어서니 실제 그들이 곡부를 통치하던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남자들만의 장소인 관저를 지나 구중심처를 찾듯 골목골목을 돌아서니 공씨가문의 여성들이 거주했다는 안채를 둘러싼 담이 나타납니다. 여성들이 생활했던 안채는 철저히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 사상을 지켜왔던 곳으로 주인의 허가 없이는 그 어떤 남자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풍수지리의 음양학상 안채 내에 우물을 둘 수 없어 밖으로부터 물을 길어 온 물을 받아 생활을 해야 했다는 안채. 담에는 밖으로부터 길어 온 물을 받아 안으로 흘려 들이는 작은 물받이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물받이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도 담 안 밖의 사람이 눈을 마주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만큼 공부 안에서 남녀의 내외가 철저했다는 증거겠지요.     

남자 종들이 길어 온 물을 안채로 흘려 보낼 수 있게 만든 통로(석류)
 남자 종들이 길어 온 물을 안채로 흘려 보낼 수 있게 만든 통로(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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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것은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건물과 건물사이의 골목길입니다. 폭이 일 미터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골목은 안채에 거주하는 모든 여성들이 이 골목을 지날 수 없을 정도로 살이 찌면 안 된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제가 그리 날씬 한 축에 들지 못하는 아줌마라 그런지 불안한 마음에 선듯 발걸음이 내키지 않는 겁니다.

'이거 혹시 담 사이에 끼는 거 아냐? 끼면 무슨 망신?'

생각보다 좁지 않았던지 통과는 했지만 안채의 한 방에서 그 시절 공씨가문의 여성들이 즐겨 신었다는 전족용 신발(돌쟁이 아기신발 크기)을 보고 온 터라 좁은 골목을 지나는 심정이 그리 편치는 않겠지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구중심처에 갇혀 지내는 것도 죽겠는데, 발을 꽁꽁 싸매서 술 잔 만하게 만들어가지고 잘 걷지도 못하게 하는가 하면 집안 골목까지 좁혀서 살찌는 것까지 강제로 막아대니 집안에서 사육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공자시대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살겠어요? 난 못 살아. 공자시대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공자님이 무지 위대한 줄 알았는데 여자에겐 너무 가혹했네. 에이 실망이야."

살이 찌면 지나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 전족에 이어 전몸(?)까지 하라는 뜻인가?
 살이 찌면 지나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 전족에 이어 전몸(?)까지 하라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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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떨어지기 무섭게 남편이 한 마디 합니다.

"여보. 자 왈 유여자여소인 위난양야 근지즉불손 원지즉원(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이라 했어. 즉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 하면 기어오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는 거지. 당신을 보니 공자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확 되네."

치사한 남편.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더니 정말 공자님 집 앞에서 그럴 듯한 문자를 꺼내 저를 기죽입니다. 하지만 그런 공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 듣자니 곡부의 현 부시장이 공씨 성을 가진 여성이라는 군요.

공자님의 시대가 지나고 이젠 여성도 얼마든 자신을 펼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지요. 남편과 토닥거리며 공부를 나오니 공림으로 향하는 택시가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그:#곡부, #공묘, #공부,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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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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