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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입항을 앞 둔 날. 도수철은 '남포다방'에서 배를 타러온 사람들을 면담하고 있었다. 월 수 백이십 보장, 신체 건강한 자, 주민 등록증 지참, 당일 승선가능, 이란 선원모집 포스터를 보고 꾸역꾸역 찾아온 선원 지망생들이었다. 그들은 장마가 지면 강의 쓰레기들이 바다로 밀리듯이, 사회의 낙오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갈 곳이 없어서 막판에 배를 타러 온 것이다.
 
 "자네들 말이네. 바다는 세상보다 힘드네. 그리고 사회의 낙오자라고 생각하고 될 대로 되겠지 생각하면 배를 타면 절대 돈을 벌 수 없네……."
 
배를 타겠다고 온 신참들을 대충 면담하고 보니 도저히 험한 뱃일을 오래 견딜만한 놈이 없어서 그냥 모두 돌려보냈다. 배에 무지한 무경험자를 태우면 그들의 치다꺼리 하다가 도리어 피해를 입는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뱃일을 가르쳐 주어도 몇 달 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뜬금없는 퇴직금을 챙겨달라는 데는 기가 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수철이 굳이 항구다방에서 선원들 면담을 약속한 것은 한번이라도 영숙을 더 만나기 위해서였다. 카운터에 앉아 비가 오는 항구를 쳐다보는 영숙의 얼굴은 아내의 얼굴과 너무 똑같았다. 그래서 도수철은 몇 번씩 영숙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만히 뜯어볼수록 예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고, 가슴마저 소년처럼 두근거렸다. 영숙도 도수철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맞추어 웃어주었다.
 
그래서 수철은 잠시나마 영숙을 아내로 맞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상상을 했다. 정말 이번에 결혼을 하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막 배에서 내린 뱃사람들이 우르르 다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 중 수염이 텁수룩한 젊은 사내 하나가 대뜸 영숙의 허리를 껴안자, 영숙은 기겁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늙스구레한 사내 하나가 영숙의 손목을 낚아채듯이 품에 안자, 영숙은 앙탈을 부렸고, 바다냄새가 땀냄새처럼 나는 사내들은 하하하 허허허 다방 레지 영숙이 질색하는 표정을 즐겼다.
 
다방 구석에 앉은 도수철은 그런 영숙을 보며 기가 찼고 한숨이 절로 쏟아졌다. 왜 하필 똑 같은 다방 레지란 말인가. 아내, 김말숙도 남포 다방 레지였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아내는 도수철의 첫사랑이다. 한 번도 사랑한다니 뭐니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자였다. 하긴 먼 바다에 나가 생활하며 나이를 다 보내다보니, 여자를 만날 기회도 없었다.
 
왁자왁자하게 시끄럽고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 안으로 이때 맹 선장이 아치형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맹 선장은 여느 때의 작업복은 벗어 던지고, 말끔하게 다듬질된 까만 양복을 입고 있었다. 비오는 날인데도 맹 선장의 구두는 번쩍번쩍 광이 났다. 몇 올 안 되는 머리칼도 머릿기름을 발라 대머리까지 윤기가 흘렀다. 온 몸에 돈으로 치장한 듯, 푹푹 싸구려 향수냄새를 풍기는 맹 선장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다방 안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미스 정 ! 아 실례, 미스 정영숙씨! 나 맹 선장 좀 봅시다."
세상에 미스는 뭐고, 또 정영숙씨는 뭔가. 다방 레지 부르면서 저렇게 정중하게 대하는 뱃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거드름을 한껏 피우며 담배갑을 꺼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맹 선장에게 영숙이 쪼르르 달려와 메뉴판을 내밀며 말했다.
 
"어머, 맹 선장님, 너무 너무 멋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만에 오셨어요 ? 차는 무얼로 하시겠어요 ?"
영숙이 메뉴판을 보여주자, 맹 선장은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영숙의 허벅지를 끈끈한 시선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오늘 이 시각부터 들어오는 손님들의 차값은 내가 다 계산하겠네. 그러니 영숙씨도 좋아하는 언니들 차까지 마음껏 가능한 비싼 걸로 시켜도 좋아..."
"어머, 그 말이 정말이세요. 아이 좋아라..."
맹 선장에 말에 영숙의 두 눈이 뚱그레지며, 언니, 언니 ! 맹 선장님이 한 턱 쏜데요. 하고 주방에 들어간 남포다방 마담을 향해 손나팔로 소리치자, 마담과 방안에 화투패 두던 다방레지들까지 쪼르르 맹선장 곁에 나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메뉴판을 들고 있는 영숙에게 각각 원하는 차를 시켰다.
 
맹 선장은 다시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늘은 내가 너희 전부 데리고 나가 영화구경을 시켜준다.', '야, 니는 인자 보니 양귀비 뺨치겠다 !', '그래도 역시 여기선 요석공주 같은 영숙이 미모가 최고지... 너희들은 안돼...'하는 해괴한 소리를 지껄여댔다. 그리고는 차를 가지고 온 영숙의 손목을 잡아 곁에 앉히고는, 영숙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지 오래 속삭였다.
 
꽤나 도도하다고 소문난 영숙이도 호방하게 선심을 쓰는 맹 선장이 싫지 않은지 연신 방긋방긋 웃었다. 그때마다 보조개는 더 깊이 팼다. 그래 맹 선장이 저런 식으로 영숙을 공략하기 시작한다면, 영숙이도 언젠가 맹 선장에게 찍힐 것이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는 것이다.
 
도수철의 속이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뒤집히기 시작했다. 도수철은 꼼짝 않고 줄담배를 태웠다. 그저 생각 같아서는 체통이고 뭐고, 맹 선장 옆에 앉아 있는 영숙을 가로 채서, 둘만 있는 세상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려 더 이상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막막한 바다에서 얼마나 그리워했던 영숙인가. 기어이 오늘은 영숙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리라. 얼마나 다짐하며 찾아온 남포다방인가.
 

 

                                                     <4>

 

도수철은 독수리 같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맹석출에게 영숙을 가로채인 기분에 휩싸였다.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더 이상 앉아 있다가는 꼭 10년 전 그날처럼 다방을 뒤집고 폭력배처럼 난동을 피울지도 모른다 싶었다.

 

생각하면 지금이 그때와 똑 같은 상황이 아닌가. 아내, 김말숙이가 뭍 사내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은 참지 못하고, 도수철은 그날 폭력을 휘둘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몇인가. 도수철은 그날 맥주병에 맞아 피를 보고 질겁을 하던 아내 김말숙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자, 횡하니 자리를 박차고 다방을 박차고 나갔다.


'선장님요! 선장님요!' 간드러진 여인이 등을 지고 걸어가는 도수철을 향해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도수철이 못 들은 척 걸어가자, 뒤쫓아와서 등을 치는 사람은 남포다방 마담이었다. 아차, 찻값을 계산하지 않고 나왔던 것이다. 도수철은 찻값을 치르면서, 다시 다방에 들어가서 영숙의 손을 덥석 잡고 끌고 나올까 싶기도 했지만, 입술을 깨물고 돌아섰다. 비는 억수로 들이 붓듯이 쏟아졌다.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비 맞은 나뭇잎을 물고기처럼 보도블록에서 파득거렸다.

"그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다 늙은 주제에 딸 같은 애를 넘보다니…….내가 미친 거다……."


도수철은 꼭 실연한 열일곱 살 소년처럼 빗속을 거닐며 어디까지 걸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왜 실연한 사람처럼 이렇게 눈물이 주책없이 난단 말인가. 아내가 도망 간 이후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한 적이 없다.

 

개인택시 와서 몇 번이나 섰으나, 그는 손을 내 저으며 마냥 걸었다.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이 동백공원 가는 길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알 수 있었다. 물귀신이 자신을 이끌고 가는 것 같았다. 도수철의 발길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안고 동백꽃이 피던 날 봄 소풍 나들이의 그곳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동백공원 수족관에 가면 귀여운 아들과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이제라도 돌아와 준다면 모든 것을 바다처럼 용서하고 더욱 더 사랑하겠다고…….눈물은 후회처럼 얼굴을 적시고, 폭우가 정수리를 퍼붓는데, 도수철은 우산도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계속-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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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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