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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의 낙마 이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개인 의혹을 폭로한 박지원 의원에 대한 검찰의 '보복 수사'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 박 의원이 참석하고 있다.
▲ 박지원 의원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의 낙마 이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개인 의혹을 폭로한 박지원 의원에 대한 검찰의 '보복 수사'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 박 의원이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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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의 첫 구절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과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낸 한 실세 정치인이 권력의 무상함을 빗대어 술회한 구절이기도 하다. 권력의 중심부에 섰던 그가 법정에서 흘린 이 한마디는 금세 세간에 화제가 됐다. 권력의 속성과 무상함이 짙게 배인 때문이다.

그 후 6년이 흐른 지금, 그 꽃과 바람을 다시 떠올린다. 살아 있는 권력의 실세가 아닌 야당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한 그가 인사청문회 '스타'가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복수의 칼바람이 등 뒤에서 춤을 추는 형국이다. 변화무쌍한 권력주변을 맴도는 꽃과 바람은 순환을 재촉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것일까.

너무 비정한 간극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래서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권력의 속성과 닮았다고 말한다. 화려한 후광을 뽐내며 만개하는가 싶으면 금세 바람에 흩날리는 게 꼭 닮았다.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청와대 '작품'으로 발탁된 검찰총장 후보자를 주저앉힌 장본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마자 보복수사 논란의 중심에 갇힌 민주당 박지원 의원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에서 읽힌다.

# 살아 있는 권력 핵심에서 감옥으로... 왜?

1942년 전남 진도에서 출생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30대 초반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활동한다. 80년부터 뉴욕 한인회와 미주지역 한인회총연합회 회장을 맡으면서 정치인을 비롯한 다방면의 인사들과 교류를 쌓기 시작한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도 이 때 만나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시작된 DJ와의 인연으로 그는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92년 14대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발을 들였다.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김대중 대표의 특보역할을 시작한 이후 줄곧 DJ를 측근에서 보좌했다. 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으로도 활약한 그는 DJ의 청와대 입성 때 공보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실세로 부상한다. 99년 5월부터 2000년 9월까지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낸 후 2001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거쳐 정책담당특보에 이어 DJ가 대통령에서 퇴임할 때까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화려한 꽃도 언젠가는 시들고 지기 마련. 늘 보아왔지만 그건 정권의 교체주기와 무관치 않다. 남북정상회담 직전 불법대북송금 사건을 맡은 특검팀에 의해 2003년 6월 영어의 몸이 된다. 법정에서 무죄와 유죄를 오가며 2006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는다. 그 후 2007년 2월 9일 특별사면조치로 형 집행이 면제되면서 석방된다.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12년 만에 원내에 복귀한 그는 2008년 8월 13일 민주당으로 복당하기까지 숱한 굴곡을 겪었다. 

# 언론,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롱

2003년 6월 18일. 박지원 전 장관의 서울지법 영장실질심사가 있는 날이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그다. 그런 그가 대북송금특검 수사실에서 나서면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쏟아지는 질문에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고 소회를 피력했다. 그날 저녁방송 뉴스와 다음 날 아침 신문들의 지면과 영상은 온통 전 정권의 권력 실세가 던진 꽃과 바람의 의미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 <연합뉴스>는 "박 전 장관의 소회 발언은 조지훈의 시 '낙화'의 첫째 연으로 박 전 장관이 말하는 '꽃'의 의미가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언론의 해석은 긍정보다는 부정쪽에 가까웠다. '권력의 무상함', '지는 박꽃'이라는 표현과 함께 조롱과 경멸을 쏟아냈다. 

"한때 '부통령'이라는 별칭을 들으며 국정을 장악했던 박 전 장관 본인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좌초위기에 처한 햇볕정책일 수도 있다. 정치적 공세 속에 위기에 몰린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한때 만개했다 지는 꽃처럼 무상한 권력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발 빠르게 각 언론사에 긴급뉴스로 타전한 통신사의 해석이 지면을 큼지막하게 메웠다. 박 전 장관은 당시 영장실질심사에 앞서 150억 원 수수의혹과 관련해 "북한은 적성국가 이지만 동시에 형제국가로 통일해야 한다"며 "실질심사를 신청한 것은 구속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상회담 소회를 밝히고 150억 원 수수 의혹을 풀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언론은 조지훈의 시 '낙화'를 계속 상기했다.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로 끝맺는 구절과 지는 권력의 무상함을 연계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렸다.

# 긴급체포 된지 4년 만에 무죄... 검찰과 질긴 악연

그로부터 6개월 후인 2003년 12월 12일과 13일 이틀 간 국내 언론은 '뇌물 먹고 박꽃이 기어코 졌다', '꽃잎 뇌물에 지다' 등의 제목이 큼지막하게 장식했다. 김대중 정권의 '꽃'으로 불려왔던 박 전 장관에 적용된 150억 원 뇌물수수 등의 혐의가 1심 법정에서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특검조사를 받으며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랴'라는 말을 남기고 구금된 지 6개월 만이다.

박 전 장관의 혐의는 크게 대북송금 과정에서의 실정법(남북교류협력법 등) 위반과 현대비자금 150억 원의 뇌물수수로 나뉜다. 당시 이 사건의 핵심쟁점은 박 전 장관이 이익치 현대 회장으로부터 150억원 상당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받았느냐는 것인데 박 전 장관측은 이 전 회장과 김영완 씨가 짜고 '배달사고'를 일으켰을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3년 후인 2006년 5월 25일 그가 다시 법정에 섰다. 이날 박 전 장관은 4년여에 걸친 법정공방 끝에 현대비자금 150억 원을 뇌물로 받았다는 혐의를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 이재환)는 현대로부터 150억 원을 뇌물로 받았다는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 전 장관의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서 뇌물수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2003년 6월 대북송금 특검에서 긴급체포 된지 4년 만이다.

2004년 11월 대법원은 박 전 장관에게 돈을 건넸다는 김영완씨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그 뒤 검찰은 미국으로 도피한 김씨를 해외 영사관에 출두토록 해 진술을 받고 이 전 회장을 재조사하는 등 보완 조사를 벌여 박 전 장관에게 징역 20년에 추징금 148억5000여만 원을 구형했었다.

그런 검찰은 법원의 무죄 판결에 대해 즉각 "상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검찰과의 질긴 악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결국 그는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알선수재죄 등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그럼에도 그는 "바람에 진 꽃, 햇볕에 다시 필 것"이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검찰총장 후보 주저앉힌 '청문회 스타' 

검찰총장 내정 뒤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물고 불거져 결국 사퇴한 천성관 서울중앙지검장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퇴임식을 마치고 청사를 떠나며 직원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 천성관 지검장 검찰총장 내정 뒤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물고 불거져 결국 사퇴한 천성관 서울중앙지검장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퇴임식을 마치고 청사를 떠나며 직원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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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후 다시 3년이 흐른 2009년 7월 13일. 법정 아닌 국회에서 검찰총수로 내정된 후보자와 마주했다. 18대 국회에 등원한 그가 법사위를 택한 것은 어쩌면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은 이날따라 더욱 날카로웠다. 시종일관 검찰총장 후보자를 빠져나갈 수 없는 코너로 몰아갔다.

정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박 의원의 날카로운 추궁이 돋보인 청문회 자리였다. 결국 검찰총장 후보자는 끈질긴 추궁에 위장전입 사실을 시인했고, 자신의 아들 결혼식을 '조그만 교외'에서 치렀다고 말했다가, "6성급 W호텔이 조그만 교외냐"는 박 의원의 지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또한 박 의원이 밝혀낸 '15억5000만 원 채권자' 박 모씨와 '밀착 관계'는 후보자를 떨어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박 의원은 2004년, 2008년 두 차례 후보자와 박 모씨 부부가 일본으로 동반 골프여행을 갔다는 사실을 처음 폭로했다. 또 후보자 부인이 해외여행 때마다 고급 명품을 사들이는 등 호화 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끈질긴 엄호사격에도 청문회 하루만인 14일 밤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가 전격 사퇴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청와대의 '작품'으로 발탁된 후보자가 임명장도 받지 못하고 낙마하게 된데 대해 더는 할 말을 잃었다. 언론은 일제히 '박지원 의원의 정보력이 단연 빛났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이상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이 느껴져..."

국회 청문회가 끝난 지 1주일 여 지난 7월 20일과 21일. 묘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보복의 칼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이 느껴진다고 그는 밝혔다. 박 의원은 20일 오전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후보자 지명 철회를 15일에 했고 15~16일 청와대와 국정원, 급기야 검찰에서 움직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알아냈다"며 '이상한 분위기'를 전달했다.

그는 이어 "당 지도부와 법사위원 중심으로 법무부와 대검, 국정원 고위간부들에게 확인했다"며 "그들도 '적반하장의 조사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특히 자료 입수 경위와 관련, "정당한 의정활동의 산물이고 입수 경로는 말씀드리기 곤란하다. 나는 의리를 중시하고 어떤 경우에도 책임을 진다"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아울러 '국가기관에서 관리하는 사생활 정보가 유출된 만큼, 제보자를 색출해 엄정 처벌하겠다'는 검찰 입장에 대해 "그렇게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검찰이 PD수첩 작가의 이메일을 다 공개하고 YTN 기자들의 이메일을 샅샅이 뒤졌겠느냐"고 반문한 뒤 "과거 정형근 의원이 국정원 정보를 갖고 많은 폭로를 했지만 그것을 갖고 수사한 적이 있느냐"고 꼬집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이날 벌어졌다. 박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을 <조선일보>가 대변하고 옹호했다는 점이다. 이날 <조선일보>는 사설 '검찰, 지금 '박지원 의원 정보 출처' 조사할 땐가'에서 "검찰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의 고가 면세품 구입 등을 폭로한 것에 대해 정보 유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며 "검찰이 유출 경위를 캐겠다고 달려든 그 정보가 없었다면 천 전 후보자의 부적절한 처신은 그대로 묻혀버렸을 것이다"고 두둔했다.

"불법적인 정보 유출로 인한 사생활 침해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검찰이 뒷돈을 대주는 스폰서들과 공생해 온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털어버리는 게 더 급하다"는 사설은  "만일 검찰이 청와대 등 여권 핵심과의 어떤 교감 아래 벌인 일이라면, 인사 검증에 실패한 사람들이 되레 화풀이를 하려 한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 <조선> <중앙>, '병주고 약주고...'

웬일일까. 6년 전인 2003년 6월 26일 사설 '역시 돈 주고 산 정상회담이었나'와 6월 28일 사설 '김영완 게이트 특검이 나서라' 등과는 대조적이다. <조선>은 당시 대북 비밀송금 사건에 대한 특검의 수사과정에서 제기된 온갖 의혹을 문제삼아 특검을 촉구했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엄청난 국민의 혈세를 북한정권에 몰래 갖다 바쳤다"며 그 문제만 제기되면 거품을 물었던 신문이다.

그런데 왜 그를 두둔한 것일까? 인사청문회로 당내에서 '스타'로 떴기 때문에?, 새로운 의혹들을 시리즈로 폭로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과거와는 다른 이중적 태도여서 석연치가 않다. 그러나 언감생심. 다음날인 21일 <중앙일보>의 한 꼭지 기사가 이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박지원 의원에 정보 넘긴 '빨대 공무원' 드러날까'란 기사는 "검찰은 관세청 직원이 내부 정보를 박지원 민주당 의원 측에 넘긴 것으로 확인될 경우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 위한 혐의로 소환할 것을 검토 중이다"며 엄포를 놓았다.

"이 법에 따르면 공공기관 직원이 개인정보를 누설하거나 타인에게 제공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며 "검찰은 천 전 후보자가 사퇴한 14일 직후 내사에 착수했다"고 한 기사에선 복수의 칼바람이 읽힌다. 이것이 정치 현실이라는 생각도 함께.


태그:#박지원, #천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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