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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임선생님이 내일 전근을 간대."
"전근? 전근이 뭣인디?"
"인자 우리 그만 갤치고 쩌그 육지에 있는 다른 학교로 가뿐다, 이 말이여."
"……"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종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반장인 희철이가 교무실에 다녀오더니 담임선생님의 전근소식을 알렸다. 떠들썩하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2년 동안이나 담임을 맡았으니 이제 좀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긴 했다. 그런데 아예 학교를 떠나버린다니 뜻밖이었다.

그 여자 선생님은 우리와 많이 달랐다. 우선 생김새가 그랬다. 나는 굴전리와 용출리를 통틀어서 그렇게 희고 뽀얀 살빛을 가진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집의 선자누나도 마을 사람들로부터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 여자 선생님은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런 말로 형용할 대상이 아닌, 우리와는 아주 다른, 저기 저 쪽 선계(仙界)의 어디쯤에서 온 사람 같았다.

나는 학교 공부 이외에 그 선생님 때문에 많은 것을 새로 알았다. 비가 오면 볏짚이나 띠를 말려 엮은 도롱이를 쓰고 다니고, '하루 우산'이라고 불리는 비닐우산을 구경한 것이 전부였던 우리에게, 햇볕이 쬘 때에도 우산(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신기한 사실을 몸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그 여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은 교무실이나 교실이나 복도를 걸을 땐 꽃무늬가 박혀 있는 슬리퍼를, 그리고 학교 밖으로 나갈 땐 울퉁불퉁한 시골길에 알맞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지만, 교정을 활보할 일이 있으면 어느 사이에 뾰족구두로 갈아 신고 사뿐사뿐 걸어 다녔다. 청소를 아주 잘 못 했다거나 수업시간에 심히 떠들었다거나 학급에서 도난사건이 발생했다거나 하는 경우,
"너희들 다 운동장으로 집합해!"
이런 명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는데 선생님이 내린 벌이라야 기껏 운동장 다섯 바퀴를 돌게 한다거나 엎드려뻗쳐 몇 번을 하는 정도였으므로, 그 정도야 산으로 들로 바다로 싸돌아다니며 잔뼈를 키워온 우리들에겐 벌이랄 것도 없었다.

그것보다, 운동장에 모여 있을 때 그 선생님이 가까이 오는 것 자체가 차라리 두려웠다. 그 선생님은 화사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예쁜 몸짓으로 교정을 활보했으나 우리는 그 선생님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심상찮은 흔적(뾰족구두의 뒤축에 패인 구멍)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다.

당시 우리는 양말을 신기는커녕 신발도 누더기 꼴이었다. 그 때에  보급되기 시작했던 검정고무신 역시 재생고무로 만들어 질이 좋지 않았으므로 나무하러 갔다가 등걸 끌텅을 잘 못 밟으면 단박에 찢어지기 일쑤였다. 찢어진 고무신은 집으로 가져와서 스스로 꿰매야 했다. 신발 뒤축 부근은 고무가 두꺼워서 좀처럼 바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바늘 귀 쪽을 초가집 기둥에 대고 밀어붙여서 낑낑거리며 바느질을 했다. 물론 그러다 바늘을 부러뜨리면 나중에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어야 했고.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만일 그 선생님이 운동장을 걸어 다니다가 뾰족구두 뒤축으로 실수로라도 우리의 발등을 밟아버린다면…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선생님이 신고 있을 때 직각삼각형의 공간 구도를 만들어 내는 그 신발을 나름대로 '조새신발'이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조새는 어머니들이 갯바위에서 굴을 딸 때 사용하던 갈고리의 이름이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도회지에서 온 그 여선생님을 우러러는 봤으되 썩 존경할 마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선생님과 초등학교 제자의 관계에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표현이 좀 우습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선생님도 나도 제가끔 살아온 자신의 생활습벽에 어긋나는 것들 모두에 대해서 적잖이 거부감을 느꼈던 듯하다. 어느 날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말했다.

"내일부터는 방과 후에 운동회 연습을 할 것이니까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점심을 싸오도록 해요."
"와!"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 상급 학생들만 싸들고 다니던 도시락을 우리도 지참하고 등교하게 됐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들떴던 것이다. 그러나 마냥 좋아만 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만 해도 양은도시락을 갖추고 있는 집이 드물었기 때문에 오륙학년 형이나 누나들 역시 대개는 평상시 사용하던 밥그릇에다 점심밥을 담아서 들고 다녔다.

"밥은 담었는디 반찬을 어따 갖고 가야 쓰까?"
놋주발에 보리밥 한 그릇을 눌러 채우고 나서, 어머니는 점심 반찬으로 가져갈 멸치젓갈 종지를 어찌할까 궁리하더니,
"여그다 요러엏게 해서 갖고 가면 쓰겄구나."

젓갈 종지를 보리밥 한가운데에다 꼬옥 눌러 박더니 주발뚜껑을 닫고서 손수건으로 싸서 묶었다.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멸치젓갈을 도시락 반찬으로 챙겼다. 그 지역은 멸치가 흔했다. 생일도에만도 멸치어장이 서너 군데나 되었다. 우리 큰집 역시 멸치어장을 하고 있었는데, 갓 잡아온 멸치는 납작한 대소쿠리 같은 데에다 담은 다음에 팔팔 끓는 가마솥 소금물에 순간적으로 담갔다 꺼낸 뒤, 갯돌밭에 그물을 깔고 말리는 절차를 거쳤다. 그런데 멸치가 많이 잡히는 경우 처리곤란지경이 된다. 그러면 마을 소사가 또 이런 욋소리를 한다.

"주민 여러분! 시방 어장에 멜치가 징허게 많이 잽헤서 젓데미로 나눠준다고 항께 싸게들 어막으로 가보시오!"
이런 욋소리가 떴다 하면 마을 사람들은 화목으로 쓸 장작 서너 개비를 인사치레로
가지고 가서 어장 주인에게 건네주고, 대신 항아리며 양철통에다 가져올 수 있는 만큼의 젓데미(젓갈 재료용 멸치)를 이고 메고 집으로 왔다. 그러니 집집마다 젓갈 항아리들이 즐비할 수밖에. 우리는 풋고추를 먹을 때에도 된장에 찍어먹는 경우는 드물었고 멸치젓갈을 고추허리에 휘감아서 싹둑 잘라 먹었으며, 배추쌈이나 상추쌈을 할 때에도 반드시 젓갈을 놓았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자, 점심들 먹자. 선생님들도 각자 교실에서 여러분하고 같이 점심을 먹으라는 교장 선생님 특별지시가 있었다. 뭣들하고 있어. 전부 도시락 꺼내봐!"
여선생님이 앙증맞은 자기 도시락을 책상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선뜻 점심밥을 꺼내지 못 하였다. 어쩐지 그 여선생님한테는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어? 선생님 말이 안 들려? 지금부터 열을 셀 때까지 도시락을 꺼내서 뚜껑을 열고 밥 먹을 준비를 끝마쳐야 돼. 말 안 듣는 녀석은 혼내줄 거야. 하나, 둘, 셋…."
그러나 선생님은 열은커녕 다섯까지도 다 세지 못 하였다. 아이들이 후다닥 점심 그릇을 책상에 올려놓고 일시에 뚜껑을 열었는데 순식간에 교실 안에 멸치젓갈 냄새가 진동하였고,
"우엑! 이, 이게 무슨 냄새…"
선생님은 코를 틀어쥐고서 교실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왜 그란다냐?"
종석이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고,
"우리 점심 벤또 반찬 그럭에 있는 퉁멜(통통하고 큰 멸치)들이 한꾼에 방구를 뀌 부러서 냄새가 독항께 안 그라냐."
장난꾸러기 병수가 그렇게 받는 바람에 우리는 짧게 웃었다. 더구나 사내아이들은 놋주발 도시락을 손에 들고서 조심성 없이 마구 흔들며 뛰어왔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주발 뚜껑을 열자 보리밥이 온통 시커먼 멸치젓국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냄새는 둘째 치고 우리가 봐도 흉측한 그것을 점심밥이라고 펼쳐놓았으니 그 여선생님이 구역질을 참아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 날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기분이 영 찜찜하였다. 무엇인가 내가, 혹은 우리가 그 선생님에게 크게 잘 못 한 것 같기도 했으나 곰곰 생각해보면 잘 못 한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다음부터는 설령 오후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도시락을 지참하라 하더라도 굴전리 사는 우리들은 이제 점심밥을 싸 가지 않았다. 물론 '젓갈 소동' 이후로는 그 여선생님이
교실에서 우리와 함께 점심을 먹는 일도 없었다. 거리가 오리 정도였으므로 나를 비롯한 굴전리의 사내아이들은 4교시 끝종을 치자마자 집을 향해 달렸다. 젓갈범벅의 보리밥을 교실에서 꺼내놓았다가 창피를 당하느니 아예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 집에 가서 식은 보리밥 멫 숟구락 묵고 와봤자 금방 꺼져분께 그라지 말고 쩌그 저…저놈을 조깐 캐묵는 거이 어짜겄냐?"
연앳골 시냇가를 지날 무렵 희완이가 길옆의 고구마밭을 턱으로 가리키며 은근히 제안을 했고,
"그래, 좋아, 히히히."
우리는 금세 의기투합했다.

두어 명은 길모퉁이에 가서 밭주인이나 혹은 동네 어른들이 오는지 엿을 보았고, 나머지는 돌담 울을 넘어서 고구마 밭으로 기어 들어갔다. 금이 크게 간 쪽의 두둑 흙을 파헤치자 제법 큰 고구마가 흰 자태를 드러냈다(당시 우리 동네 고구마는모두 흰고구마였는데 왜 지금은 온통 보라색 고구마 일색인지 나도 모르겠다). 우리 예닐곱  명은 저마다 한두 개씩의 고구마를 캐들고 밭에서 나왔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고구마 껍질을 길바닥에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연앳골 냇가로 가서 껍질을 대충 벗긴 다음, 으적으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난 평생 그렇게 맛난 생고구마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종석이가, 제가 캔 고구마를 들어 올려 보였다. 고구마 한 가운데 깊숙이 골이 파인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그 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야, 딴 놈은 안 그란디, 이 감재만 왜 요렇게 생겠는지 몰르제? 나는 알어. 감재 순을 밭에 심을 때, 요놈은 여자가 심었그등."

눈치 빠른 녀석들이 먼저 킥킥거렸고 말귀가 어두운 아이들은 한참 있다가 키득거렸다.
우리는 꽤 여러 차례 연앳골 시냇가의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서리를 했다. 여자아이들이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고맙게도 입을 다물어주었다. 그러나 꼬리가 너무 길었다. 어느 날 밭주인이 김을 매러 고구마밭에 나왔다가 뿌리가 뽑혀 시들어 죽은 고구마 줄기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서 득달같이 교장 선생님에게 쳐들어가 한바탕 대거리를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날도 고구마서리로 허기를 적당히 메운 채 학교로 돌아왔는데 교문 앞에 교장 선생님과 우리 담임인 그 여선생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굴전리로 점심 먹으러 올라갔다 온 놈들 운동장에 한 줄로 모여!"
교장 선생님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러나 일단 잡아 뗄 요량이었다.

"연앳골 정상호씨 밭에서 몰래 고구마 캐묵고 온 놈들 앞으로 나와!"
그러나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나도 시치밀 떼고 버텼다. 나중에 왜 안 나왔느냐 물으면…고구마를 캐먹은 건 사실이지만 그 곳이 정상호씨 밭인 줄은 몰랐다고 둘러댈 참이었다.
"허허, 요놈들이 뚝 잡아뗀다 이 말이제? 좋아. 전부 손바닥 펴서 내밀어!"

나는 지체 없이 손바닥을 펴들었다가 다음 순간 아차, 하고 말았다. 생고구마의 진이 손바닥 여기저기에 검게 얼룩이 져 있었던 것이다. 함께 서리를 했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우리는 종아리가 얼얼하도록 얻어맞았다. 매를 맞는 것쯤 참을 만했다. 하지만 그 옆에 서서,
"세상에, 이런 꼴은 첨 보겠네. 기가 막혀서…배꼽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남의 밭에 들어가서 생고구마를 캐먹는 도둑질을 하다니…."

경멸을 담은 눈빛으로 우리를 쏘아보던 그 여선생님의 얼굴은 마주하기가 참말 힘들었다.
우리가 보기에 담임선생님은 찡그리기 선수였다. 그 섬마을 학교의 모든 것이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 선생님은 신나고 즐거워야 할 음악 시간에마저도 짜증을 내었다. 학교에 낡은 풍금이 한 대 있었는데 그 풍금을 음악수업이 든 교실로 이리저리 운반하는 일은 오륙학년 형들이 맡았다. 가뜩이나 오래 된 풍금을 복도에 넘어뜨리고 어쩌고 하다 보니 중간중간 이가 빠져 있는 등 이미 고물이 다 돼 있었다.

풍금 뚜껑을 열어젖힌 선생님은 우선 건반의 상태를 보고는 푹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윽고, 두 손으로 연주를 한다고 했는데 딸그락거리는 소음만 들릴 뿐 연주가 되지 않았다. 화가 난 선생님이 풍금 뚜껑을 꽝, 닫으며 투덜거렸다.
"어휴, 아무리 가난해 빠진 촌 학교라지만…."
우리는 또 우리가 무얼 잘 못 한 것인 양 그 선생님에게 미안해졌다.
"아, 풍금은…요렇게 진득허니 눌러줘야 소리가 난당께요."
옆 교실의 4학년 담임선생님이 와서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여선생님은 일찍이 피아노를 배웠던 게 틀림없었다. 건반을 톡톡 건드리기만 하면 띵똥띵똥,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괜히 가난한 학교 핑계를 댔던 것이다. 아니, 생일도 사는 사람들 모두가 가난했으니 학교도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자, '보름달'이라는 동시를 같이 한 번 읽어보자. 달 달 무슨 달/ 쟁반 밭이 둥근달…잠깐만, 여기서 쟁반같이 둥근 달이라 했는데 쟁반이 뭔지는 다들 알지?"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대답하지 못 했다. 우리는 쟁반이라는 물건을 구경해본 적도,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쟁반, 있잖아 쟁반! 손님이 오면 차도 타서 내가고, 과일도 깎아서 여기다 받쳐 들고 가서 대접하고…그 쟁반 몰라?"
선생님 혼자서 답답하다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우리는 이렇게 수군거렸다.
"손님이 집에 왔는디 주인이 차를 타고 어디로 내뺀다는 것이여?"
"손님이 오면 막걸리를 받으러 가야제."

오지 시골마을에서 커피나 녹차 따위의 차(茶)를 타서 마시는 것이 생활이 된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어차피 보름달이 둥글다는 것을 표현을 할 바에 솥뚜껑이나 주전자 뚜껑 같이 둥글다 했더라면 시골 아이들도 쉬이 알아들었을 것이고, 그 살결 뽀얀 도회지 출신의 여선생님으로부터 '촌놈들'이라는 소리를 또 한 번 듣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그러나 한편 그 선생님은 나에게, 내 스스로 촌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 바닷가 갯돌밭에 우리반 학생들과 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모였다. 똑딱선 하나가 통통통통, 발동을 걸었다.
"얘들아, 서울에 가더라도 너희들 잊지 못 할 거야. 공부 열심히 해."
선생님이 한 사람씩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여태까지 그렇게 자상하고도 인자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육지 학교로 전근을 가는 게 아니라 은행에 다니는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학교를 떠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나도 자꾸만 코끝이 시큰거렸으므로 도리질을 하면서 애써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리보고 걸핏하면 촌놈, 촌놈 하듬만 딴 디로 가뿐다고 항께 시원해 죽겄네.'
그러나 자꾸만 콧등이 매워왔다. 내 차례가 되었다. 
"선호야, 잘 있어. 아, 참, 그 폭깍질이라는 말…그거 잊지 않을게."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윽고 선생님이 배에 올랐다. 똑딱선을 타고 큰 마을 객선머리까지 갔다가 거기서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육지로 갈 것이었다. 선생님을 태운 배가 저만치 멀어지다가 다시 뱃머리를 돌리더니 뱅글, 한 바퀴 원을 그렸다. 예쁜 양산을 쓴 선생님이 우리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어보였다. 아이들이 울었다. 나도 아예 갯돌밭에 퍼질러 앉아서 폭깍질, 아니 딸꾹질까지 해대면서 울었다.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이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그렇게 아플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요렇게 눈물이 난다냐. 내가 그 여선생님을 사랑한 것 아녔으까?'


#밥그릇 도시락# 멸치젓# 가난#섬마을 선생님#전근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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