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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으로 가는 길목, 커다란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옥천포도축제'를 알리고 있었다. 좀 이른데…, 하면서 떠오른 한 장면. 바로 포도나무 위로 길다랗게 쳐놓은 비닐이었다. 그러니까 요즘은 과수원에도 이런 속성과가 있는 것이다. 비닐로 보온을 해서 실과가 빨리 익게 만드는 것 말이다. 뭐든 빠른 시대이다보니 과일까지도 이런 과정을 거쳐 빨리 우리를 찾아오게 만든다.

옥천 포도축제...
▲ 포도축제 옥천 포도축제...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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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내가 바로 포도과수원집 딸이었으니,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태어날 때부터는 아니었다. 밭이 있어도 과수원 만들 생각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과수묘목을 심고 일정 기간이 지나야 소출이 나는데 그동안 대식구가 먹고 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저러나 힘든 건 마찬가지, 어느 해 아버지는 큰 결심을 하셨다.

포도농사를 지으셨던 그 시절의 부모님이다.
▲ 부모님... 포도농사를 지으셨던 그 시절의 부모님이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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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모든 결정은 할아버지 손에 쥐어져 있었고, 할아버지는 선비였던 터라 살림만 쥐고 있었지 일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웠지만 의논 한 마디 없이 덜컥 묘목을 사다가 밭에다 심으셨다. 미리 의논하면 반대할 게 뻔하고, 그렇다고 대책없이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7남매나 되는 자식들 공부 시켜야 하고 큰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훗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막상 포도나무를 심고 났더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됐는지, 할아버지도 별 말씀 없으셨단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이듬해 날씨가 너무 추워 나무가 반이나 얼어죽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할아버지가 역정 내실 게 두려워 마음을 많이 졸이셨다고 한다. 우리는 전혀 몰랐다. 아주 어릴 때여서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갔다. 그저 우리 집에도 과수원이 생겨 그 맛있는 포도를 먹게 되었다는 기쁨에 들떠 친구들에게 자랑이나 하고 다녔다.

그러나 과수원이 얼마나 힘든 건지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는 천장식이어서 위를 올려다보고 일을 해야 했다. 천장식은 나무가 크고 무성하게 가지가 뻗어 나가 잎이 하늘을 덮으면서 포도가 달리는 형태였다. 그러니 고개를 바짝 들어야 나뭇가지를 다듬고 열매를 고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초봄에 가지 치기에서부터 순치기, 열매 솎기 등등. 맛있어서 먹기 좋은 포도알 하나에는 정말 많은 정성이 들어갔다. 자연히 아버지는 포도밭에서 살다시피하면서 정성을 들이셨다. 다 익어서 딸 때쯤 되면 힘은 배로 들었다. 비가 오면 터지고 날씨가 후덥지근하면 썩고. 게다가 까치란 놈이 포도를 좋아해서 꼭 크고 맛있게 생긴 것만 골라서 쪼아먹고는 달아났다.

와인코리아 옆에 있는 포도밭. 이렇게 나무 위로 비닐을 쳐서 포도가 빨리 익게 만들었다.
▲ 포도밭 와인코리아 옆에 있는 포도밭. 이렇게 나무 위로 비닐을 쳐서 포도가 빨리 익게 만들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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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포도는 일일이 손으로 선별해서 미리 따줘야 했다. 다른 포도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그런데 늘 위를 바라보고 하는 일이라 우리는 조금만 일을 해도 목이 아파 엄살을 부리곤 했다. 목을 손으로 받치는 시늉까지 하면서. 그러나 아버지는 끄떡도 않으셨다. 보다못한 조카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목 안 아파?"
"으응, 할아버지는 목이 아프지 않단다."
"어째서?"
"할아버지는 몇 십 년을 위만 쳐다보고 일했더니 아주 굳어버렸단다."

사실 아들딸이나 손주들은 그저 먹는 것만 좋았지,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일은 전부 아버지 차지였고 우린 거의 시늉만으로도 엄살을 떨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우리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으셨다. 힘은 들었어도 자식들은 다 도시에서 아버지 계획대로 공부를 시켰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우린 무슨 때나 돼야 겨우 얼굴이나 내밀었고.

마을마다 이렇게 그룹을 지어 포도를 판매하고 있었다.
▲ 포도판매.. 마을마다 이렇게 그룹을 지어 포도를 판매하고 있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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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쌓아놓고 파는 포도를 보니 옛날 나무궤짝에 담았던 아버지 포도가 생각났다.
▲ 포도 이렇게 쌓아놓고 파는 포도를 보니 옛날 나무궤짝에 담았던 아버지 포도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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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지 않고 그 때는 파는 것도 큰일이었다. 요즘은 자동차가 많아 과수원 옆 길에 천막을 만들고 앉아 팔기도 하고 계약판매도 한다지만 그때는 꼭 상회나 공판장(그때는 깡이라고 했다) 같은 데로 싣고 가야 팔았다. 수량이 많으면 제값도 못받고 날씨가 안 좋으면 더 못받고. 그래도 한꺼번에 넘기는 공판장보다는 소매상인들과 직거래를 할 수 있는 상회로 가야 값을 낫게 받는다고 아버지는 꼭 상회로 실고 가셨다. 상회 앞에 포도궤짝(나무로 만든 궤짝이었다)을 산처럼 쌓아놓고 오는 사람마다 일일이 흥정을 해서 팔았는데, 사러 오는 사람이 없으면 밤이 늦도록 포도를 지키면서 밤을 넘기기도 했다.

한 번은 추석날까지 포도가 있어서,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포도과수원을 지키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아버지를 보고 물었다.

"할아버지 포도가 아직도 있나요?"
"그럼 있지. 어서 이리로 들어와 보슈."

포도를 살펴보던 이 남자 아버지를 쳐다보며 묻는다. 보기에 포도알이 실해 보이는데 값이 싼 것 같으니까 조금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할아버지, 이 포도 속에는 좋지 않은 게 들어 있겠지요?"
"이 사람, 장사 웃덮게란 말도 못 들어 보셨슈. 속엣 것이야 암만해도 위엣 것만은 못헌 게 당연한 게지. 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쁜 걸 넣지는 않었으니 안심허구 가져가슈."
"어이구 할아버지 아주 시원시원하시네요."

아버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주 낙천적이고 솔직하게 사람과 일을 대하셨다. 그래서 아마 목도 아버지 뜻대로 일하기 좋게 굳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버지의 선견지명은 맞아떨어졌다. 힘은 들었지만 다른 농사에 비해 몇 배의 소득을 올렸고 그 덕에 우리 형제들은 어려운 거 모르고 성장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와인코리아 전경...
▲ 와인코리아 와인코리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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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코리아 시음장이다.
▲ 시음장 와인코리아 시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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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포도 재배나 판매 모두 자치 단체가 많이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영동에서는 와인코리아라는 와인을 생산하는 기업도 있고, 옥천에서는 포도축제를 열어 포도농사를 장려하고 있었다. 축제장에서는 마을마다 포도를 전시해 놓고 판매도 하고 있었고. 옛날 무겁고 볼품 없었던 나무 궤짝은 종이 상자로 바뀌었고 포장도 아주 예쁘게 잘 돼 있었다. 그러나 포도알은 아버지 것만 못했다. 아직 제 철이 아니어서도 그렇겠지만….

축제장에서 사온 이른 포도다.
▲ 포도 축제장에서 사온 이른 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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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셨고 포도과수원 역시 아버지를 따라 사라져 버렸지만 유난히 포도알이 굵었던 아버지의 포도는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다. 포도 땜에 굳어진 아버지의 목을 생각하면 여전히 울컥 슬픔이 밀려 오지만 우리는 언제나 남과 다른 생각으로 포도를 대한다. '이 한 알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데' 하면서.


태그:#포도, #포도과수원,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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