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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 20대 초반, 나는 낚시가 마냥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 20대 초반, 나는 낚시가 마냥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다.
ⓒ Allied Filmma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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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낚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던 스무살 무렵, 나이도 어린데 참 드문 취미를 갖고 있다 생각했었지요.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 위를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이 좋아 자꾸 가게 된다"는 말에도 크게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답니다.

결혼을 하고 그 남자가 가져온 짐들 속에서 커다란 낚시 가방을 발견했을 때도, 그 낚시 가방을 마치 대단히 소중한 물건이나 되는 듯 창고가 아닌 자기 방에 가져다 두었을 때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지요.

신혼 초의 어느 날이었어요. 입덧으로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저에게 남편이 물었습니다.    

"낚시 갈래? 친구들하고 낚시 가려는데…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하면 같이 가던지."
"아니, 난 몸도 그렇고… 낚시 좋아하지도 않고. 혼자 다녀와. 재미있게 놀다와."

결혼 후 처음 낚시를 간다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도 여러 번 가고 싶어했지만 제 눈치를 보아 참는 듯 보였거든요.

그날 저녁.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온 남편은 마치 전리품이라도 얻어 온 듯 자랑스럽게 으스대면서 제 앞에 초록색 비닐 가방을 열어 보였습니다. 커다란 물고기 몇 마리가 숨을 헐떡이며 저를 바라봅니다. 

"아아악! 제 네들 안 죽었잖아. 저걸 어쩌려구 그래. 난 싫어. 비린내도 싫고 죽어가는 물고기 보는 것도 싫어. 저런 걸 왜 집에 가져와. 빨리 어떻게 해봐. 여기다 두지 말고 얼른."

격하게 거부감을 나타내는 저에게 실망했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남편은 물고기 가방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낚시는 제가 상상한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정적이거나 사색적인 취미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주말낚시과부', 그게 바로 저였답니다

뭐든 첫 번째 시도가 어렵다고하지요. 결혼 후 첫 낚시로 저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며 길을 튼 남편은 이후로 더욱 자신의 취미생활에 몰두했습니다.

친구들과는 영원한 우정을 위해, 아주버님들과는 형제애를 돈독히 하기 위해, 회사 낚시 동호회활동은 동호회 회장이신 이사님과 친분(?)을 위해 등등. 술 좋아하는 사람이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 술을 마시듯 남편도 낚시를 하기 위해 온갖 핑계를 다 만들어 한 번이라도 더 나가려 애를 썼습니다.

그럴수록 전 남편이 미워질 수밖에요. 주말이면 집안일이고 아이들이고 나 몰라라 낚시 가방을 메고 집을 나가버리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을까요? '주말낚시과부'라더니 제가 바로 그 격이었답니다. 

낚시를 다녀오면 또 어떻구요. 장비를 닦고 정리한다면서 목욕탕에 비린내를 진동하게 하는건 보통이고 지렁이 통을 거실 바닥에 떨어뜨리고 아이들까지 불러 주워 담느라 난리를 치는가 하면, 진흙투성이 신발과 떡밥찌꺼기, 생선비늘이 잔뜩 붙어있는 옷가지는 언제나 내차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 간 이후에도 낚시에 대한 남편의 열정은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휴가를 가거나 잠시 여행을 떠날 때도 낚시장비를 잊지 않는 남편. 아들들의 고사리 손에도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쥐어주며 엄청난 낚시가족이라도 된 듯 자랑스러워했지만, 한편으론 못마땅한 눈으로 그 모습으로 바라보는 제가 편치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라 한들, 나갈 땐 마누라의 도끼눈이 뒷꼭지에 따갑게 박히고 다녀와도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입을 댓 발씩 내민 굳은 얼굴로 불안감을 조성하니, 나가는 횟수를 조금씩 줄이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남편의 작업에 이끌려 도착한 의암호

남편이 그렇게 마누라 눈치를 살피며 낚시를 자제하던 어느 날이었을 겁니다. 무료하게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는 저에게 남편이 은근한 목소리로 작업(?)을 걸어옵니다.

"여보, 시원한 강바람 쐬러 갈까? 강물 위에 별장 같은 작은 집이 있는데 그 집에서 하늘을 보면 별이 땅으로 쏟아지는 것 같다니까. 어두운 강물 위에 떠 있는 케미라이트 불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당신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다니까."      

물 위에 떠 있는 예쁜 집에서 남편과 아름다운(?)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남편 말대로라면 물 위에 떠 있는 예쁜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를 듣고 쏟아질 듯 촘촘히 박힌 별을 바라보는 환상적인 밤이 될 테니 말이지요.

서울에서 두 시간여를 달려서 간 곳은 의암호였습니다. 남편은 전에도 자주 와 보았다는 듯 익숙하게 낚시점 아저씨를 불러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구입한 후 배에 올랐습니다.

"고기 많이 잡으시구요. 필요한 것 있으시면 큰 소리로 부르세요."

우리를 좌대에 내려놓은 아저씨는 다시 배를 저어 뭍으로 가버리고 넓은 의암호 위에 놓여진 좌대엔 남편과 저, 단 둘이 남았습니다. 이제 우린 누구의 시선도 없는 외딴 곳에서 아름다운 밤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낚시 중독' 남편의 감언이설에 속았습니다

낚시배
 낚시배
ⓒ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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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밤을 보내게 될 방은 어떤 모습일까? 설레는 가슴을 누르며 살그머니 방문을 열어보니 웬걸 정사각형의 손바닥만한 방안에선 담배냄새가 진동했습니다. 후줄근해 보이는 이불 한 채와 뱅뱅 돌아가는 초록색 모기향만이 덩그렇게 놓여져 있는 방.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근데 화장실은 어디 있어? 세면대는?"
"그런 건 없어. 볼 일은 그냥 강에다 보면 돼. 이게 바로 자연 화장실이라는 거지. 그리고 세수같은 건 하루 참았다 집에 가서 해. 좌대를 타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거야."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는 마누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남편은 낚시 할 채비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낚시대를 꺼내고 낚시 줄에 찌를 달아 깊이를 맞추고 미끼로 사용할 떡밥과 지렁이를 준비하는 모습이 어쩌면 그리도 진지하고 경건해 보이는지요.

"물위에 뜬 찌 보이지? 저게 처음엔 톡톡 작게 움직일 거야. 몇 번 그러다 물속으로 쑥 들어가거나 물위로 쑥 올라오는 듯 하면 한 번에 홱 잡아채는 거야. 알았지?"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물고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루한 일이 또 있을까요? TV도 라디오도 없는 적막한 좌대 위에서 남편은 떡밥을 갈아 끼우고 지친 아내는 노래를 부릅니다.

"물소리 까만밤~ 반디불 무리 그날이 생각나 눈 감아 버렸다~♬"

이제 막 노래에 흥치가 오르려는데 남편이 제 옆구리를 쿡 찌릅니다.

"조용히 해. 고기들 도망간단 말이야. 낚시터에서는 조용히 하는 게 예의야."
      
아! 전 그때야 알았습니다. 제가 철저히 남편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사실을 말이죠. 낚시는 가고 싶은데 아내 눈치는 보이고, 그래서 궁여지책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부부동반이었던 거죠. 남편의 속내를 알았어도 방법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저녁밥을 가져다 준 아저씨는 "내일 다시 오마"라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엄마, 아빠한테 제대로 낚였네~"

남편말대로 캄캄한 어둠 속, 검은 물 위에 빛나는 케미라이트는 아름다웠습니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떠다니고 물 위에는 예쁜 케미라이트가 떠있는 의암호. 하지만 제가 상상했던  남편과의 낭만적 밤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낚시 이외에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으니 말이죠.

밤이 늦도록 낚시대 곁을 지키던 남편은 작은 고기 몇 마리를 놓아주며 새벽을 기약했습니다. 그런데 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거센 물소리와 함께 드문드문 뭔가 기둥에 부딪히는 지 '쿵, 쿵' 소리가 들리는가하면 이름 모를 새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까지…. 무서워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던 거죠.

그렇게 뒤척이다 언제 잠이 들었을까 창밖에 훤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니 언제 일어났는지 남편은 분주하게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거 봐. 많이 잡았지. 아저씨 말대로 새벽에 많이 올라오더라구. 씨알도 좋아. 역시 의암호로 나오길 잘했다니까. 어때? 당신도 좋았지? 이런 게 바로 낚시의 맛이라니까. 우리 자주 오자구. 당신은 정말 남편 하나는 잘 만난 거야. 나같이 착한 남편 있음 나와 보라 그래."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예쁜 집에서 추억에 남을 아름다운 밤을 보낼 수 있게 해준다더니, 화장실도 없고 담배 냄새 나는 방에서 피난민처럼 쭈그려 자게 하고는 마치 엄청 호강이라도 시켜 준 듯 공치사까지 해 대는 모습이라니….

아들에게 그날의 추억을 말해주자 아들은 재미있다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하하하. 엄마 제대로 낚였네."  

맞습니다. 저는 그날 남편에게 제대로 낚였던 것입니다.


태그:#낚시, #좌대낚시, #의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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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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